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08화 (209/258)

208화 쉬운 사냥감 (2)

"이봐, 아까 전에는 살려만 달라고 빌더니 갑자기 그러기인가?"

"들을 필요 없다! 저 미치광이부터 죽여라!"

터질 일이 터졌다. 첼리비다케의 생각이었다. 미궁 각인의 좌측 하단이 뚫리면서 따로 격리해 두었던 신관들이 쏟아져 나왔고, 벤트레스는 냅다 몸을 뺐다. 그 과정에서 블리스키미르도 정신의 감옥에서 풀려나 동료들과 합류했다.

"머리 하얀 청년, 우리 천사님이 그러시는데 늑대인간 쪽도 바쁘다는군. 둘이서 그 많은 요정들을 소탕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지. 도움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됐어."

"댁이야말로 뭐라도 해 봐요! 아까 전에는 바닥에 실컷 피칠갑을 하더니!"

첼리비다케는 그렇게 외치면서 방벽을 펼쳤다. 사방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따로 얽어 놓은 공간을 지나며 힘을 잃었지만 몇몇은 오히려 합쳐지면서 위력이 증폭되기도 했다. 보통의 것보다 세 배쯤은 굵어 보이는 피의 창이 방벽을 부수며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는 즉시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곧게 펴고서는 서로 교차했다. 피의 창은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사라지더니 미궁 각인이 있던 곳에서 튀어나왔다. 벤트레스는 신관 한 놈의 머리통이 날아가는 장면을 즐겁게 감상했다.

"하는 걸 보니 내가 도와줄 필요도 없겠는데. 아까 각인을 새길 때 공간 마법으로 자네 앞이랑 저쪽을 이어 놓은 거지? 그래서 주문이 저기에서 튀어나온 거고?"

"아니, 뭐라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발 닥쳐요!"

대답처럼 휘파람을 분 벤트레스는 남은 영혼 파편의 수를 확인했다. 신관들을 처음 맞이할 때 다섯 개를 썼고, 블리스키미르에게 정신의 감옥을 거느라 한 개를 또 썼다. 마지막 하나가 남은 셈이었다. 좌측 하단에 몰아넣은 요정들의 머릿수는 열일곱. 거기에서 하나가 빠졌으니 열여섯. 계산이 얼추 맞았다.

"말이 너무 심하군 그래. 나한테도 입이 있고, 입이 있으면 고함을 질러야 하는 법인데. 쿠벨릭, 내가 마법진을 어디에 그려 뒀는지 기억하지? 아까 전처럼 그 공간을 저놈들 발밑에 불러낼 수 있나? 재활용을 해야 할 것 같거든."

"가능해요!"

대답과 동시에 전환 주문이 시전되면서 신관들의 발밑에 거대한 문양이 나타났다. 미궁 초입에 설치해 둔, 대규모 혼란 마법진이었다. 벤트레스의 어깨 둘레에 떠올라 있던 영혼 파편이 기다렸다는 듯 타올랐다.

"헛소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쓸모가 있긴 있군요."

첼리비다케는 환각에 휩쓸려 휘청거리는 요정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별 선물로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벤트레스는 신경질적인 동료에게 해맑은 웃음을 건넸고, 뒤편을 힐끔 보았다. 블리스키미르를 처음 잡아왔을 때 생겨난 균열은 벌써 사람 한 명 크기로 자라나 있었다. 몸을 밀어 넣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수고하라고."

"무슨 소립니까?"

"미리 이야기하지 못한 건 미안하다고 말해 두지. 나도 아까 전에야 겨우 깨달았거든. 1교구 소속이었던지라 3교구 제사장 얼굴을 볼 일이 도통 없었지 뭐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벤트레스는 인사하듯 손을 흔들고서는 균열에 몸을 던져 넣었다. 당혹스러울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보랏빛 틈은 요정을 집어삼키자마자 일렁이듯 사라졌다. 뒤따라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저 안에 들어가서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첼리비다케는 잠깐이라도 저 미치광이에게 기대를 건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혼란의 효과도 끝나 가는지 신관들도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하나뿐인 기회를 낭비한 것이다.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첼, 울지 마요. 또 이렇게 겁을 먹다니. 지켜 준다고 했잖아요."

농담처럼 포근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첼리비다케는 쿠벨릭의 품에 안긴 채로 생각했다. 지켜 준다고? 어떻게? 물론 로야페타에서 실수를 저질러서 쫓길 때도, 세카두 수도원에 잡혀갔을 때도 도망칠 길을 만든 건 너였지만…….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나만 살려요. 내가 다 죽이고 올 테니까."

