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고통이 있었다 (1)
깨어난 슈문은 오염 잔해를 불태운 뒤 정당한 방문객들을 옮겼다. 이번의 이동 절차는 란드와르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는 공간이 정교한 종이접기처럼 맥동하면서 자신의 위치가 재지정되는 것을 느꼈다. 접은 종이에 송곳을 찔러 넣은 다음 다시 펼쳐 서로 다른 장소에 동일한 구멍을 만들어내듯이.
이제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잔디밭도, 과수도,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폭포도 없었다. 지면과 천장의 구분은 불가능했고 걸음을 내딛는 곳이 바로 발밑이 되었다. 란드와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벤트레스를 내버려두고 마타치치를 찾았다. 조카와 함께 벨레다를 부축하고 있었다.
"살아 있죠?"
"안 죽었어. 내가 목걸이 끊어서 살렸어. 그냥 기절한 거야."
클렘이 툭 대꾸하자 마타치치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일었다. 란드와르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슈문 앞에서 이래서야 안 될 일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가르치려던 찰나 방향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원지가 있다기보다는 귀 안에서 곧바로 공명하는 듯했다.
[가까이 오거라.]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종이 구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바닥 위에 띄워 올리던 것보다 훨씬 컸고, 각인 문자로 이루어진 행렬이 토성의 고리처럼 구조물 둘레를 맴돌았다. 요정 하나가 그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어깨까지 닿는 흑발을 한 갈래로 땋아 묶은 소년. 슈문의 본상과 자아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정 신이랑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인데. 솔로틀이야 그렇다 치고.
란드와르는 잠시 예의를 잊어버린 채 생경한 느낌 속에 멈춰 있었다. 벤트레스와 마타치치가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슈문의 앞에 선 다음 미리 의전이라도 연습한 것처럼 절도 있는 몸짓으로 무릎을 꿇었다. 클렘퍼러도 어설프지만 예를 갖췄다.
그는 뜻밖의 상황 변화에 눈을 깜박였고, 그냥 무례한 이방인이라는 위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 생각해보면 아즈리온의 화신이 슈문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아무튼.
그는 슈문이 요정들을 치하하고 천 년간의 일을 전해 듣는 장면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귀찮게 떠들 일만 늘어날 거라는 느낌이 왔다. 벤트레스가 무얼 하냐는 투로 힐끔거렸지만 눈치를 주자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달갑지 않은 속삭임이 뇌리를 관통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죄송은 나중에 하시고, 나와서 이야기할 준비나 해요.
마음 같아서는 연락이 두절된 원인부터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솔로틀과의 계약을 이행하는 게 시급했다. 슈문에게 늑대의 진명을 묻는 것이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야스와다까지 갈 수밖에 없다…….
[너는… 지고하신 분이 아니구나.]
그리고 슈문이 란드와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 아닙니다. 그 문제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 말을 뱉고서야 테네브로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만신전의 천사가 나타난다면 저승의 청지기도 와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영혼이 심하게 찢겼는지 어쨌는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대화를 끝마칠 즈음이면 요정 놈도 돌아올 것이라 믿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는 지혜의 고리를 느슨히 움켜쥐고서는 입을 열었다.
"일단 요정들부터 돌려보냅시다. 아시겠지만 남들 앞에서 꺼낼 주제는 아니니까."
슈문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란드와르는 요정들이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감추자마자 티아를 불렀다. 정장을 입은 여자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란드와르는 깨어난 지혜의 신과 면담을 진행했고, 달갑지 않은 추정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시뮬레이션이 전적으로 옳았다. 슈문의 기억은 상당 부분 손상되어 있었다. 끝장을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큰 타격을 입었을지라도 슈문은 여전히 제국의 역사 대부분을 저장소에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벤트레스의 외침이, 일드얀을 죽이라는 소리가 무슨 뜻이었는지 밝혀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너는 그 대모라는 자가 나우파나 폐허 조사단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요정치고도 수명이 길며, 제국 시절의 지혜를 이해하고 있다고… 혹시 단검을 거기에 내버려두었나?]
소년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티아를 바라보았다. 아즈리온의 진상을 밝힌 후로, 지혜의 신은 줄곧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관찰하면서, 이 생쥐들을 불러온 게 슈문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마냥 호의적으로 대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손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지혜의 신으로서도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다…….
