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고통이 있었다 (7)
메기도와의 만남을 참관한 후, 테네브로즈는 붙잡힌 신관들을 보러 갔다. 쪽문 너머의 격리 구역은 슈문의 안배에 따라 인원수만큼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감시관은 관리실에 앉은 채, 환영 화면을 바꾸어 가면서 수감자들의 방을 살피는 게 가능했다. 말을 거는 것 역시.
웅크려 앉은 블리스키미르는 무릎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부제사장 자리를 노리던 야심가치고는 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테네브로즈는 목을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차기 부제사장이 그래도 되나?"
"벤트레스!"
고개를 들어 올린 블리스키미르는 그렇게만 외치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멍하니 서 있던 테네브로즈는 문득 각실 벽면에 자신의 얼굴이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사촌형제와 착각하고 기절한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몸을 홱 돌려 벤트레스를 바라보았다. 간이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빛이 그 앞에서 놀이판 모양을 그렸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뭘 하다니,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저 녀석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이게 더 재미있더군. 지혜의 주인께서 직접 장난감을 마련해 주셨어. 4인까지 인원 추가가 가능한 데다가, 상대의 실력을 고를 수 있고, 57가지의 전통놀이가 포함된―"
순간 보랏빛 마력 줄기가 놀이판을 향해 쇄도해 갔다. 테네브로즈가 쏘아 보낸 것이었다. 벤트레스는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빛 덩어리를 껴안고 절규했다.
"대사희에 자일색이었는데! 3배 역만이었다고!"
"댁이 점수를 얼마나 땄든 내 알 바는 아니죠. 현실은 놀이판 바깥에 있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벤트레스는 블리스키미르만큼이나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다급히 마력 갈래를 회수했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착잡한 표정으로, 중년에 접어든 요정이 마법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행 상황이 저장된 걸 확인하고서야 벤트레스의 얼굴에 매끄러운 웃음이 돌아왔다.
"신의 은혜가 그런 잡스러운 주문에 무너질 리가 없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곧 끝나거든. 또 방해를 했다가는 따라다니면서 울어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그러고는 승부가 끝나자마자 종목이 변했다. 테네브로즈는 자신 앞에 나타난 차투랑가 놀이판과 환영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온 김에 이것 좀 같이 해 보자고. 난이도를 초급으로 해도 너무 낯설어서 말이야, 상대가 안 되더군."
"어차피 나랑 해도 안 될 텐데요. 세카두에서는 네 판을 내리 졌지 않습니까."
"보통 차투랑가랑은 약간 달라. 시간 차투랑가라는 거지. 내가 이 기물을 움직인다고 쳐 봐. 오른쪽 위로 한 칸을 갈 수도 있고, 그 반대 방향도 가능해. 그런데 여기에서 가능성의 분기를 만든다면……."
그리고 일어난 사건과 가능했던 사건들에 대한 긴 설명이 이어졌다. 요컨대 이 기물들은 하나의 놀이판에 얽매이는 대신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도망칠 수 있었다. 나르시소 학자들이라도 쉽게 이해하진 못할 규칙이었다.
"애들 놀이에 시간을 낭비할 마음은 없습니다. 난 이야기를 하러 온 거예요."
"시간 낭비라니, 고상한 지적 활동을 그런 식으로 폄하하면 되나?"
테네브로즈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벤트레스가 기다렸다는 투로 격리실의 모든 권한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렇게 대국이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한동안 놀이판과 기물들을 에둘러 가다가 서로 규칙을 논의할 필요가 없어진 뒤에야 저승에서의 일들에 가 닿았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뵈었습니다. 형님 이야기도 나왔고요. 미안하다는 말만 전해 달라던데요."
테네브로즈는 자신의 파다티를 지금 시간선에서, 한 칸 앞으로 옮기며 말했다. 해당 기물이 도달할 수 있는 과거 분기는 대부분 막혀 있었다. 그에 호응해 벤트레스의 라타가 움직였다.
"아자라스 삼촌께서도 참 야속하시지, 사과야 본가에 있을 때에도 충분히 들었는데 저승까지 가셔서는 그런 말이나 하다니. 나는 미안하다는 소리가 필요한 게 아니야.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날 대했는지가 궁금할 뿐이지."
"그걸 물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테네브로즈는 다른 기물들의 분기를 살피면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변호인 노릇을 해 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자라스를 단순히 좋은 아버지로만 기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한편으로는 미묘한 분노를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사촌형제를 향한 원한은 별개였다…….
