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고통이 있었다 (4)
"천천히, 모두가 늙어 죽게 만들겠다는 말씀이시지요.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요."
"혼란은 교단의 힘으로 수습이 가능할 거요. 이게 멸망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이라고 알려 주면 되오. 누구도 탄생하지 않는 순간을 경건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두가 각자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끝날 문제요."
나우파나에서 돌아온 직후에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늑대의 이름을 찾는 데에 실패하면, 그래서 솔로틀이 더는 넋을 닦아 보내지 않게 된다면 조용한 파멸이 있으리라고. 그 파멸은 이제 구원으로 향하는 길이 되어 있었다.
세 가지의 미래가 있었다. 지금의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것, 기억을 내버리고 꿈을 다시 쌓는 것, 그리고 모든 걸 끝내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것. 이강현은 그중에서 무엇이 구원인지, 구원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알고 배우고 믿어온 것들이 흔들리며 무로 화하는 감각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것들은 요란한 뿔나팔 소리도 땅이 갈라지는 충격도 없이 그저 해체되었다.
그는 윤곽으로만 남은 준칙 몇 개를 긁어모아 말했다.
"하지만 그런 사안을 우리끼리 결정하고 통보하는 것은… 그건 옳지 못합니다. 이스트리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표결―"
그 지점에서 이강현의 목소리가 정지했다. 그는 잠시간 멈춰 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결을 붙여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학교가 새로 지어질 자리는 다수결로 정할 수 있겠지만 이건 아닙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표결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신은 삶을 연속되는 기억과 넋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정의했소. 이 경우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의 미래는 그 사람의 미래가 아니오. 그리고 세계의 과거나 미래는 한 명의 것조차 아니지."
"하지만 평생을 지낸 땅이, 자신을 낳은 역사가 무로 돌아가는 걸 기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예, 순전한 기분만으로 타당성을 논할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압니다. 이야기가 다시 결정권으로 되돌아가는군요.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장군님께서는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초월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찬가지로 폭력이겠지. 우리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폭력이고, 해체와 야만 또한 폭력인 것처럼, 완전한 재구성 역시 마찬가지일 거요. 어쩌면 앞선 것들 이상으로. 이건 결국 왕이 명령을 하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지."
"그게 과연 정당화가 되겠습니까?"
볼로디아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그렸고, 마지막 패를 내보이게 된 도박사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왕이 될 사람으로 태어났고, 왕이 될 사람으로 자랐으며, 그래서 왕이 되었소. 내가 사회의 만듦새를 고민하는 이유는 도덕과 규범의 잣대를 닦아 나가는 작업이 고통의 총량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나 자신이 선량한 사람인 까닭은 아니오."
"제가 지금까지 대장군님을… 잘못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실용주의자셨군요."
"나는 당신도 나와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나야말로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군. 일전에 합의를 보지 않았소? 모두를 위해 당연히 하나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것은 게으른 악덕이지만, 누구도 손해를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은 감상주의라고?"
"그래요, 그렇지요. 분명히 그런 말씀을 하셨고, 저도 동의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나 앞으로 할 일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한 것은…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수를 셈할 수는 없겠지만……."
"내 도의는 폭력을 외면하거나 윤색하지 않고 직시하는 데에 있소. 오직 그것뿐이오. 나는 말루카의 체제가 흰둥이들에게 고통이었음을 알고 그 과거를 반성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켜낸 삶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소. 이것도 마찬가지요. 세계를 다시 시작하는 건 내게도, 한 명의 늑대인간에게도 끔찍한 일이오. 하지만 이 땅을 지속하는 건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끔찍한 일일 거요. 느린 개선 끝에 궁극적인 평화가 다가오든, 총체적으로 실패하든 말이오―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폭력 중에서만 선택할 수 있소."
법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강제입원을 용인했다. 유불리를 온전히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의 자기결정권은 덜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사회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그 사람 자신을 위한 일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 혜택을 입었다. 교화를 완강히 거부하던 사람이 그 과거를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폭력일지라도, 당사자를 믿고 내버려두는 태도 역시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다. 혹은 기나긴 고통을 낳는다. 다시 질문. 한 세계의 존속에 이런 비유를 가져오는 게 적절할까? 지금의 이스트리아는 어디쯤에 있지? 가벼운 우울증과 중증도의 망상장애는 완전히 다른 병이었고, 인지의 왜곡에도 수많은 결이 있었다.
