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19화 (220/258)

219화 소리와 분노 (1)

[누가 나를 깨웠느냐?]

소년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온 곳을 보았다. 커다란 보랏빛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고, 희미한 안개가 바람에 불어 날리듯 그 주위를 휘돌았다. 간혹 섬광이 획을 그리며 무언가의 윤곽을 이뤘다. 이윽고 소년은 그것이 거대한 표범임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똑바로 맞닿은 순간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암흑으로부터 다가왔다.

[내 혼을 훔친 건 누구지?]

표범은 몸을 수그렸고, 머리를 소년에게로 바짝 들이밀었다.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흘렀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끝으로 목깃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고 무언가를 할 마음도 없었다. 소년 스스로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표범은 짜증스레 고개를 내젓고는 외쳤다.

[됐다, 내가 직접 확인하마! 실로 오랜만에 땅을 밟겠구나!]

앞발이 소년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는 순간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소년은 발톱에 딸려 올라가며, 어둠 속에 남은 존재를 보았다. 금발의 청년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범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지만 소년은 그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날 또한 기억했다.

소년은 액자를 떼어내며 벽에 숨어 있던 얼룩을 발견하듯 잊힌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자신을 내몰던 꿈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는 동시에 가까워졌고, 새롭고 오래된 생각들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짐승의 입이 아늑한 다락으로 향하는 문처럼 그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공백을 지나며, 소년은 묻기 시작했다.

*   *   *

성년식을 치르기 두어 해 전, 너를 보러 피송곳니 장원을 찾아갔을 때. 네 딸 부부가 죽었을 때. 그리고 다시 피송곳니 장원에 들렀을 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지?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지?

*   *   *

숲을 이룬 나무들이 들판 가장자리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름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공기는 솜이불만큼이나 포근했다. 나트람은 사촌형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러자 풀 냄새와 흙먼지 냄새가 냄비 속에서 한데 모여 끓어오르듯 했다.

딤 나겔은 땅을 파고 있었다. 칼린카를 위한 무덤이었다.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게 아니라 그가 직접 목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트람은 조금 놀랐다. 그는 이 온유한 소년이 칼린카를 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설령 제물로 바쳐질 놈일지라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껴묻거리처럼 새까만 털짐승 곁에 모여들었다.

"이놈은 태어날 때부터 수염이 없었어. 그래서 같은 배에서 난 것들과 자주 싸웠지. 칼린카는 서로 수염으로 이야기하거든. 뭐, 수염이 없었을지라도 따로 방법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건 난 잘 모르겠어. 알기엔 너무 늦은 거야. 응,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는 삽을 내려놓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칼린카를 품에 안았다. 검정색 덩어리는 요람에 잠겨 새근거리는 아기처럼 평안해 보였고 딤 나겔은 숲이 드리운 그늘 밑에서도 빛났다. 황금색. 슈문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스렸으며 그 빛깔은 현명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어떤 칼린카는 고통을 위해서만 태어난 것 같아. 괴롭힘을 당하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하지. 그렇게 태어난 건 녀석의 잘못이 아니라지만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

딤 나겔은 그런 문장을 뒤이으며 구덩이에 칼린카를 누였다. 나무그늘이 겨우 닿다가 멈춘 곳이었다. 땅을 파내기 전에 미리 떠낸 잔디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하루 중에서 정오만을 잘라내 액자에 넣어둔 것처럼.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공부를 하거나 주문을 연습하거나 가문 일을 배우는 시간만을 도려내서 그게 자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이 평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할 때에만 나머지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면.

나트람은 무덤에 잔디가 덮이고 이음매가 흙으로 메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명문가의 일원이, 혹은 귀족은 될 수 있을 요정이 고작 털짐승을 위해 예우를 갖추는 장면까지도. 딤 나겔은 망자에게 필요한 절차를 마친 후 물을 만들어 손을 씻었고, 몸을 돌려 사촌형제를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아니야, 그냥… 보고 있었어. 평민들이 장례식 치르는 걸 많이 봤어. 다들 그렇게 해.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울어."

