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쉬운 사냥감 (4)
노을을 머리에 인 나무들은 막 타오르기 시작한 숯 덩어리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태양은 언제나처럼 그 무엇도 불사르지 못했다. 허공에 미미한 더위를 남기면서 숲 저편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불안이 도시 곳곳에 끼어 있을지라도 사람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혼례를 약속했고 칼린카의 새끼를 받았으며 기념일 주간 계획을 이야기했다. 귀족과 명문가들의 방문이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딤 나겔의 일상도 이전과 같았다.
그는 평민 거주구에 들러 이야기를 경청한 뒤 젊은 연인에게 축사를 건넸다. 병든 칼린카를 고쳐 달라며 데려온 이도 있었다. 딤 나겔이 거주구의 평민을 너그러운 무뚝뚝함으로 대하는 만큼 그들 역시 늙은 가주를 아꼈다. 그 마음은 단순한 존경 이상이었다… 반려를 일찍 떠나보내고 자식마저 잃고서도 그 자신의 삶을 내버리지 않는 태도는 경애와 비감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별이 잇달아 커지기 시작한 후로 그들은 보라색 별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동족의 명운처럼 거창하고 먼 이야기를 입에 담는 대신 가주의 노년이 평안하기를 빌면서. 그리고 불행도 행복도 유별나지 않은 나날들이 영원하기를 소망하면서. 딤 나겔은 그들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곤 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딤 나겔은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고, 숨을 골랐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그는 죽음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삶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별 일은 아닐세. 피로가 쌓인 모양이야. 돌아가서 조금 쉬면……."
거기까지 말한 순간 찢어질 듯한 고통이 몸 전체를 휩쓸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에, 딤 나겔은 짧은 환각을 보았다. 거대한 표범이 소년을 집어 드는 장면이었다.
* * *
기묘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나트람은 부하들을 모두 버린 뒤 오염지대로 달려와 동생과 면담을 시도했고, 요정 꼬마가 놈을 저격총으로 사살했다. 벤트레스까지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이런 와중에 테네브로즈는 지혜의 고리로만 남아 있었다.
고리를 주워든 란드와르는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요성을 느꼈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빙글거리는 요정 놈을 앞에 세워 두고 앓는 소리만을 내던 끝에 마타치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저는 조카부터 데려와도 될까요?"
"그 편이 낫겠군요. 벨레다도 다친 것 같고……."
란드와르는 반지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마타치치를 보내고서야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에 생각이 가 닿았다. 헤이딘은 허공에 떠오른 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소용돌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번을 부르고서야 겨우 반응이 되돌아왔다.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소. 당분간 혼자 있겠소. 미안하오."
그리고 헤이딘도 사라졌다. 벤트레스와 란드와르만이 소용돌이 곁에 남았다. 란드와르는 요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품에 손을 넣어 목함을 쥐었다. 시가는 처음부터 질겅거리고 있었으니까 불만 붙이면 됐다. 거멓게 타들어가는 시가 끄트머리가 자신의 마음 같았다.
그는 벤트레스를 향해 연기를 토해냈다.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뭐 하는 새끼인데 다른 사람들 내버려두고 혼자서 이러고 있어."
"내 몫을 했을 뿐입니다.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예언자라고 불러 주시죠."
"소용돌이에 대고 한 말이 예언이야?"
"그런 셈이죠."
란드와르는 시가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나트람에 대한 의문이 한순간에 움츠러들더니 전혀 다른 궤의 생각이 뱃속 깊은 곳에 뭉글거리며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 나르시소로 출발하기 전에, 쉭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 그렇긴 합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내가 직접, 일드얀을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미래를 봤을 뿐이죠. 그래서 내가 일드얀을 미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가 궁금했는데, 쉭겐한테서는 나트람 이야기만 실컷 듣고 끝났습니다.
결국 이건 낯선 동물의 뼈를 짜 맞추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거대한 엄니를 갈비뼈 자리에 넣어 보다가, 혹은 옆에 널브러져 있던 작은 돌덩어리가 슬개골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정답을 보고서야 장탄식을 터뜨리는 것이다.
"나트람이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냐. 일드얀을 왜 죽여야 하는 거야."
"세상의 뜻을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트람이 죽긴 죽은 거야?"
"그것도 몰라요. 그 늙은이 얼굴도 아까 전에야 겨우 떠올렸는데 이 다음 일을 알 리가 없죠. 참, 이건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야스와다에 나무가 자랄 겁니다. 아주 큰 나무 말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목을 매달고 있고요, 산 사람들도 거기에 매달립니다……."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시가를 구부려 놓았다. 벤트레스가 묘사하는 건 이시 타브가 관장하는 땅과 거기에 뿌리 내린 거목이었다. <이스트리아 퀘스트>의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다… 게임에는 잠든 신의 영토가 현계에 강림하는 상황이 없었다. 야스와다에 잠입한 플레이어는 3교구의 틈새를 이용해 이면 세계에 발을 들이고, 거기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른다. 그뿐이었다.
티아? 대답 안 해요? 아직도 바쁩니까?
젠장, 이러고서도 베네수엘라 본사 건물이 무사할지 한번 보자고. 불 지르겠다는 말이 농담인 것 같아?