낱말들이 한동안 공회전했다. 이곳이 지구라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학살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세계라면, 확연히 구분되는 초월자들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함께 통치하는 세계라면 이런 논의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이스트리아였으며 머나먼 환상만이 진실이었다.
거대한 소꿉놀이를 위해 생겨난 땅… 낡고 망가진 연극 무대…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관리자들… 사람들은 주어진 배역이 진짜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만 각각의 기쁨과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만약 꿈이 새로 지어진다면 그 땅의 사람들은 옛 시대를 끔찍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울 만큼 긴 묵상 끝에 토로했다.
"세상을 다시 만들면 안 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살던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만들어졌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창조주와 대면하고 무언가를 요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초월자들도요. 오직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문실 속에서 태어났고, 여전히 고문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걸 안락한 휴게실로 바꿔 놓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과 함께요. 혹은 이 고문실이 이미 휴게실이 되었다는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모릅니다."
한 문장마다 이강현은 서른다섯 해의 삶을 복기했다. 그러지 않으려 애썼지만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자학으로 흘렀다. 교통사고가 난 것 말고는 딱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인생이었다. 동업자나 후배 욕을 하기에는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실패자라는 잘못이. 그러니까 자신은 실패자라서 빚을 씻으려면 네 해는 족히 걸리는 형벌에, 그 후로도 편히 살지는 못하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민혁아, 내 좋은 친구야, 나도 안다. 이 고통은 본질적인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그걸 개인의 문제로, 노력이나 품성의 부족으로 귀속시키려는 사고방식이 노예의 굴레임을 안다. 이 비참함은 신자유주의가 패배자를 벌하고 도전자를 채찍질하는 도구임을 안다. 내게도 그런 소리를 이해하고 믿고 말할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떠들어 봤자 인생 망한 놈이 헛소리 한다는 핀잔이나 들을 텐데? 죽은 철학자들도, 죽은 운동가들도 내 빚을 갚아 주진 않는데? 살아 있는 운동가라고 해서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바깥에 나가 보아라, 누가 그런 말들을 알고 들어 주느냐, 오직 돈뿐이지 않으냐…….
그 말들은 돈 바깥에서는 그냥 죽어 있었다. 그리고 이강현도 고시원에서 죽어 있었다. 엄청난 불행은 아니다. 십칠만 원짜리 고시원에는 가끔 유령이 살았으며 그들은 대한민국의 모범적인 국민이었다. 이강현 역시.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은 없었고 목은 건조하기만 했다. 그는 억양이 없고 강세도 없는 목소리로 그저 중얼거렸다.
"뭐가 됐건 좋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세계에게 요구할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땅에는 큰 축복이 주어진 겁니다. 전 그렇게밖에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볼로디아의 검은 눈이 그의 앞에서 멈췄다. 심장이 몇 번쯤 뛰었는지 모를 침묵이 지나더니 소리가 들렸다.
"당신에게 물어볼 게 아니었군. 미안하오."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과민반응을 한 겁니다. 개인적인 문제요. 제가 죄송합니다."
볼로디아는 눈빛으로만 대답했고 이강현은 탁자에 시선을 박았다. 단어는 모두 휘발되었지만 무언가는 남았다. 무겁고 끈적끈적하고 차가운, 말해지기 이전에 존재하는 무엇. 그는 한동안 굳어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분이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누가 들어오든 간에 이제부터는 계약직 신 노릇을 해야 했다. 서른다섯 살의 실패자가 아니라.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심장제세동기라도 되는 것처럼 시가 목함을 붙잡았다. 그러고서야 얼굴에 겨우 표정이 돌아왔다. 거울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돌아왔을 것이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돌려 문간을 보았다. 금발의 소년이 새로운 소식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슈문이 말루카와 타일라프람의 책임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학자들을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보내려 하는데, 둘도 와서 논의를 참관하는 게 좋으리라고. 적응하려면 도시 당국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볼로디아는 선뜻 수긍했다. 로안은 씩 웃고는 란드와르에게 부탁했다.
