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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09화 (210/258)

209화 쉬운 사냥감 (3)

"네가 죽은 후로 매일 후회 속에 밤잠을 설쳤지.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너는 모를 게다."

깊은 물에 잠긴 듯 강한 압력이 사방에서 몸을 짓눌러 왔다. 주문을 시전하려 했지만 마력의 흐름 자체가 더 큰 힘에 의해 억눌려 있었다. 공중에 붙들린 헤이딘은 당혹 속에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보랏빛 소용돌이를 밟고 선 채, 놀랄 만큼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노인이 형님이란 말인가? 정말로?

모든 정황이 합리적 사고를 거부하며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나트람이 와그다스 마법의 대가였다는 것. 그가 홀로 미궁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잔해의 힘을 다루어 테네브로즈를 꿰뚫어 죽인 뒤 다른 둘을 반구에 가두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만 이렇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까지.

"이렇게 됐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구나. 살아 움직이는 걸 껍데기와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넌 어렸을 때에는 표정이 많았어. 예전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즐겁다."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헤이딘은 더듬거리며 운을 뗐다.

"형님이 맞소? 이건 대체… 대체 무슨 일이오? 어째서… 나는 형님이 날 미워하는 줄로 알았는데."

"스스로도 널 미워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아니었다.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도, 별채에 가뒀을 때에도, 지금도, 언제나. 그저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말한 대로다."

"한 마디도 이해가 안 가오. 언제나라고 했지. 형님은 언제나 나한테 끔찍한 사람이었소. 어렸을 때에도 그랬고, 별채에 갇혔을 때에도 그랬고, 손발이 사라진 후로는 더더욱 그랬어……."

해묵은 격노를 터뜨리기에 헤이딘은 너무 많은 세월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러고서도 남는 것은 있었다. 용서했기 때문에, 사소했기 때문에 잊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고통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면 망각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나는 형님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악취미는 익히 알고 있지만 날 괴롭히는 게 이렇게까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나야 동족을 저버렸으니 훈계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말해 보자면, 형님은 신관으로서 여기에 왔소―그러면 형님이 마땅히 할 일은 저기 계시는 분을 어떻게 해 보는 거요. 별 것도 아닌 망령을 붙잡고 이러는 게 아니라."

"싫어. 일드얀이 기뻐할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헤이딘은 클렘퍼러처럼 말하는 노인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던가? 그는 별채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다가 그만 포기했고, 정론을 꺼내들었다. 이 상황에서, 이런 입장에서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원망을 퍼붓거나 옛 일을 따져 물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은빛매의 대모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오. 하지만 형님은 별불꽃의 가주고, 다른 요정들의 통솔자기도 하오. 맡은 책임에 비해 그런 이유는 너무 하찮다고 생각하지 않소? 저기에 아즈리온의 화신이 계신데?"

"나는 책임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러면 테네브로즈는 왜 죽였소? 대모가 심어놓은 첩자라도 된단 말이오?"

"그놈은 예전부터 죽이고 싶었어."

그리고 긴 정적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헤이딘이었다.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요?"

"생각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야."

"무슨 생각?"

"오는 동안 널 어떻게 죽여야 할지 줄곧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   *   *

"오호라, 라덱은 나를 그렇게 정신병자라며 욕해 놓고 저런 건 어르신이라고 불렀단 말이지. 그놈도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엉망이구만."

벤트레스는 과수 뒤편에 몸을 숨긴 채 소용돌이를 넘겨다보았다. 거리가 있는 탓에 대화가 뚜렷이 들리진 않았지만 내용을 분간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이라도 죽일 요량으로 훔쳐듣기 시작한 것이 의외로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여간 아우님이 이걸 못 보다니 아쉽군. 저 양반에 비하면 나는 아주 제정신인데 왜 그리 난리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헤이딘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이 막혔는지 이미 죽었는지(노인의 정신상태를 생각하면 이 가능성도 충분히 유력했다) 아무 소리가 없었다. 나트람만이 홀로 오래된 꿈에 대해, 손발을 자른 날의 기쁨에 대해, 응어리진 망설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손자를 무릎에 앉혀 두고 옛이야기라도 읽어 주는 투였다.

"…언제라도 죽일 수 있었는데, 사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대모의 뜻은 중요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일드얀의 명령을 핑계 삼아 너를 내버려뒀을까? 왜 나는 손발을 자른 것에 만족했지? 네가 기억을 잃기 시작한 후로 아무 반응이 없어져서? 아니, 왜 너를 황무지에서 죽이지 않았지? 쓸모도 없는 가주 자리 때문에?"

그 질문들을 기점으로 나트람의 목소리가 빠르게 절박해졌다.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벤트레스는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게다.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조차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내가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절거리지… 목소리를 따라서 기뻤던 적이 없는데, 지금껏 쫓아온 게 모두 가짜였다는 것까지도 알게 됐는데, 도대체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가 평생토록 바란 게 눈앞에 있는데, 왜, 도대체 왜 망설이고 있는 거지? 널 만나면 결론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아직도 죽일 방법을 고민하고만 있는 거지?"

아직 살아 있겠군. 무슨 헛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헤이딘을 죽일지 말지로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대화가 어떻게 끝났더라? 벤트레스는 소설책의 중간을 뛰어넘어 마지막 장을 펼치는 사람의 심정으로 환각을 곱씹었다. 그는 분명히 이 장면을 보았고, 직접 등장하기까지 했다…….

