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고통이 있었다 (2)
란드와르는 따로 마련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고, 오염지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나트람이 한 말들과, 그의 심중에 대한 추측과, 추측을 도울 만한 삽화(揷話)를 굽이굽이 엮으며 길게 이어졌다. 결론에 이를 때까지도 헤이딘은 반지 안에만 머물러 있었고 테네브로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일입니다."
"흥미롭군."
볼로디아는 그렇게만 말하고서는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란드와르는 그녀가 묵상을 마치고 운을 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우리네 요정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소. 그러니까, 벤트레스 말이오. 제국 시절에는 인간들의 품성이 일종의 광증으로 여겨졌다고 하오. 모르는 사람의 불행을 보고 함께 마음 아파할 수 있는 특성이 그들에게는 예민함이나 기이한 분노로 간주되었던 거요―그리고 우리는 그걸 도덕이라고 부르지. 이 주제는 나우파나에서 돌아왔을 때, 당신과도 먼저 논의했으니 길게 설명하진 않겠소."
"나트람을 함부로 미쳤다고 할 수는 없단 말씀이십니까?"
볼로디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소. 도덕이나 광증 따위의 정의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무엇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게 여전히 내 입장이오. 통치와 권력의 문제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규범은 다시, 우리 내면에 없었던 기질을 새로이 만들어내기도 할 거요."
"이건 저번에 한 이야기군요."
"그렇지.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어 이전에, 말해지지 않은 무엇이 있소. 지금 이 대화에서는 인간의 본성, 혹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란드와르는 말해지지 않은 무엇, 이라는 어구를 곱씹어 보았다. 해석이나 규명의 대상이 되지 않은, 원초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순간 대상은 체계에 갇히고 만다. 사람의 본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개념에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 본성의 명세를 밝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교육과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따지는 작업에서는 사회적 구성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만, 어쨌건,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그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할 수는 있을 거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까지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주장을 하고 싶진 않소―본론으로 들어가지. 사람에게는 타인과 긍정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고, 나는 이걸 본성 중 하나라 부르려 하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이유로 요정과 인류의 공존이 가능할 것이라 추정하오……."
볼로디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부연했다. 그 습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름 붙이고 분류하는 순간 자신은 앞서 말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 맞다고. 요정과 인간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므로 각각의 관계 맺기는 엄밀히 말하면 동등하지 않을 테고, 같은 이유로 인간 집단 내에서도 수천수만의 결이 있으리라고. 또한 긍정적이고 호혜적인 관계에 대한 정의와 그 동기 역시 명확히 하는 게 좋으리라고. 그러나 논점 각각을 엄밀히 따지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질 테니 일단은 넘어가겠다고. 앞으로의 주장들도 그런 식이 될 거라고. 란드와르도 거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보편성에 반하는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오. 태어날 때부터 그랬든, 아니면 성장과정 때문이든 말이오. 어떤 이들은 교화되지만 어떤 이들은 끝내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지. 혹은 겉으로만 사회에 적응한 채, 속에는 어두운 마음을 간직할 수도 있소."
"나트람 같은 부류 말씀이시지요."
"나트람이 극단적인 예시가 될 거요. 그 요정은 평생토록 타인을 해치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렸지만, 당장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참아냈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성공적인 삶이었겠지."
"한 가문의 주인이자 제사장이었지요. 라덱에게는 어르신이라 불렸고요. 가족은 논외로 두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을 겁니다."
가족에게 저지른 학대와는 별개로, 그리고 미궁에서 벌인 돌발행동과도 별개로, 나트람이 요정 사회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애썼던 것은 사실이었다. 원치도 않은 반려를 맞고, 사랑하지도 않을 자식을 보고, 기껍지도 않은 제사장 자리에 오르는 식으로. 일찍부터 솔직해졌더라면 진작 사형 선고를 받고 제물로 바쳐졌을 터였다.