[말해 보아라.]
슈문이 다그치자 티아의 눈동자가 말없이, 옆으로 굴러갔다. 홀로그램 바깥의 누군가가 지시를 내리길 기다리는 투였다. 아마 파울리스일 터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다림 끝에 천사의 입이 열렸다.
"예, 말씀하신 대로 칼날 부분을 꺼내 왔다가는 또 다른 문제를 빚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의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실로 위험한 물건이니까요. 따라서 우선적으로는 수정 심장만을 폭파시키고, 전쟁이 수습된 후에 칼날까지 처리하기로 했지요."
[너는 거기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다―전쟁 당시의 판단들은 대부분 나의 의견이 개입된 것이므로, 저장소에는 그 정황이 모두 남아 있다. 다만 나는 내가 영토에 갇혀 있던 동안의 일을 묻는 것이다.]
"각설하고 핵심만 말씀드리자면, 수정 심장이 완전히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회수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혼란이 지속된 탓에, 나우파나 폐허를 살피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쯤 되자 란드와르는 자신의 입장마저도 난처해지는 것을 느꼈다. 칼날은 게임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여기서 또 뒤통수를 쳤다고? 이 상황에서?
"죄송한데,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숨긴 게 더 있어요?"
사태의 전말을 들은 란드와르는 당장 파르타를 고위천사 자리에 올려놓아도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어중이떠중이 모임보다는 정보사 수장이 훨씬 업무 능력이 뛰어날 게 분명했다. 프로젝트가 손쓸 방법도 없이 망했다 쳐도 그렇지, 팔로업은 해야 할 게 아닌가…….
순간 티아의 속삭임이 생각 위에 겹쳤다.
<사실 저희도 오백 년쯤은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만 죽이는 일이 아니냐면서 반발이 거세지더군요. 그리고 그 후로는… 예, 잊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신인데, 항명은 그냥 찍어 누르면 안 되는 겁니까?
<신앙심 체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아실 겁니다. 한 번 적자가 나기 시작하면 영향력이 감소하고, 따라서 우리에게 의지하는 사람들도 줄어듭니다. 악순환이 계속되죠. 따라서 도시 연합에 대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무적 판단―>
이거 미치겠네. 나한테 그런 거 말 안 해도 돼요.
어쨌거나 일드얀이 나트람을 보낸 이유도 명확해졌다. 화신을 저지한다는 대의는 위장에 불과했다. 이시 타브를, 그리고 단검의 다른 부분을 현계로 이끌어와 합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을 터였다. 성물이 원래의 목적을 다하도록. 이 경우에는 야스와다에 나무가 자라나는 이유도 해명이 가능했다.
이쯤 되자 란드와르는 익숙한 짜증이 솟아 나오는 것을 느꼈다. 전담 천사가 자리를 비운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두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일찍 쓰러지는 순간 관측 가능한 미래에서, 즉 시뮬레이터의 원본이 되는 마력 갈래들에서 유의미한 변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운명부와 그 문제를 상의하는 동안 나트람이 나타났다고.
티아는 슈문의 질문 공세를 애써 받아내는 중이었다. 란드와르는 거기에 텔레파시를 쏘아 보냈다. <개인 정보 및 민감 정보 수집 동의서 7(선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티아 씨, 부족한 인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압니다. 나도 아는데요, 조금만 더 최선을 다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망한 한국인이 본사 건물에 불이라도 지르면 서로 곤란할 거 아닙니까.
<큰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사과는 안 해도 됩니다. 듣고 싶지가 않거든요. 아무튼. 계산은 잘 돼 가요?
<말씀드렸다시피 시뮬레이션과는 진행 방향이 어긋난 상태입니다. 실시간으로 계산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일차적인 결과가 나온 후에 성물 회수 작업에 들어가는 편을 권장드립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쉴 시간이 있으면 나야 좋죠.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거예요. 벤트레스는 이미 칠십 년쯤 전부터 나무 환각을 봤단 말입니다. 게임이 만들어진 건 그 이후일 테고요. 그러면 나는 댁들이 처음부터 계산을 잘못 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일드얀이랑 나트람이 이러는 건 시뮬레이터에 안 잡혔어요? 왜?
