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15화 (216/258)

215화 고통이 있었다 (5)

벨레다는 눈을 떴다. 일견 엉망진창이지만 제 나름의 규칙에 맞추어 정리된 잡동사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타치치의 방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사실이 얼핏 떠올랐다. 벽 한구석에, 일렬로 늘어선 손대포와 총들을 보건대 그 추측이 맞는 듯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애써 던진 질문은 푹신한 이불에 잡아먹혔다. 벨레다는 이불깃을 껴안듯 자세를 바꾸고는 조금 뒤척였다. 아주 긴 잠을 잔 것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정신과 함께 기억이 돌아온 건 시간이 한참은 더 흐른 뒤였다.

이상한 곳을 헤매다가 나트람을 만났고, 죽을 뻔했다. 정말로 죽었나? 벨레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침대가 출렁이더니 바로 옆에서 주황색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클렘퍼러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클렘도 부스스 일어났다. 땋지 않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남색 잠옷과 잘 어울렸다. 요정 꼬마는 벨레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먹쥔 손으로 눈을 부볐다.

"내가 잡았어."

"잡았어? 뭘?"

"길만 열면 너 안 죽인다고 했어. 그래서 열어준 다음 따라갔는데 가만히 서 있길래 쐈어. 그래서 죽었어."

벨레다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정말로? 그 늙은이가 이런 식으로 죽었다고? 그러면 나트람은 도대체 뭘 하려고 벽 너머에 간 거야?

대답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길고 지난했다… 조금만 덜 피곤했더라면 소통을 포기하고 다른 일행을 찾아 나섰을지도 몰랐다. 결국엔 누운 채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만.

"그러니까, 내 스승님이랑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지?"

"응. 무슨 이야기 했는지는 몰라. 그냥 왠지 이번에는 안 막힐 거 같아서 쏜 거야. 그래서 이모랑 키 큰 인간이 칭찬해 줬어."

"스승님은 괜찮으셔?"

"괜찮대. 근데 생각 좀 하겠다면서 반지에 들어갔대."

통로에서 들었던 말들이 뒤늦게 머리를 강타했다. 만약 똑같은 소리를 헤이딘 앞에서 했다면… 그 늙은이는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이번에도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알 마음도 없었다. 이상한 사람은 카스바에 넘칠 만큼 많았고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반응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참거나, 죽이거나.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죽을 놈이 죽은 것이다.

물론 역사서를 쓰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따져 물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제사장이었던 요정이 화신의 동료를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이는 상황에는 그 자체로 연구 가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역사학자나 신학자의 몫이었지 각인 기술자의 역할이 아니었다.

"화난 거 아니지?"

다시 졸음이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잠에 들려는 순간 온기가 몸을 짓눌렀다. 벨레다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왜 화가 나. 졸려서 그래."

"안 시킨 거 했는데 괜찮아?"

"잘 됐잖아. 잘 됐으면 됐어."

"그러면 나도 데려가 줄 거야?"

벨레다는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조금 눈치가 없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 세상의 상식을 가르치려면 갈 길이 태산이겠지만, 아무렴 괜찮을 거라고. 세상을 구하고 자신을 구한 값으로는 더한 것도 해줄 수 있다고…….

"응."

온기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벨레다는 몸을 뒤집어 클렘을 마주 끌어안았다.

*   *   *

볼로디아와 로안은 대담을 참관하기 위해 중앙 동공으로 나왔다. 탁자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원한다면 인파 사이로 끼어 들어가 말을 얹을 수도 있었지만 둘은 일단 경청하기로 했다.

그때 슈문은 각자의 연구물을 받아 검토하면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뜻밖의 호평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요정이 있는가 하면 구석에 가서 웅크리는 요정도 있었다… 그렇게 학자들을 일일이 살핀 뒤, 슈문은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가 지난 시간 동안 해온 것들을 모두 보았고, 미흡한 점과 개선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이 지식 공동체의 지향점과 외부 교류에 대한 것으로 논제를 옮기도록 하겠다―내 결론은 이것이다. 너희가 바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슈문은 볼로디아나 로안만큼이나 교류에 긍정적이었다. 쿠벨릭과 마타치치와 첼리비다케 외에, 다른 학자들도 인간 세상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종족간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요정들을 대뜸 도시 한복판에 들여놓긴 어렵겠지만 어딘가에는 적절한 장소가 있으리라고 했다… 그리고 학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볼로디아는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대장군님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괜찮네. 음주를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물만 조금 따라 주게."