*   *   *

반구에 갇힌 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나 이틀만큼 길지는 않았고, 사실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란드와르가 느끼기에는 충분히 길었다. 티아는 아직 소식이 없었고 종이 구체도 먹통이었다.

그는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운 채 시가 끄트머리를 질겅거리기 시작했다. 밀폐 공간이니만큼 불은 꺼 두었다. 반면 마타치치는 의욕이 남아 있는지 저격총에서 조준경을 분리한 뒤 먼 곳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윽고 반가운 울림이 튀어 나왔다.

"클렘퍼러!"

"그 애가 여기 왔어요?"

마타치치는 직접 확인하라는 투로 조준경을 건네고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란드와르는 요정 학자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구멍에 눈을 맞댔다. 상상도 하지 못한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클렘이 옆에 벨레다를 눕혀둔 채 숙련된 저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총구가 겨누어진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나트람이 거기에 있었다.

"잘 되겠습니까?"

"클렘이라면 무조건 맞추죠. 문제는 저 늙은이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건데… 마력 흐름을 감지하기만 하면 바로 막힐 거예요. 그래도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는 있겠죠."

란드와르는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씹었다. 클렘퍼러의 사격 실력이 상수라면 나트람의 정신머리는 변수였다. 놈이 헤이딘과의 면담에 과몰입할수록 사살 확률이 올라가는 셈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쥐었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나트람의 정신병이 충분히 깊기를. 그래서 꼬마가 놈의 머리통에 마탄을 꽂아 넣을 수 있기를.

기도는 짧았다. 란드와르는 강렬한 직감 속에서 눈을 떴다.

세상이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신관 제복을 입은 노인… 피가 노인의 등판을 흠뻑 적신다… 그리고 목덜미. 노인은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손끝으로 목깃을 만지작거린다… 마찬가지로 피로 물들어 있다… 노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유령 소년을 본다. 그때 한 줄기 직선이 다시 노인의 목덜미를 꿰뚫고 이마로 나아가면서…….

나트람의 몸이 한순간에 힘을 잃고 무너졌다. 반구가 산산이 깨져 나간 것도 그 시점이었다. 서둘러 달려 나간 란드와르는 소용돌이 반대편에서, 온 힘을 다해 외치는 요정을 발견했다. 벤트레스였다.

"―이봐, 늙은이! 일드얀을 죽여! 돌아가면 그 작자부터 죽이란 말이야!"

*   *   *

클렘은 자신의 머리를 쓰는 일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머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잘 알았다. 누구든 머리가 꿰뚫리면 죽는다.

실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정수리를 노릴 수 있었지만 손이 미끄러운 탓에 방향이 약간 어긋났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 번을 쏘고서야 겨우 늙은이가 죽었다. 저게 호수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몰라도, 깊이 잠겨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죽었을 것이다.

클렘퍼러는 옆에 있던 보라색 반구가 깨지면서 이상한 남자와 마타치치가 달려 나오는 모습까지 살핀 다음 총을 내려놓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셋이 엮여 있는 모양이었다. 늙은이가 저 둘을 가둔 걸까? 클렘은 이게 무슨 일일까 상상해 보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은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것뿐이었고 거기에는 다른 사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죽인 것도 아니었다. 벨레다는 말을 잘 들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똑똑할 필요는 없으니까 시킨 일만 잘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시킨 일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뒷처리를 하러 온 것이다. 길을 열지 말라고 했는데 열었기 때문에. 어차피 통로에 남아 있으면 어둠에 먹혔을 테니까.

죽으면 말이 없으니 누가 길을 열었는지도 이야기하지 못할 터였다. 노인은 죽었다. 이제는 벨레다가 깨어나기 전에 통로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클렘은 종이 구체를 손바닥에 띄우고서 입을 열었다.

"나 아까 있던 곳으로 갈래."

하지만 응답이 없었다. 공간 번호를 불러 보아도, 다른 지시를 내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클렘은 그만두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까지만 해도 곳곳에 뼈와 부종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잘 가꿔진 잔디밭만 있었다.

고개를 들자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점점이 떠가는 섬들이 보였다. 이것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어떤 것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뻗으면 가득 찰 크기였고 어떤 것은 그것보다도 더 작았다. 그 아래의 바닥을 향해 폭포수를 쏟아내는 것도 있었다. 예뻐서 좋았다. 아까 전처럼 땅이 입을 벌리지도 않으니까 조금 더 앉아 있어도 괜찮을 듯했다.

벨레다한테 혼날 게 무섭긴 했지만 말을 잘 해 보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안 열어줬으면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이모랑 이상한 남자도 구해 주었다. 그 둘한테서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을 마친 클렘퍼러는 인간 소녀의 목에 손을 얹었다. 말라붙은 핏가루가 흙먼지처럼 까슬까슬하게 달라붙었다. 여자애가 숨을 쉴 때마다 목뼈가 작은 새 날개처럼 달싹였다.

새를 가지고 싶어서, 날아다니면 못 가지니까 쐈던 적이 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새는 주워들자마자 바로 죽었다. 그제야 자신이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총에 흥미가 떨어진 것도 그때였다.

클렘은 방아쇠를 잠근 다음 왼쪽 눈으로 총구를 들여다보았다. 빛이 그곳에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마력 갈래였다. 영영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총을 못 쓴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이다. 마지막 사격은 마음에 들었다.

"클렘퍼러!"

낯익은 목소리에 클렘은 막대기를 내던지고서는 앞을 보았다. 주황색 머리를 한 요정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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