"아우님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나도 형님한테 따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지난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묻어만 두려 해요."
"묻어 두고 싶다니. 날 보자마자 저승으로 보내려 했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살려뒀더니 이런 소리나 듣고 있는데 당연한 게 아닙니까. 형님만 아니었으면 나으리께 예전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어요. 게다가 나한테는 사과한 적이 없으면서 아버지만 괴롭히니 심보가 고약하다는 겁니다."
"사죄를 원해? 하면 받아 줄 셈이야?"
"그럴 리가요. 기대한 적도 없고 바라지도 않아요."
툭 내뱉은 테네브로즈는 라자 기물을 가능했던 세계로 옮겨 보냈다. 벤트레스는 곧바로 추격하는 대신 기존의 시간선에서 진영을 정비했다. 대답은 그보다 조금 늦게 왔다.
"나는 아우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청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안겨주듯이 하는 사과란 협박과 다름이 없거든. 내가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니 계속 나를 미워하면 돼."
"잘못인 줄은 아는군요. 자아성찰을 할 분별력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난 변명은 안 좋아해. 나는 아버지들을 건드릴 용기가 없으니 죄 없는 사촌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고, 아우님은 그래서 이 꼴이 난 것이지. 내가 그 영감들을 잊지 못했으니 아우님도 내 죄를 벗겨줄 마음이 없을 테고."
"그러면 끝나는 겁니까."
"나한테 되물을 일은 아니지."
테네브로즈는 놀이판에 오른손을 올려둔 채로 왼손을 품에 넣었다. 매끈한 유리병이 기다렸다는 듯 구부린 손가락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텅 빈 병은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그는 그것을 허공으로 휙 던졌다가 받아냈다.
"비슷한 주제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질문을 주문식이라도 대는 것처럼 외워 댔지요. 왜, 왜,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왜 그랬고 삼촌은 왜 그랬고 형님은 왜 그랬을까? 그걸 알아내기만 하면 내 삶이 한순간에 바뀔 것만 같았지요. 사실은 아무 소용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분노였어요. 누군가는 내 앞에 무릎 꿇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요. 아버지든, 삼촌이든, 형님이든 간에. 그런데 내가 그 손을 잡고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는 도무지 그렇다는 답을 내놓을 수가 없더군요. 내버려두고 떠난 다음 그 자세로 굳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지요. 그러지 못할 거라면 사과를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의 감정은 복수심과는 분명 달랐다. 만약 그들이 죄값을 치르다 죽었더라도 홀가분한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다 해서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며 마음의 짐 또한 여전할 것이므로. 짐이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는 덩어리진 허무만이 남을 것이다.
"희곡은, 그리고 소설은 명쾌합니다. 사냥꾼의 복수심은 연인의 원수를 죽일 때까지만 타오르고, 수십 해간의 착각이 만들어낸 슬픔은 포옹 속에서 행복으로 화하지요. 하지만 땅에서의 삶은 그 후로도 이어집니다. 사냥꾼은 쏟아부을 데 없는 증오로 괴로워할 것이며 착각에 갇혔던 사람들은 일그러진 기억을 다잡느라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아우님은 첫째 누님을 닮아서 그런가 낭만가적인 기질이 있군. 나라면 연인의 원수를 갚는 것까지도 명쾌함의 일부로 두었을 거야."
벤트레스가 반론했다. 테네브로즈는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는 대개 아무런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 사라지지요. 잔디밭 위에 찍힌 진흙 발자국이 점차로 옅어지던 끝에 툭 끊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남긴 발자국은 어때?"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흐려졌어요. 댁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옛 기억 때문이 아니라 헛소리를 들을 때마다 짜증이 치밀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내가 형님을 용서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유가 궁금한데."
"기억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사람도 용서하지 못하지요. 그 사람의 마음에서는 수많은 고통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대개는 기억을 되살려 사과를 받아내기보다는 그저 외면하기를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비로운 성자를 자처하지 않나?"
"예리하던 악몽이 견딜 수 있을 만큼 무뎌졌을 때, 그게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 독특한 장식품으로 변했을 때, 하지만 고통이 여전히 고통일 때에는 그런 마법이 일어납니다. 원망을 멈추고 싶은 이에게는 용서야말로 탈출구가 될 테니까요."
"원망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필요조차 없단 말이군."
벤트레스는 짧게 헛기침했다. 못마땅한 투인지, 혹은 수긍하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음색이었다.