이제 와서 시뮬레이션의 정확성을 따질 마음은 없었다. 예언의 내용이 과도하게 의미심장할 뿐이다. 이시 타브의 강림은 정해진 미래란 말인가? 하지만 일부러 영토를 덧씌울 이유는 없을 텐데? 타마기스나 나우파나가 그런 것처럼, 이면 세계가 현계와 겹치는 상황은 통제 불가의 동의어였다. 슈문의 미궁도 기실 다를 바는 없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늙은 하인이 수레를 몰고 있어요. 그 뒤편에는 딤 나겔과 엘드리그가 앉아 있죠. 소년 하나도 있고요. 창 너머로는 몸을 잃고 넋으로 변해 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나무가 점점 크기를 키웁니다……."
"그래서?"
"그게 다예요. 환각이 모든 걸 차례대로 보여줬더라면 미치광이 취급은 안 당했을 겁니다. 다들 나더러 망상벽이 있다더군요. 언젠가 내가 말했던 게 모두 이루어지면 그 녀석들을 붙잡고 안부를 물으려 했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됐어요. 이거 원, 돌아갈 때쯤이면 다들 나무에 목이 대롱대롱 걸려 있을 게 뻔하니."
란드와르는 담배 태울 맛이 급격히 떨어지는 걸 느꼈다. 연기에 고민을 실어 보내는 것도 그게 충분히 가벼울 때에나 될 일이었다. 그는 혀끝에 시가를 눌러 끄고서는 일드얀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아는 사실은 많지 않았다. 첫째 가문의 주인이고, 이상하리만치 수명이 길고, 소생 계획을 주도했다는 것… 잠깐만.
요정 신의 본체는 몸이 아니라 심장이었다. 심장이 뜯겨 나오더라도 의식은 보존된다는 뜻이었다. 이시 첼과 스카르파가 그랬던 것처럼, 접점만 생긴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현계로 나올 수 있다. 접점. 심장을 얻을, 살아 있는 사람. 잠들어 있다는 게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란드와르는 나트람이 소용돌이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고, 그 반대일 거라고 가정해 보았다. 접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보랏빛 마력 덩어리가 힘을 잃기 전에 이시 타브가 그를 자신의 영토로 데려간 것뿐이라고. 일드얀은 이런 결말을 위해 나트람을 여기에 보낸 것이라고. 본대에서 이탈해 혼자 오염지대로 오는 상황을 예상이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지만 석연찮은 부분은 남았다. 첫째는 벤트레스가 외친 말이었고 둘째는 나트람의 정신병이었다… 잠깐만, 애초에 동생이랑 무슨 말을 했던 거야? 돌이켜 보면 이걸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맞다, 너 나트람이랑 헤이딘이 이야기하는 것도 다 들었지. 뭐라고 했길래 저 양반이 저러는 거냐."
"못 들으셨습니까? 백 년을 살아도 그런 구경을 눈앞에서 하기는 쉽지 않은데 정말 애석한 일이군요."
곧바로 란드와르는 문장이 뺨을 후려갈기는 듯한 심상에 사로잡혔다. 나트람이 헤이딘을 괴롭힌 건 동생을 싫어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그게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서 그런 것뿐이라고 했다. 손발을 자른 것도 헤이딘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그랬을 뿐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구나, 하고 넘기기에는 그간의 일 모두가 증거였다. 헤이딘을 감금한 것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와서 면담을 시도한 것까지, 모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거냐?"
"여기 있지 않습니까."
벤트레스는 씩 웃으면서, 곧게 펼친 손바닥으로 소용돌이를 가리켜 보았다. 란드와르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는 막연하도록 참담한 기분 속에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목함을 다시 꺼냈다. 시가에 불을 붙이자마자 발걸음이 자연스레 소용돌이 바로 앞으로 향했다. 밑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점액질이 천천히, 의지를 가진 듯 휘돌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다시 물었다.
"죽었을까?"
"난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꿈에서라도 보면 말씀드리죠."
"죽어야 하는데."
중얼거림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몸을 한 차례 돌아 나왔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렇게나 절실하게 바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끈적거리는 정적이 허파를 채우고는 목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그러자 생각까지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거기에는 벤트레스의 예언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심란함이 있었다.
란드와르는 자신이 저 아래에 잠겨 있는 요정 노인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평생토록 실패했고 삶의 벼랑에서도 행복을 놓쳤지만 동정은 결코 받지 못할 누군가라고. 세카두에도 야스와다에도 말루카에도 그런 마음의 자리는 없을 터였다. 어쩌면 이 땅 자체가 그에게는 발붙이지 못할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가를 껐고, 눈을 감았고, 나트람이 부디 죽었기를 기도했다. 대부분은 자기 자신과 인간의 미래를 위해. 나머지는 야스와다의 요정들을 위해. 그리고 아주 약간은, 노인의 끔찍하고 추악한 평생을 위해.
어떤 불행은 역사로부터 태어나는 대신 스스로 과거를 만들어 나가고, 거기에 휘말린 사람들은 다시 고통의 기록이 된다. 펜을 부러뜨리더라도 이미 적힌 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글자 아래 묻히거나 색이 바래거나 종이 자체가 뜯어져 나가면서, 사라진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 한 명만 아니라면 무탈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을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가능한 삶을 되찾기엔 늦어 버린 사람들이 차례대로 늘어섰다. 헤이딘, 딤 나겔, 사르코, 울쿠스, 메기도.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더 많은 이름들. 그 사이에서 나트람의 진의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기보다는 건물의 골조 같은 것으로 변해 지금까지의 사건들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할 무렵 타오를 듯 밝은 빛이 발치로 쏟아져 왔다…….
슈문이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