그녀는 투명한 얼음잔 너머로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얼음잔을, 다른 손에는 위스키 병을 들고 있었다. 시선을 눈치 챘는지 설명이 따라붙었다.

"저도 취한 느낌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죠. 대장군님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로안은 헛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위스키를 한 입에 부어넣은 다음, 노망난 아흔 살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엉망이군요. 완전히 엉망이에요.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제가 죽기 십 년쯤 전에도 청년들을 보면서 똑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소위 말해서 전후 세대라는 거죠. 제가 용감한 편은 아니고, 오히려 비겁자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목숨을 내거는 게 어떤 일인지는 알고 있단 말입니다. 목숨을 내걸어 본 사람은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돼요. 누구든 간에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충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꼭 전쟁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심경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겉껍질 안에 들어 있는 게 대전쟁을 직접 겪은 노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온 노인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볼로디아는 원래의 로안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기억했다. 겁이 많긴 해도 선하고 쾌활한 소년이었다. 영원히 그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을 터였다. 열일곱 해의 삶은 죽은 것이다. 로안이 지금에 만족할지라도. 마법적 능력이나 판단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날지라도…….

그녀는 따질 길 없는 비감을 억누르며 요정 무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귀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머리통들이 거대한 고리를 이뤘고, 한가운데의 빈 공간에는 황금색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학자 대표가 그 앞으로 나아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계속 이곳에 있고자 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구체 위에 걸터앉은 소년이 미간을 좁혔다. 얼굴에는 경멸하는 듯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게 필멸자를 내려다보는 신의 태도인지, 아니면 그냥 학자들을 경멸하고 있는 것뿐인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은 전자라고 추정하고 싶었지만 후자일지라도 놀랍진 않을 듯했다.

[학문이란 주어진 세계와 가능한 세계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법이며, 그 자체로 발전해가는 하나의 세계이다. 세계는 부단한 논의와 교류 속에 성장하며 변화한다―내가 궁전을 마련하고 말해진 것과 말해질 것들을 모아들인 것은 그것을 위함이다. 너희가 이곳에 갇힌 채 살아간다면 어떤 성취도 무의미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 성취가 훌륭하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너희는 다른 이들이 사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너희의 수는 더욱 많아져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너희는 이 세상에 보탬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슈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냉랭해졌고 로안은 한 잔을 더 들이켰다. 학자 대표만이 결연한 태도로 목을 세우고 있었다.

[감정은 그 자체로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바깥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신용의 흐름이며 정신적 활동 또한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희는 그러한 양태, 즉 거대자본이나 국가에 부역하는 종류의 지적 활동을 거부하고자 할 뿐이며, 이러한 의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는 수사학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하거라.]

학자 대표는 요정들끼리 논의할 시간을 청했고 슈문은 승낙했다. 로안이 위스키를 반 병쯤 비울 무렵 젊은 여자가 원 한가운데로 나와 지혜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학자 대표였다. 타당하지만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문장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근로란 용역을 대가로 재화를 지급받는 행위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지식근로자의 지위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는 사용자(使用者)와 피용자(被傭者) 사이의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앞서와 같은 위계가 자유로운 학술 활동과 그 내용의 개진에 위해가 될 염려가 크다는 점입니다. 만약 저희가 거대자본과 국가 권력에 종속된다면 연구 과제의 선정에서부터 현상을 해석하는 관점까지 외부적인 개입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는 학문적 성취라는 면에서, 거대자본의 지지가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희는 공간 연구와 같은 노력이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이거나 물질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없음을 압니다. 저희가 자본에 종속될 경우 이러한 학문 분과의 우선순위는 뒤로 밀려날 것이며―"

순간 중부 장교로 임관하던 시기의 경험이 볼로디아를 덮쳤다. 사상가를 다루던 기억이었다. 그녀는 이 거부감이 어떻게 구성된 것일지, 독재자의 딸이자 현직 독재자라는 이력은 거기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 가늠하다가 로안에게로 팔을 내뻗었다. 취할 마음은 여전히 없었지만 지금은 술이 필요했다.

"한 잔 따라 보게. 아주 약간만 따르고 나머지는 물을 섞어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로안의 얼굴은 벌써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볼로디아는 잔을 입가에 대고서는 눈을 감은 채 씁쓰름한 향을 느꼈다. 잔의 옆면은 살갗의 열기에 조금 녹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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