"그래서, 아우님의 입장은 이런 건가? 해결이나 극복 따위는 순진한 착각이고, 모든 것은 다만 잊힌다고? 우리는 그 뒤에 남은 공허한 소리들을 사과와 용서로 착각할 뿐이라고?"
"이건 비관보다는 낙관일 겁니다. 결판을 내지 않더라도 고뇌로부터 도망칠 방도가 있으니까요. 사람의 기억은 세월에 마모되고 감정 또한 그렇지요. 만약 끝까지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더라도, 죽음은 평생을 씻습니다."
"좋아,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해. 일기장을 불태우고 눈을 감으면 일흔 해 전의 악몽쯤은 없던 것으로 믿을 수 있지.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라도 말이야. 그렇다면 죽은 부모로부터 산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어떨까? 아우님은 죽음이 기억의 궁전마저도 불태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는 다시 놀이판에 손을 올려놓았고, 기물을 움직이기에 앞서 다른 시간선의 움직임들을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나지막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걷고 뛰기 위해 자신이 선 땅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제국의 유산 위에 살아 있지만 그 명세는 망실된 지 오래지요. 인간들은 지고하신 분의 존재도, 수정 심장이 깨진 일도, 청지기께서 그 직분을 받아든 사연도, 슈문이 배반을 택한 까닭도, 황제가 윰 시밀의 심장을 찌른 이유도 알지 못합니다. 그 역사가 바로 대전쟁의 역사임에도 그렇습니다―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잊힐 것입니다."
테네브로즈의 기물이 세 번째 과거로 이동했지만 벤트레스의 손길은 여전히 기존 시간선에 머물러 있었다. 장고 끝에 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할지는 우리의 몫이지. 그런 노력이 천 년 뒤에 곧바로 가 닿지는 못하겠지만 백 년 뒤는 결정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시간을 쌓아 나가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먼 미래가 와 있을 테고."
"그렇지요, 그래서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잠든 분도, 인간들의 무신도 진심으로 섬기지 않아. 대신 내가 보는 것만을 믿지. 그걸 세계의 뜻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아우님만큼이나 충성스럽게 늑대를 섬기는 사람일 거야. 아우님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벤트레스는 테네브로즈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알아보았고, 슬쩍 미소 지었다.
"가끔은 환각 속에서 이런 세상을 마주치곤 해. 언어에서부터 의복까지 어떤 것도 지금과 같지 않고, 요정과 인간과 늑대인간으로는 구분하지 못할 종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미래지. 내 질문은 결국 이거야. 지금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떤 선택이 우리를 저 시대로 데려갈 수 있을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모든 것이 잊혔겠지요. 제국도, 대전쟁도, 아즈리온의 무용담도. 붉은 머리의 왕녀와 그 자매도. 금발의 쌍둥이도. 귀를 자르는 반요정과 카스바에 숨어 지내는 도망자들도."
"그건 결과지 과정이 아니야."
그제야 벤트레스는 자신의 기물을 다른 세계로 옮겼다. 몇십 수가 빠르게 오가며 그의 군세가 테네브로즈의 라자를 추격해 갔다… 그리고 라자 기물이 기존 시간선으로 돌아왔다. 이제 대국은 결말을 앞두고 있었다.
"아우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나?"
"아뇨."
"그러면 이야기해 주지. 한 사람의 비극은 그 자신이 잊으면 그만이지만 많은 사람의 비극은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 않아. 모두가 죽지만 누구도 죽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는 망자들의 어깨 위에 서 있고, 우리의 어깨 위에는 다시 자손들이 서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증인이 필요하다고 믿어―수천 년 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지금 당분간은."
"어째서요?"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째서요?"
테네브로즈는 다시 물었다. 벤트레스도 다시 답했다.
"완전히 잊기 위해서."
그리고 벤트레스의 파다티가 테네브로즈의 라자를 삼켰다. 놀이판은 곧바로 벤트레스를 향해 축포를 쏘아 올렸고, 허망하게 일렁이다가, 가장 처음의 모습으로 재정렬되었다. 아무 상처도 없는 군대가 그곳에 있었다. 놀이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네브로즈는 고개를 들어 사촌형제와 시선을 맞췄다.
"많은 사람의 기억과 한 사람의 기억은 다르다고 했지요."
"설마 그걸 부정할 셈이야?"
"모든 게 결국엔 한 분의 꿈이라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그분이 깨어나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뒤바뀔 꿈 말입니다."
벤트레스의 보랏빛 눈이 꿰뚫을 듯한 빛을 발했다. 그는 오래도록 테네브로즈를 노려보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아우님은 확실히 저승의 사람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