"참,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위스키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필요할 것 같거든요."
"아직 성인 아니잖아."
"제가 손자 놈들 성년식 치르는 것까지도 보고 죽은 사람입니다. 술 마시는 법은 충분히 알죠. 어린애처럼 주정을 부리진 않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휴게실에는 세카두에서 가져온 위스키가 한 병 있었다. 로안에게 술병을 건네고서는 볼로디아와 시선을 맞췄다. 자리에서 막 일어서고 있었다.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러 가시는군요."
란드와르는 일부러 건설적인, 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새로운 꿈을 짓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낡은 꿈을 가꾸려는 노력도 무용할 것이므로. 볼로디아는 그 의중을 알아채고는 빙긋 웃었다.
"나는 말루카의 통치자고, 지금의 땅이 계속되는 동안은 도시의 사람들을 돌볼 의무가 있소. 이제는 혼약자까지 있지. 그러니 무엇이 가장 좋은 방식이든 간에,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모든 방향을 살피며 고민할 거요. 그 책임은 내가 던진 논제들과 맥락이 같지만 완전히 별개기도 하오."
"그렇습니까."
"물론 아무 고민 없이 세계를 뒤엎으면 참 편할 거요. 그건 옳아. 하지만 포기할 방법이 생겼다고 당장 모든 걸 놓아 버리는 건 어른의 자세가 아니지―어머니께서는 왕의 자세라는 말을 쓰셨지만.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부터 누차 들은 이야기라오."
호탕한 웃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대전쟁의 영웅과 늑대 왕이, 고통을 딛고 자라난 세계조차도 사랑할 수 있을 사람들이,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중앙 공동으로 떠났다. 이제 휴게실에는 한 명이 남았다. 란드와르가 아닌 이강현이.
그는 스스로가 21세기를 사랑할 수 있을지, 혹은 서른다섯 해의 삶이라도 아낄 수 있을지 물어 보았다. 물론 지금의 이스트리아는 사랑할 수 있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요정까지도. 하지만 지구는…….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서 21세기의 한국을 만날 것이다. 거래소 시세에 따라 유의미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는, 30억 상당의 보수와 함께. 티아가 말하길 암호화폐라는 게 있다고 했다. 현금 더미에 짓눌리기보다는 그게 더 나으리라고. 이강현 명의로는 계좌 압류가 걸려 있을 테니까. 판타지 세상에서, 고위천사에게, 테크 소식을 전해 듣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도 비트코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12년에. 그때 샀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지나간 일이다. 시간이 흘렀고 좋을 것도 없는 숫자들만 속절없이 쌓였다. 2015년, 부모님의 결혼 35주년. A저축은행의 은행최고금리는 23.90%. 마지막으로 빌렸던 돈의 이율은 거기에서 2%P가 모자란 21.90%. 2016년, 개인회생이 끝나기까지 남은 기간은 3년하고도 몇 달 더. 이것까지도 지난 일이다. 그렇게 2017년.
타레크 엘아이사미가 베네수엘라의 부통령이 된 일자는 2017년 1월 4일. 지금은 2017년의 어느 날. 자신은 조만간 날뛰는 숫자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강현에게 남은 숫자를, 구체적이고 명료한 것들을 정산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시가를 입에 물었다. 끄트머리에 불티가 옮겨 붙는 찰나 여기가 방 안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혀끝에 눌러 불을 껐다. 그리고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듯 돌돌 말린 담배잎을 벗겨 보았다. 떼어낸 잎 조각이 손가락 한 마디 높이의 언덕을 이뤘다. 강현은 그걸 손에 담은 다음 한입에 털어 넣었다.
쓰디쓴 기운 사이에 재의 맛이 섞여 났고 테네브로즈는 아직 죽음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헤이딘도. 목 바로 밑에서 낱말들이 울컥거렸지만 건넬 상대가 없었다. 됐다. 죽음을 더 곱씹어서는 안 된다. 그는 생각을 멈춘 다음 잎사귀도 목구멍 너머로 삼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