쿠벨릭의 입술이 첼리비다케의 이마에 닿았다. 새가 꽃잎을 쪼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   *   *

전쟁의 마지막 때에, 인간들이 요정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무신은 이시 타브의 영토로 들어가 신을 보았다. 이에 이시 타브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바닥에 무릎 꿇었다.

"지고하신 분께 그간의 오만을 사죄드립니다. 그러나 감히 청컨대, 제 목숨을 이곳에서 앗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정이 인간들에게 가혹한 주인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허나 만일 요정들이 모든 신을 잃는다면 주인과 노예가 뒤바뀌기만 할 것이므로 세상에는 여전한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요정이 인간의 살점을 먹었듯이 인간은 요정의 피를 뽑을 것이며, 요정이 인간의 충성심을 이용했듯 인간 또한 요정의 너그러움을 이용할 것입니다."

"너는 제국의 역사가 부끄럽지 않으냐?"

무신의 일갈에 이시 타브가 막힘없이 답했다.

"인간들의 신이 인간의 사정만을 알듯이, 저는 요정을 돌보므로 요정의 사정만을 압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에게 잘못한 것이 많으나 앞으로는 인간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므로 그 전에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비겁자라 질타하더라도 그저 듣겠습니다. 본디 무언가를 아낌이란 다른 것에 대해 비겁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신은 깊이 고민했고, 이시 타브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요정은 본디 날 때부터 강력하며 오래 사는 존재이므로 그 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인간에게는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시 타브에게 몸을 버리고 영토에 잠들어 있을 것을 명했고, 이시 타브는 그 말을 받들었다.

이로써 대전쟁이 끝났으나 이시 타브는 염려를 내려놓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여덟 별이 있었으나 요정에겐 하나뿐이었으며, 슈문 또한 동족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궁전에는 제국의 모든 지혜가 있었으므로 그것이 인간들에게 넘어간다면 언젠가는 요정이 인간의 노예로 전락하는 날이 올 것이었다.

이때 이시 타브의 아들은 영토에 갇힌 채 나무를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 나무는 깨진 단검의 반절을 영토에 심자 자라난 것으로서 약스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시 타브가 가지에 영혼을 매달 때마다 약스체는 점점 크기를 키웠고, 이제 영토 대부분을 덮게 되었다.

나무를 살피던 이시 타브는 아들을 불러내 물었다.

"너는 단검을 만들었으니 이 나무가 지닌 힘 또한 알 것이다. 말해 보아라."

"꿈 조각은 본디 저승에서 온 것으로서 땅을 다스리는 힘이 있는데, 저희 반신들이 세공한 후 그 반절이 이곳에 심겨 나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몸통과 가지는 본디 만들어진 대로 영혼을 거두어 모으지만 뿌리에는 세 곳을 하나로 묶어 오가는 힘이 있게 됩니다."

"그 뿌리가 슈문의 영토에도 뻗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긴 꿈에 들기 전에, 이시 타브는 아들과 나무에 모인 넋들을 슈문의 땅으로 보냈다. 슈문은 싸움에 능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지켜내는 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땅의 사람들과는 소통을 멈추게 되었다.

*   *   *

"돌아오너라! 이제 됐다!"

*   *   *

파편적인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출렁였다. 일단 한 대 얻어맞자 통증 덕분에 버튼이 눌렸고, 그 후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싸웠다. 이젠 다 끝났나보지. 란드와르는 강렬한 현기증 속에서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됐… 다."

그는 서둘러 발을 빼고는 뒤로 물러났다. 곧 보랏빛 소용돌이가 이 일대를 뒤덮을 터였다. 통제력을 잃은 힘이 마지막 발악 삼아 주위의 사물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래도 떨어져 있기만 하면 문제는 없다. 스스로 움직이지는 못하니까.

잔디밭에 발을 올려놓자 요정 놈이 말을 붙였다.

"씻을 물이라도 만들까요?"

"이 새끼야, 넌 대체 나를 뭐로 보는 거냐.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서 목욕을 하겠냐고."

보랏빛 눈이 빤히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지금 속으로 욕하고 있지?"

"예."

"많이 해라. 입으로는 하지 말고."

