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18화 (219/258)

218화 고통이 있었다 (8)

메기도의 넋이 빛을 잃은 후, 헤이딘은 반지를 마타치치에게 맡겨 주길 청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가 격리실에 가는 걸 허락하고서는 헤이딘의 부탁대로 했다. 그때 마타치치는 중앙 공동의 학자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반지를 받아들자마자 외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나요? 설명을 대강 들었는데, 그, 당신 형님이―"

<위로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 일에 대해서는 그냥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잠든 분이 형님의 몸을 빌릴지라도, 요정끼리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난 겁니다. 별것도 없는 집안 사정 말이죠.>

마타치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이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고 초록색 눈동자는 사려 깊은 빛을 띠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거든 오늘만큼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들을 이끌어 가라는 배려가 엿보였다. 헤이딘은 양보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서는, 그녀를 한참이나 마주보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아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벨레다가 심하게 다쳤다는 것만 얼핏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물을 겨를이 없어서… 당신을 보니까 겨우 떠오르는군요.>

"내 쪽문에서 자고 있어요. 둘 다 건강하고요. 중간에 잠깐 깼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안 깨우는 게 좋겠네요. 벨레다는 목걸이가 없었으면 죽었을 뻔했다던걸요."

<그래요, 쉬게 둡시다. 혹시 몰라서 하는 이야기지만 앞서 한 말은 비밀입니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는 것 말입니다. 제자가 죽을 뻔했는데 스승님은 걱정도 안 했냐면서 투덜거릴까 걱정이거든요.>

"이 일로 당신에게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제자나 나나 삶의 삼분지 일쯤을 별채에서 보냈으니까, 형님 손에 죽을 뻔한 것도 매한가지니까… 굳이 따지면 벨레다에게는 자격이 있다고 해야겠군요. 그 애한테만요.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사서 들을 필요는 없는 법입니다.>

헤이딘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마타치치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유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로 안경테를 눌러 쓰고는 입을 열었다.

"참, 나도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클렘이 그러더군요. 당신 제자가, 이 일이 모두 끝나면 반지는 나한테 맡기고 자기는 로야페타에서 장사를 해보려 한다던걸요. 제일 높은 건물을 지어서 개인용 주차장에는 최고급 수레를 채우고, 클렘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닐 거라고요.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벨레다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직접 듣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클렘이 거짓말을 할 아이는 아니죠."

<허어.>

헤이딘은 어떤 부분을 지적해야 할까 잠시 갈등했다. 반지 주인의 뜻은 묻지도 않고, 마타치치에게 맡겨 버리기로 마음먹은 당돌함? 벌써부터 이 일이 끝난 후, 를 고민하는 태도? 아니면 야망에 차서 제일 높은 건물과 최고급 수레를 읊는 것? 무엇이든 간에 벨레다가 할 법한 일임은 분명했다.

<이것 참, 당신 뜻을 물어봐야겠군요. 벨레다가 저러는 건 익숙하지만…….>

"세상이 조용해진 다음에야 따질 문제긴 해도, 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누군가는 반지를 맡아야 할 테고, 난 한림원에 갈 테고, 당신도 한림원에 갈 테니까요. 게다가 클렘도 당신 제자를 좋아하는 것 같던걸요."

마타치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사소하고 경쾌한, 아무 뜻도 없는, 혹시 모를 어색함을 몰아내기 위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헤이딘은 그 소리가 이전과 이후의 시간 사이에 얇은 막을 놓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별채에서의 과거를, 나트람의 진의를, 메기도의 불행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거나 하는 감각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잊었고 앞으로도 되새길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삶만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했다. 헤이딘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됨으로써 불완전하면서도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택했으며 그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었다.

상처는 치유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바람직한 방식이 아닐지라도.

<좋아요, 당신은 내게 각인 도면을 줬고 당신의 조카는 내 형님을 죽였습니다. 덕분에 벨레다와 나는 자유가 됐어요. 그러니 이제는 정산서를 셈할 차례군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꼬마들끼리는 이미 이야기를 마친 모양이니까… 어른들끼리 협상해 보자구요. 설마 말 한 마디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죠?"

마타치치의 눈이 해맑게 반짝였다… 헤이딘은 씩 웃음 지었다.

<내 자유를 마땅한 주인에게 돌려주려 합니다. 받아 주신다면 감사하겠어요.>

그 말과 함께 유령 소년은 빠르게 자라나 청년과 중년 사이의 어느 형태로, 별채에 갇히기 직전의 순간으로 굳어졌다. 바닥으로 내려온 헤이딘이 춤을 청하는 신사처럼 허리를 수그려 인사하자 마타치치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의 울림에는 명랑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총장님을 끼고 다니다니 영광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   *

"첼."

거구의 여자가 남자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들은 긴 휴식을 취하다가 슈문과의 대담에 참여하기 위해 중앙 공동에 나왔고, 다른 학자들처럼 신의 음성을 경청했다. 아니, 사실 남자는 예외였다. 그는 원래부터 핏기가 없었던 얼굴을 머리카락만큼이나 창백하게 물들인 채 와들와들 떠느라 어떤 것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히… 히익……."

"참, 이럴 줄 알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데. 지금도 귀엽긴 하지만. 겁먹지 말고 생각을 잘 해 봐요. 내가 당신이랑 평생을 알고 지냈는데 이제 와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요?"

"미안해… 지금까지 그랬던 건……."

"미안하다니, 나는 당신이 미안해할 사람이 아니라 좋아했던 거라구요. 한 번만 더 사과했다가는 참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그렇게만 알아 둬요. 당신이 뭘 하건 내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도 기억하구요."