<운명부가 추적하는 것은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 별의 운행에 따른 가능성들과 진행 방향이고, 그 중에서도 저희 소속이 아닌 갈래는 명확히 집계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벤트레스의 경우에는… 천상성의 특징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천상성까지 만신전 소속이 되었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을 예정입니다.>
천상성이, 즉 나우파나의 별이 관장하는 마력 갈래는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무색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힘이었고, 어디에나 공기처럼 존재했으며, 어떤 색으로든 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티아의 설명대로 열여덟 개의 별이 각각의 미래를 내포한다면, 가장 많은 가능성을 관측할 수 있는 갈래는 무색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색은 만신전 소속이어야 했지만… 폭파 과정에서 지분율에 문제가 생긴 탓에 소유권이 붕 뜨고 말았다. 덕분에 수정 도시에 정신을 놓고 온 요정이 여덟 개 별을 거느린 신들보다 예언을 잘 하게 된 것이다.
거기까지 추측을 마친 순간 짜증이 폭발했다.
결국 계산을 잘못한 게 맞죠?
<죄송합니다.>
란드와르는 머릿속으로 욕을 해 주었다. 이건 사기당한 동업자로서의 권리였으며 티아는 고위천사이자 사기극의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욕을 먹을 의무가 있었다. 욕만 먹고 끝나는 게 다행이지 아즈리온이 정신이 멀쩡했더라면 티아와 파울리스를 때려 죽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화풀이일 뿐이었다. 티아에게 신경질을 부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이다. 비록 만신전이라는 게 무능한 사기꾼 집단일지라도. 그는 애써 이성을 되찾고는 현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단계는 둘. 타마기스에 들러 부패자들의 협조를 얻고 성물을 회수한 뒤 현계에 나타난 이시 타브를 처치한다. 그 후에 야스와다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른다. 운명부의 천사들이 실컷 계산을 돌리는 중이라고 했다.
시뮬레이터는 쓸모를 잃었고 새롭게 주어진 미래는 공백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란드와르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기로 했다. 어떻게든 될 거라고. 이토록 무책임한 문장에 가두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내용이 아닌가 싶었지만 벌써부터 긴장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세상은 어제처럼 평화롭고 아직 나무는 자라지 않았다. 그러면 됐다…….
남은 대화를 마친 란드와르는 나트람이 이시 타브로, 거대한 표범으로 변해 나타나는 악몽을 의식 저편에 던져 놓고서는 중앙 공동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지하 동굴이 그를 반겼다. 슈문이 깨어나면서 구조물이 사라지고 제어실까지 원래 형태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외부 미궁에 있던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볼로디아와 로안은 걱정할 것도 없었고 첼리비다케와 쿠벨릭도 무사했다(정확히는, 몸만. 첼리비다케는 정신적인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했다). 학자들이 슈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동안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와 로안에게 오염지대에서의 일들을, 그리고 일드얀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한편 야스와다 침입자들은 슈문이 따로 격리해 두었다. 놈들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건 명백했기 때문에 심문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벤트레스가 놈들의 관리를 맡았다.
벨레다는 눈을 뜰 때까지 마타치치의 방에 눕혀 두기로 했다. 옷은 요정 꼬마의 것을 빌려 입혔다. 클렘퍼러에게는 따로 칭찬을 해 주었는데 졸리다면서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러더니 벨레다의 옆에 엎어져서 자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테네브로즈는 창백한 얼굴로 튀어나와 자신은 저승에서 조금 더 쉬겠다는 뜻을 밝혔다. 척 보기에도 몸이 안 좋아 보였다. 정신도. 그래도 되살아났으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소란이 일단락되었다. 최소한 아즈리온의 화신이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때까지도 헤이딘은 반지 속에만 틀어박혀 있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란드와르는 긴 목욕을 마친 뒤 중앙 동공으로 나왔다. 볼로디아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혹여 할 일이 남았소? 아니면 서둘러 다음 장소로 가야 한다거나……."
"아뇨, 쉬고 계시면 됩니다. 지금 당장 타마기스로 출발하기엔… 일단은 만신전 쪽에서 미래 계산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요. 하루 이틀이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나머지도 쉬어야 할 테고요."
"그러면, 그 요정 노인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소?"
나트람의 동기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밖의 이야깃거리에 대해서도. 란드와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