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고통이 있었다 (6)
테네브로즈가 저승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이강현이 안정을 찾고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지혜의 고리로 변했을지라도 주위에서 오가는 소리는 모두 듣고 있었다고 했다. 설명할 필요가 줄었으니 잘 된 셈이었다. 그 무렵 헤이딘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엔 참여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겠다는 게 유령의 입장이었다.
"요정아, 내가 나트람 이야기 했잖아. 걔가 범인일 거라고. 난 감이 좋은 사람이야."
"아주 잘 하셨습니다."
"말이 띠껍다?"
"나으리께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판단에 과도하게 개입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니가 지금 말을 띠껍게 하고 있잖아."
란드와르는 혀끝을 잘근거리며 짜증을 억눌렀다. 자신이 이 요정을 막 대하기야 했지만, 그리고 놈이 욕을 부르는 것도 불변의 사실이었지만, 몸이 관통당해서 죽은 녀석을 너무 심하게 갈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한다."
"예."
"나는 나트람이 아니야."
이번에는 테네브로즈도 순순히 인정했다. 가끔 이상한 낌새를 보이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3교구 사람들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리라고. 란드와르는 그 주장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블리스키미르도 그 이야기 하더라."
"남색 머리 말입니까? 그 녀석도 여기 있습니까?"
"침입자 중에 안 죽은 애들은 살려 뒀어. 꽤 많아."
그리고 대화 주제가 야스와다로 넘어갔다. 슈문의 별이 커진 걸 제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도시를 뒤덮은 거목도, 깨어난 이시 타브도 아직은 없었다. 다만 딤 나겔이 시기 좋게 졸도했다는 점이 신경을 긁었다. 평민 거주구에 들렀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도 뇌혈관이 터질 나이지, 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했다.
"딸이 죽고 나서 나트람이랑 만났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있냐."
"기억이 안 나는데요."
"기억이 안 나?"
"만나고 와서는 제 오두막으로 와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더군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주… 낙담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목에는 손자국이 있었고요."
술을 억지로 마신 탓에 자세한 사정을 잊고 말았다고 했다. 들쑤셔 보았자 좋은 꼴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깨어난 후로도 물은 적은 없다고. 란드와르는 그 결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이라 해도 그런 작자를 상대로 추리극을 벌이진 못할 터였다.
"청지기님한테는 물어 봤어?"
"그때 저를 안 보고 계셨다는데요. 그분도 평소엔 바쁘십니다."
란드와르는 세상사의 절묘함을 느꼈다. CCTV는 필요한 부분만 지워져 있고, 모니터링 인력은 사건이 터질 때만 자리를 비운다. 이스트리아에서도 그 법칙은 공통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혐의를 둘 정황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딤 나겔이 그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늙었고, 나트람은 이상하리만치 긴 잠을 잤다는 것. 그리고 둘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
"그 시기에, 나트람은 무기력증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성격이 사나워졌지요. 사나워졌다―적절한 설명일지 모르겠습니다. 사냥감을 향해 내달리는 야생 칼린카처럼 변했다고 해야겠군요. 반면 딤 나겔은… 말수가 없고 우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트람이야 그렇다 쳐도 딤 나겔에게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지요. 반려를 일찍 떠나보내고서는 딸마저 잃은 사람이 평소처럼 쾌활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니까요."
"그러면 하나만 더 묻자. 네가 직접 사르코를 죽인 게 아니라고 했잖아. 범인은 남편이고, 너는 그냥 뒤따라가서 남편까지 처리한 거라면서. 나트람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가 정확히 뭐야."
다행히도 테네브로즈는 사르코의 반려가 별불꽃 장원에 찾아온 날만큼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나트람이 한 말까지도. 징벌이 필요하다는 중얼거림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는 진작부터 자신의 문제를 알았을 것이고, 결국엔 징벌을 바라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형인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딤 나겔이어야만 했다… 왜?
란드와르는 자신이 나트람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평생토록 어두운 충동에 시달렸고, 타인과 어울리는 법을 몰랐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요정 사회에 스스로를 맞추어 온 사람이라고. 최선을 다해서 몰락한 사람이라고. 그런 부류에게 딤 나겔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트람이 딤 나겔의 칼린카를 죽인 적이 있다고 했지. 질투심으로."
"예,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너도 생각이 변했겠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일종의 시위였겠지. 요청이거나. 그리고 실패했어. 그때 딤 나겔에게 용서를 받은 건 나트람에게는 완전한 실패였던 거야."
"그렇다면 사르코의 죽음은 두 번째 실패였을까요?"