쿠벨릭은 힘주어 첼리비다케를 끌어안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첼리비다케의 곁을 지켰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야심에 불타는 남자를 사랑했다. 진심이 담긴 속삭임이 은발 위에서 부드럽게 울렸다.

"사랑해요, 첼."

*   *   *

란드와르는 중앙 공동에 남아 치매 걸린 유령 노인을 인생의 동반자로 맞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는 유령 마법사고, 어머니는 학자 겸 엔지니어고, 첫째 딸은 사업가고, 둘째 딸은 저격수다. 인기는 썩 없지만 코어 팬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는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세팅이다. 드라마거나. 아무튼…….

<이걸 남녀관계나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라는 틀 안에 가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사실 마타치치나 헤이딘이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고 둘의 성향을 생각하자면 일반적인 연애감정이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면모가 많죠.>

한국인이 드라마 각본 좀 쓰겠다는데 그러지 맙시다.

란드와르와 티아는 잠시 세계 각국의 드라마 문법에 대한 토의를 나눴다(그나저나 티아 씨, 지금 야스와다에 나무가 자라날 판인데 고위천사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래도 됩니까? / 안 그래도 곧 결과 나와요. 소식 들어오면 바로 연락드리죠.). 그러고 있자니 볼로디아가 잔뜩 취한 로안을 어깨에 이고 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에게 위스키 병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났다.

"무슨 일입니까?"

"별 문제는 아니오. 학자들이… 이곳 학자들처럼 행동해서, 그래서 심란했던 것 같소."

순간 로안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란드와르를 바라보았다.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고 혀도 상태가 엇비슷했다. 술주정을 부릴 일은 없을 거라더니. 그래도 용케 문장은 올바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학자들도 전장에 나서야 했죠. 뒤에서 환영 화면이나 만지작거리는 게 아니라요. 적이든 아군이든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 평화의 무게를 좋든 싫든 알게 됩니다. 백 명을 죽이고 천 명을 죽여도 전쟁은 안 끝나요. 제일 소중한 사람을 잃어도 전쟁은 안 끝나죠. 그렇게 얻어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그걸 잘 가꿀 의무도 있는 겁니다. 책임이랑 의무가요. 요즘 애들은 사람 죽는 꼴을 못 봐서 그걸 모른다니까요……."

순간적으로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상상이 란드와르의 뇌리를 스쳤다. 알세스트가, 천수를 다하고 죽은 대마법사가 말년에 어떤 식으로 자식들을 괴롭혔을지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볼로디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늑대인간 대장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일었다.

"미안하오, 연장자로서 챙겨야 했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소."

"이건… 연장자와 연소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재우는 게 좋겠군요."

자세한 설명을 들은 건 로안을 쪽문 너머의 숙소에 뉘이고 그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학자들이 단체로 항명에 나섰다고 했다.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으며 그것이 나르시소 공동체에 유익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고. 슈문은 책임을 이야기했고 학자들은 외압이 연구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다. 그렇게 긴 논의가 시작되었다…….

"오간 말들 중에서 일부를 빌려 보자면, 학술적 담론의 생산과 유통은 학자들의 소임인 동시에 의무요. 여기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 하지만 이 학자 공동체가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오. 나르시소에 고립된 채로 연구 결과물만을 넘겨 주거나, 아니면 말루카든 타일라프람이든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되거나. 대안은 다양하오. 다양한 만큼 각자의 의견이 있고."

"대장군님의 의견이 궁금한데요."

란드와르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자신만큼은 나르시소 학자들과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심술궂은 흥미가 서로 뒤엉켰다. 이러나저러나 볼로디아는 꽤나 고생할 게 분명했다.

"이건 결국 정치적인 사안이오. 우리네 입장에서 말해 보더라도, 요정 집단을 공식적으로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건 불온한 선언으로 읽힐 위험이 있소. 만신전의 지지를 얻더라도 시민들의 거리낌은 없애지 못하니. 한편으로는 나르시소를 고립된 상태로 남겨 두고 저작만을 넘겨받는다면, 그 결과물을 우리가 온전히 활용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소. 교류의 방법과 개방 정도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오. 재정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건 말루카의 국왕이 할 이야기군요. 한 명의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나르시소는 자본이나 권력의 논리 바깥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공동체지. 나는 이 고립된 지하도시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미덕이나 성취가 있을 거라고 믿소. 이 학자들이 우리네 세계에 적응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단언하고 싶지 않아."

일전에 던졌던 질문을 계속 곱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견직 노동자와 원주민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는 존경을 담아 촌평했다.

"여전히 생각이 깊으시군요."

"아니, 이건 딱히 깊은 생각은 아니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정말로 무거운 마음은, 내가 당장 책임지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들은 심장 아래에만 감춰져 있지. 솔직히 말해도 되겠소?"

"그럼요."

"가끔은 내가 독재자의 딸로, 작은 독재자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소―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시오. 나도 참으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천 년을 더 살면 서른일곱 해쯤은 사소해지겠지."

호쾌한 웃음이 이어졌지만 선이 굵은 눈매에는 일종의 살의가 감돌고 있었다. 학자들을 모아들인 다음 본보기로 한두 명을 처형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란드와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직전의 존경심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위기감이 자라났다. 비록 학자들이 짜증스러운 건 사실일지라도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고, 공개 총살은 과도한 처분…….

<무의식적으로는 그 안건에 찬성표를 던지고 계신다는 점을 알려드리죠. 자기객관화를 돕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뇨,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본론은 이게 아니고… 계산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열흘 남았습니다. 나무가 야스와다를 뒤덮기까지 열흘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란드와르는 강렬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이것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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