"하지만 평범한 기쁨을 배우려는 시도는 실패했소. 그 노인에게는 그런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던 거요.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있었겠지만 그걸 기쁨이라 부르긴 어렵겠지. 동기는 공포나 강박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분노였을 수도 있소. 뭐든 좋아. 어쨌건 결과가 총체적인 실패였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그렇지?"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고, 나트람의 참을성이 충분했던 세계를 상상했다. 노인은 신관들을 내버리는 대신 차근차근 미궁을 주파해 나갔을 테고, 제어실은 결국 무력화되었을 것이다. 혹은 헤이딘과 독대하기 전에 아즈리온의 화신을 먼저 처리했을 것이다. 일드얀이 좋아할 일은 하기 싫다는 이유로 반구에만 가두고 끝내는 게 아니라. 만약 실패해서 죽었을지라도 명예는 지켰을 것이다…….
신관들을 이끄는 것. 아즈리온의 화신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 나르시소의 도망자들을 소탕하고 슈문의 회복을 막는 것. 힘들여 쌓아 온 명예를 지켜내는 것. 일드얀의 뜻을 거스르는 것. 헤이딘의 목숨을 취하는 것. 그래서 유일한 행복을 맛보는 것. 나트람이 실패한 일들의 목록이었다. 총체적인 실패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약 통솔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더라도, 그 경우에도 실패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사회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든 간에, 규범이 있다면 거기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오. 우리가 포용하는 범주가 인류에서 요정까지로 그 한도를 넓히더라도, 서로의 다름을 최대한 받아들이더라도, 체제가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부적응자가 될 거요."
"나트람 같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군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를 태어난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강변하는 게 아니오. 그 노인을 동정할 마음도 없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모두에게 나았으리라 생각하오―여기에 핵심이 있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충분한 교육과 감정적 지지에도 아무 가망이 없게 된 사람을?"
란드와르는 갖가지 종류의 부적응을, 작금의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과 아닌 것들의 차이를 곱씹었다. 먼 옛날 유럽에서 광기는 창조성이거나, 신성함의 증거거나, 궁극적인 진실로 여겨졌으며 정신병자는 엄연한 사회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 성스러운 정신병이란 환각이나 망상 따위였을 것이다.
반면 동남아의 어떤 섬에서는 조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미쳐 날뛰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들은 십수 명을 죽인 뒤 자살을 택하고, 남은 이들은 이유를 따져 묻는 대신 주검을 수습한다. 악행이 사악한 호랑이 영령의 짓이라 믿으면서. 외부 연구자들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해석은 그렇다.
따라서 정신증이나 살인 충동과의 공존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세 유럽의 사람들은, 동남아 섬의 사람들은 그 일을 해냈다. 부분적으로나마. 하지만 그런 해답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감금당하거나 걸인이 되는 정신병자들은 당시에도 수없이 많았고 살인은 섬에서도 여전히 비극이었다.
애당초 로야페타나 말루카와 같은 곳에서는 그런 인식이 아무런 지지도 얻지 못할 터였다. 문장 한 줄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문장이, 맥락이 필요했다… 인간 도시에는 그런 현상을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일 맥락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인간 도시의 일원으로서, 현대인으로서 답했다.
"보통은 감옥이나 수용소, 혹은 격리병동에 데려다 넣지요. 사회질서에 심각한 위해가 되면 사형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겉보기로는 흠잡을 데 없는 이웃이자 유능한 근로자라면 어떻겠소? 범죄라고는 일절 저지르지 않았고, 오직 스스로의 마음에서만 고통이 생겨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모두가 평화로울 겁니다…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요."
"그렇다면 이때 교화는 누구를 위한 일이오? 그 사람이오, 아니면 그 사람을 제외한 모두요?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일종의 윤리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게 아니오? 만약 그 사람 또한 만족할지라도―"
순간적으로 논의가 범주를 넓혔다. 볼로디아는 나트람만큼 해롭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 일반과는 다른 사람들, 타자에 의해 고쳐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을 고치는 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도.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결정권이 화두에 올랐다.
"사람들은 보통 자아가 오로지 자신에게 귀속되었다고 믿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규범에 의해 형성되고 재단된 결과물이오. 그리고 이 과정에는 타인의 시선이 크게 개입할 수밖에 없소.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역시 그렇지. 그건 무언가를 언어의 형태에 가둘 때 항상 일어나는 일이오. 좋다, 싫다를 넘어선 고차원적인 판단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교화되기를 거부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은 강제로 사회의 규칙을 배우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거나 자신의 핵심이라 여겼던 무언가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히 적응했고, 그에 따라 보편적인 언어를 얻었으며, 변화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만족감을 근거로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겠냐는 말씀이시지요?"