품에 손을 밀어넣자마자 란드와르는 직전의 대화를 후회했다. 체면이고 상황이고 간에 샤워가 시급했다. 온몸이 점액질로 엉망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목함은 무사했고 시가에도 불이 잘 붙었다.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재가동 절차를 마친 슈문은 찌꺼기를 불태우고 외부 미궁도 빠르게 복구할 것이다. 그러면 클렘퍼러와 벨레다의 행방도 알 수 있겠지. 첼리비다케 쪽도 어떻게든 살아남은 것 같으니까… 중간에 잡음이 많았던 것치고는 무탈하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시뮬레이션보다 이른 시점에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우두머리의 반응이… 다소 비정상적입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상세히 조사한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편 전투 과정에서 신앙심이 다량 소모된 관계로 삼십 분간 권능 사용이 제한될 예정입니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투가 꼭 물탱크 청소에 따른 단수를 예고하는 아파트 경비실 같았다. 뭐라도 더 물어 보려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남 기분을 긁어 놓고 도망가는 솜씨가 벤트레스 수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를 못 들었는데.

슈문의 영토 바깥으로 나갔을 리는 없으니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란드와르는 놈이 눈앞에 나타나면 반드시 죽여 놓으리라 다짐했다. 아니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발이라도 잘라 놓거나.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맛이 간 놈이었다.

그는 분노를 삭이려 애쓰면서 잔해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군 프라이팬에 올려둔 버터 조각을 보는 듯했다. 시야를 가리던 덩어리가 크기를 줄이고, 뒤편의 풍경이 넓어지면서…….

"저거 뭐냐?"

신관 제복을 입은, 늙은 요정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한 명뿐이었다. 란드와르는 다른 요정 셋을 바라보았다. 마타치치와 헤이딘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테네브로즈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나트람입니다."

나트람? 나트람도 본대를 이탈해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혼자서 미궁을 뚫어 나가다가 갑자기 벽 속으로 사라졌다고. 와그다스 마법에도 뛰어난데다가 십육면체까지 알고 있던 놈이니까 그대로 오염지대까지 직행했다 쳐도 이상하진 않다. 능력은 충분하다.

아니, 그런데, 왜? 이왕 올 거면 다른 요정들까지 데려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혼자 나타난 이유가 뭐지? 소용돌이를 밟고 있는데 멀쩡한 이유는 또 뭐야? 유예 상태로 남아 있던 물음표 더미가 란드와르를 습격했다. 사안의 경중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했다. 일단 나트람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적이었다.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놈이 소용돌이 안에 있는 이상 자신이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전사는 근접 공격수였던 것이다.

그는 뭐라도 해 보라는 투로 헤이딘을 보았다. 유령의 입이 열렸다.

"그럴 리가. 형님이 나이가 많긴 해도 저렇게까지 늙진 않았어."

비언어적 소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테네브로즈가 눈치 없이 말을 받았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어르신 눈이 사라진 게 적어도 서른 해 전이고―"

거기까지 답한 순간 노인의 오른팔이 쭉 뻗더니 테네브로즈를 가리켰다. 검지에서 시작된, 거대한 보라색 광선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누군가의 몸에 원형으로 구멍이 나는 장면을 직접 관람하는 건 처음이었다. 입으로 피분수를 뿜어낸 요정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모든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테네브로즈는 지혜의 고리로 변했고, 보이지 않는 힘이 헤이딘을 잡아채 공중으로 들어 올렸으며, 땅에서 솟아 나온 보랏빛 마력이 반구 형태로 모였다. 란드와르와 마타치치가 그 안에 갇혔다. 그는 방벽을 부수기 위해 망치에 권능을 실어… 지지가 않았다.

"이게 왜 안 되지?"

몇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티아의 통보가 떠올랐다. 싸우는 동안 신앙심을 너무 많이 썼다고 했지. 덕분에 권능은 삼십 분간 단수 상태였고 머릿속의 관리실은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마타치치의 손대포로도 뚫리지가 않았다.

란드와르는 강렬한 두통을 느끼며 방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보라색 셀로판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 세상은 소용돌이와, 소용돌이 위에 선 노인과, 마력 갈래에 사로잡힌 채 괴로워하는 유령 소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리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지만 헤이딘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즈리온의 화신은 내팽겨 두고 자기 동생이랑 면담을 하고 있다는 거지. 명색이 명문가 가주에 전직 제사장인 양반이. 슈문의 무의식 한복판에서. 혹시 본대에서 이탈한 것도 이것 때문인가? 부하들 앞에서 이 짓거리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란드와르는 정황을 잘 조합해서 논리적인 해설을 구축하려 애썼다. 불가능했다. 그는 단념하고 마타치치에게 말을 건넸다.

"저거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죠?"

이 상황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요정 학자도 똑같은 사고과정을 거친 듯했다. 마타치치는 한참을 굳어 있다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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