말을 마친 소년은 고약한 취미를 들킨 양 얼굴을 붉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딤 나겔은 조용히 웃고서는 그에게로 가서 섰다.

나트람은 사촌의 칼린카를 죽인 후로 많은 일을 저질렀고, 이제는 친구라고 할 상대가 거의 남지 않았다. 헤이딘은 형과 같은 탁자에 앉는 것조차 치를 떨며 싫어하게 되었다. 러스터 역시 그를 하인의 예로만 대했다.

물론 나트람의 마법적 재능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들에게 무뚝뚝하고 사나운 태도는 결점이 아니라 힘의 증표였다. 그들을 가장 매혹시키는 사실은 나트람이 그런 접근에 대해 언제나 거리를 둔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소년에게는 언제나 오만하다는 류의 평가가 따라붙었다. 나트람은 해명하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고고한 천재로 남아 있는 이상 아이들은 그를 멀리서 힐끔거리는 것에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그를 언제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화를 나눌 상대는 딤 나겔만으로도 충분했다. 나트람은 무엇이든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혹은 누군가와 풀밭을 거닐고 싶을 때면 사촌형제를 만났다. 그는 무슨 질문이든 대답해 주었다. 소중한 물건을 아끼는 마음에 대해서. 죽음의 상실감에 대해서. 세상의 기쁨에 대해서.

같은 물음을 수없이 거듭하더라도 금발의 소년은 인내심 많은 스승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자리에. 별불꽃 장원의 안뜰이나 피송곳니 본가의 작은 들판에. 나트람은 딤 나겔을 따라 걸었다.

"동생은 요즘 어떻게 지내? 소식을 도통 못 들은 것 같거든."

"서가에 틀어박혀 있어. 저녁도 거기에서만 먹고. 차투랑가 놀이판을 만들던 게 하나 있는데 그것도 시들해진 것 같아. 항상 제멋대로야. 관심이 있는 건 며칠이고 잠도 안 자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아예 손을 놓아. 러스터가 그 애를 도련님, 도련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야."

"아직 화해를 못 했구나."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사과하고 싶지 않아."

"왜?"

"사과하면 다시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할 테니까. 나는 그 애가 나를 올려다보는 게 싫어. 기분이 나쁘고 끔찍한 느낌이 들어. 그래서 눈을 파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 눈이 없으면 나를 올려다보지도 않을 거야."

"나트람, 저번에 이야기했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적 없어. 이런 말을 하면 평판이 떨어진다는 걸 알아. 그래서 신관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저번에 알려준 건 모두 기억하고 있어. 눈을 파내지도 않을 거야. 그냥 상상만 하는 거야. 계속 참을 거야."

"내 앞에서라도, 신관이 될 계획이 없어도, 상상일 뿐일지라도 마찬가지야. 네가 정말로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마음을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불편한 느낌을 받아. 너와 거리를 두려 하지. 그리고 친한 사람들과 멀어지는 건 너 자신에게도 좋지 못한 일일 거야."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나는 내가 겪어도 괜찮은 일들만 해. 남들이 그걸 왜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어."

"저번에 알려 줬잖아. 사람들은 아픈 걸 싫어하고, 자기 것을 잃는 걸 싫어하고, 이런 말 듣는 걸 싫어해. 네가 지금 하는 소리들은 모두 안 좋은 거야."

"나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 어쨌건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 주잖아."

"그건 내가 너를 알기 때문이야. 대부분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그걸 참아주지 않으려 해.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만큼 평범한 요정이야. 남들처럼 언짢음을 느끼고 가끔은 짜증을 터뜨리기도 하지. 그래서, 그래서 미리 일러두는 거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너는 나랑 계속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진저리를 내기 전에 멈추는 게 좋을 거라고."