"나트람한테는 그렇겠지. 하지만 딸이 죽었을 때에는 단순한 용서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거야. 딤 나겔은 나트람을 죽이는 대신 다른 처벌을 내렸어. 아마도 어떤 주문이나 서약 같은 걸―"
이후의 삶이 그 자체로 형벌이었다는 점은 테네브로즈도 쉽게 인정했다. 나트람이 어떤 성취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 괴로워했으리라는 것까지도. 하지만 그날 밤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추정할 수 없었고, 논의는 노인의 삶 언저리를 맴돌다가 끝났다.
그때까지도 반지는 란드와르의 손에 남은 채였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마타치치에게 반지를 넘겨줄까 물어 보았지만 헤이딘 스스로가 남기를 택한 것이다. 그는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오가는 말들을 주의깊이 경청하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허공을 올려다보고는 요정 소년과 시선을 맞췄다.
"그렇다는군요."
헤이딘은 신중하면서도 침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대답이라기보다는 두꺼운 책의 맺음말 같은 것이 란드와르의 뇌리에 울렸다.
<형님이 내가 알거나 상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알겠소. 십육면체를 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를 파고든 이유도 짐작하긴 어렵지만, 거기에는 그 사람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 거요. 한편으로는 딤 나겔이 진작 형님을 죽였더라면 어땠을까 묻고 싶기도 하오…….>
그 지점에서 목소리가 잘라내듯 멎었다. 유령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묻지 않겠소. 그 사람도 이런 결말은 생각지 못했을 거요. 만약 생각했더라도,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소. 형님도 마찬가지야. 내게는 좋은 제자가 있고 뜻이 맞는 동료도 생겼소. 그러니 나는 미워하기보다는 평온하게 살아가기를 택하려 하오.>
"용서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요. 내게는 형님의 속내를 이해할 의무가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다만 분노를 간직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해로운 일일 뿐이오. 그 자가 내 평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두고 싶지 않소…….>
흐려지는 말끝 뒤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이 지나 헤이딘이 다시 뜻을 전해 왔다.
<시간이 될 때 조카를 만나게 해 주시오. 나눌 이야기가 있소.>
란드와르는 그제야 솔로틀에게서 받은 유리병을 떠올려냈다.
* * *
중앙 동공으로 나섰을 때 슈문은 학자들과의 대면을 마친 상태였다. 사정을 들은 지혜의 신은 우선 헤이딘을 치하한 후 비어 있는 쪽문과 영토를 이어 주었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 오염지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헤이딘의 몸이 다시 실체를 갖췄다.
테네브로즈는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 란드와르에게 건넸다. 작고 흐린 불꽃이 꺼져가는 숨결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 녹색 덩어리에 담긴 시간을 몰랐다. 헤이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란드와르는 평생토록 이해받지 못한 고통을 위해 묵념했고, 유리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뚜껑을 열었다. 초록색 안개가 퍼져 나오면서 청록색 머리카락의 소년으로 변했다. 로야페타에서의 기억과는 달리 단호하면서도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그 삼촌과 비슷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손바닥을 펼쳤다가 다시 쥐어 보이는 소년의 모습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을 연상시켰다. 바닥으로 내려간 헤이딘이 그 앞에 섰다. 둘의 시선이 오래도록 허공에서 어긋나던 끝에 헤이딘이 먼저 다가갔다.
"얘야, 미안하다. 성년식을 치르지도 않은 아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해야 했어. 내 형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테네브로즈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도 영영 몰랐을 게다."
메기도는 헤이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천 번은 곱씹었을 게 분명한 문장들이 허공 속에 빈자리가 없는 듯 들려왔다가 곧바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녜요, 그 말을 할 사람은 삼촌이 아니라 저예요. 지금까지는 제가 잘못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어요. 아마 인간 도시에서 삼촌을 다시 만났을 때에야 겨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폐허에서, 빛 속을 걸으면서, 줄곧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삼촌이 미워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은빛매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삼촌이 왜 그랬는지 이해해요. 저한테 돌아가라고 한 이유를 이제는 알아요. 삼촌이 겪은 일도요. 아버지의 서재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 더 있어요. 동생이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만! 잊힌 것을 끌고 오지 말거라. 내가 원한다면 그래야겠지만, 네 사죄가 필요하다면 물론 그래야겠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안식뿐이야.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므로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내 삶에서 너는 없었던 것이고 네 삶에서도 내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평생이 줄곧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목소리는 점차로 가늘고 느려졌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메기도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얘야, 쉬어라. 아무 일도 없었으니 그저 쉬어라……."
그리고 방향 없는 속삭임이 불어나 정적을 메웠다. 울먹이는 소년의 형상이 헤이딘의 품 안에서 흐려지다가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