볼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변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보다 일반적인 부적응자들의 예시에 이어 테네브로즈와, 메기도와, 로안의 사례가 언급되었다…….
"예, 사회가 가하는 교정은 결국 폭력입니다. 더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해 한 사람의 안녕을 일정한 틀에 잘라 넣는 일이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건 지금의 체제에서는 최선이고, 대개는 고통 받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방법론은 계속 고민을 해 봐야겠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나도 동의하오. 우리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폭력이지만, 완전한 해체나 야만 또한 별다를 바 없는 폭력이지. 그러니 이 체제 위에서는 공존의 영역을 넓히려 애쓰는 게 최선일 거요―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지. 우리는 나트람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겠소? 고칠 수 없거나 고치기엔 이미 늦었고, 평생에 걸쳐 큰 고통만을 겪을 사람은?"
"글쎄요, 대안을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는 꽤 극단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상대에게 죽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볼로디아는 느닷없이 논제를 틀었다.
"살아가라고 하는 건 전적으로 괜찮은 일이란 말이오? 얻을 건 고통밖에는 없을 텐데? 혹은 영구적인 격리나 추방이 죽음보다 나을 이유가 있소?"
"더 살아가고자 한다면, 즉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면 죽음을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교화가 억압이라면 죽음은 말살이고, 최종적인 형태의 폭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이 교화가 불가능한 부류인지 아닌지 겉으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자기 자신마저도 모를 겁니다."
"나는 극심한 이상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오. 그 마음을 타인이 예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소. 다만 그들이 한없는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추구하게 되는 원인을 짚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거기에는 타인의 몫이 충분히 존재하리라는 것이 내 입장이오."
"처음에 본성이라 하셨습니다. 더 살고자 하는 것은 생물의 본성입니다."
란드와르는 대답과 동시에 테네브로즈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죽음이란 영혼으로부터 아픈 기억이 씻기는 순간일 뿐이라고. 이스트리아는 저승으로부터 시작된 세계고, 죽음은 징벌이 아니라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본성은 지구인의 본성과는 다를 터였다. 만약 생물로서의 본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지지 않은 무엇을 그런 기준 아래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거기에 속한 규범들은 생물의 본성을 침범하면서 작동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본성을 강화하기도 하오.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거요… 혹은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그런지도 모르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볼로디아의 어조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란드와르는 검은 눈동자 속에서, 자신이 일전에 던졌던 질문을 읽어냈다. 만약 늑대의 꿈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땅의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새로운 출발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존속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겪지 않은 세상의, 무결한 행복보다는 지금의 고통과 기쁨이 계속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혹은 지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앞날의 영광을 그리는 사람들이.
다시 질문. 고통 위에 쌓인 세계를 무너뜨릴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걸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대에게 이런 세상을 선물하는 건 윤리적인 일일까? 사람들이 더 나아진 미래를 꿈꾼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내버려두는 건 타당할까? 어떤 근거가 그 전망을,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고통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한 사람과 세계를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나트람의 일생은…….
서른다섯 살의 한국인이 말을 얹을 주제는 아니었다. 이시 타브의 심장을 회수하고 늑대를 깨울 무렵에는 결론이 나 있어야겠지만, 그때 자신은 이스트리아에 없을 것이다. 그는 앞선 문장에 대해서만 답하기로 했다.
"우리 사회가 과장 광고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해야 할 사람들이 괜한 환상을 가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아이는 그들에게서 세계를 배웁니다. 극단적인 부적응자를 위해 도시 당국이 스스로 친사망적인 관점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은… 성격 나쁜 농담밖에는 되지 못할 겁니다."
"일단 밝혀 두자면, 나도 그럴 계획은 없소―다시 본성의 문제로군. 혹은 통치와 권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볼로디아의 촌평을 끝으로 긴 침묵이 있었다. 생각으로 가득한 침묵이었다. 이윽고 란드와르의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계획과 지금의 대화가 맞물렸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타마기스를 아실 겁니다. 시체들의 도시 말입니다. 우리가 곧 들를 곳이기도 하죠. 완벽한 해답은 아니겠지만, 그곳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생명의 본성과 사회의 형태에 대해 서로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