그 말을 끝으로 소리가 멎었다. 소년들은 그저 걸었다. 숲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햇볕이 강렬해졌다. 저 멀리 들판의 오른쪽 위편에 붉은 꽃들이 모여들어 자란 게 보였다. 군락은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거품이 일듯 움직였다. 달큰한 향기가 한층 가까워질 무렵 사려깊은 목소리가 침묵으로부터 솟아났다.

"숨결 대신 독을 내쉬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봐. 그 사람이 호흡하는 걸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 그 사람한테 숨을 참으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내가 사람들의 주인이라면, 내가 칼린카의 목을 꺾듯 그 사람의 목도 홀가분하게 꺾을 수 있다면, 반드시 그래 줄 거야. 그게 그 사람 자신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나은 일일 거야."

그리고 딤 나겔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사촌형제를 바라보았다. 무한한 미소가 공포처럼 나트람을 사로잡았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붙잡히는 감각에 정말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했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때문에 두려움도 희열이라 믿을 수 있으며 미움과 사랑을 혼동한다고, 딤 나겔이 직접 말해 주었다. 딤 나겔은 언제나 대답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이번에는 딤 나겔이 물었다. 나트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그를 마주보았다. 양광이 구름으로부터 쏟아져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어깨를 적셨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소년의 몸은 금빛으로 번쩍였다. 미소만이, 뜻을 모르고 설명조차 없는 미소만이 순전한 광채 속에서 둥둥 떠가고 있었다.

"무얼 어떻게 생각하냐는 거야. 나는 모르겠어.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던 나트람은 입을 다물고는 딤 나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두 손이 자신의 목덜미에 얹히게끔 했다. 엄지가 목울대에서 서로 맞닿도록. 그리고 남은 손가락들이 비상하는 매의 날개를 그리도록.

날개가 움츠러들면 비행은 끝난다. 비행. 수많은 종류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는 일. 매에게든 참새에게든 너무나도 당연한 그 무엇. 하지만 칼린카에게는 평생토록 불가능할 무엇.

산들바람이 꽃밭을 헤집고 나와 소년들에게로 다가왔다. 달콤한 냄새가 훅 끼쳤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트람은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을 느끼며 구덩이에 누운 털짐승을 생각했다. 그놈도 털이 검었으므로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

*   *   *

너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 둔할 뿐이라고 했지. 심장이 붙잡히는 감각은 완전히 다르면서도 비슷하기 마련이라서, 사람은 두려움과 희열을 혼동하게 된다고. 나는 그런 걸 특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네 말이 옳은지도 몰라. 칼린카를 죽였을 때에는 너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으니까. 부모님과 러스터가 죽는 상상을 하는 건 혼자만 남은 삶이 무서운 탓일 거야. 하지만 헤이딘은… 헤이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헤이딘이 나를 올려다볼 때마다 내 심장은 검은 불덩이로 변해 이글거리지. 가슴이 바짝바짝 조여들고 목이 말라. 나는 괴로워. 차라리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지 않으면 이 불길이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아. 오늘도 죽이는 생각을 수천 번은 했어. 동생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나는 계속 착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정말로, 헤이딘만 없다면 나는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야.

하지만 이런 이유로 누군가를 죽이면 안 된다는 걸 알아. 그래서인지 헤이딘에게는 아무 죄가 없고 잘못 태어난 건 오직 나뿐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 얌전한데다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동생을 이렇게나 미워할 이유는 없으니까, 동생이 막 요람을 벗어날 때부터 이랬으니까, 그러니까…….

삶은 화려한 색실 목걸이 같아. 연회장의 주인공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두르고 다니지도 못할 물건 말이야. 내가 그런 걸 걸치고 나오면 다들 속으로는 비웃을 거야.

살아있는 것도 똑같아.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속내를 가늠하려 애쓸 때마다, 뭔가 답해야 할 때마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어서. 생각을 그대로 입에 냈다가는 다들 비웃거나 무서워할 거라서. 내가 삶을 누리기에는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돼서.

그러니 이게 내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나은 일일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