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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06화 (207/258)

206화 파괴된 사나이 (8)

테네브로즈는 별불꽃의 식객으로 몸을 의탁한 후 줄곧 숲지기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유리창이 가을 한 자락이 지나가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햇볕은 금방 사라지고 엉킨 나뭇가지들이 덩어리째로 검게 물들었다. 때는 무월(霧月) 중순에 접어들어 오후 나절이라도 미지근한 기운만이 감돌 무렵이었다. 사르코 부부의 죽음이 거의 확실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나트람은 자신이 혐의를 피했다는 사실에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더 나아가 그 일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테네브로즈 역시 황무지에 다녀와 보고를 올린 후로는 사르코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는 나트람이 이상하게 굴 때에는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지혜의 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탁자 한가운데에 장식된 환영 그림을 바라보았다. 전통 복식을 입은 소년이 풀밭에 누워 졸고 있었다. 한 달여 전, 즉 과월(果月)과 포월(葡月) 사이의 연휴 주간에 평민 거주구에서 사온 싸구려였다. 마력 결정을 다 써 가는지 이따금 안개가 끼듯 환영이 흐려졌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창밖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테네브로즈는 어둠이 환영 그림의 녹색으로 물들도록 내버려두었다. 문이 열리면서 바람 소리가 거세질 때까지도 그는 등불을 키지 않았다. 나트람이 한 손에는 병주둥이를 쥔 채로 문간에 들어서고 있었다. 목에 무언가가 묻은 듯 얼룩덜룩했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말도 없이 찾아오시다니요. 언질을 주셨더라면 제가 직접 본가로 갔을 겁니다."

넌지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테네브로즈는 창가로 향했다. 천장에 설치된 마력 등불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암막 옆의, 두꺼운 밧줄을 잡아당겨야만 했다.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어째서 네놈이 여기에 있지? 헤이딘은… 어디에 있는 거야?"

"작은 어르신이야 본가 어디쯤에 있겠지요."

헤이딘이 감금당해 있다는 것은 하인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건 테네브로즈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동생을 가둔 장본인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취하셨습니까?"

"아니―완벽히 제정신이야. 아직까지는. 불을 밝힐 필요는 없어. 잔을 꺼내와. 그리고 앉아."

대답은 한 박자 늦게 왔다. 테네브로즈는 한 손에 밧줄을 쥔 채로 멈췄고, 나트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과 머리카락은 멀리로 물러나 어둠과 일체가 되어 버린 듯했고 뺨과 코의 윤곽만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둘은 한동안 그 상태로 굳어 있었다.

나트람이 먼저 시선을 거두고서는 탁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테네브로즈도 시킨 대로 했다. 잔이 강줄기 한가운데에 세워진 말뚝처럼 환영 그림을 가로막았다. 빛이 양옆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탁자 밑으로 떨어졌다. 나트람은 연거푸 두 잔을 비운 뒤 중얼거리듯 운을 뗐다.

"딤 나겔을 만나고 왔다. 딸 이야기를 했지."

테네브로즈는 그제야 가주의 목에 생겨난 얼룩의 알아차렸다. 보랏빛 손자국이 목울대 바로 밑에서 엄지를 맞대고 있었다. 피송곳니 장원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가늠해보는 동안 의기소침한 문장이 두런거리듯 이어졌다.

"목을 실컷 조르더니 죽이지도 못하지 뭐야… 귀족 주제에……."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전에 만들어둔 주문을 썼지. 실제로 사람에게 쓴 건 처음이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끔찍하더군. 하지만 나는 계속 살아야만 하니까… 죽을 수는 없어. 아니, 이 말은 잊어버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어쨌건 그렇게 됐어."

"딤 나겔을 죽인 겁니까?"

"그건 아니야…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없어야 해."

나트람은 짧은 숨을 들이쉬었고,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못 죽인 지 벌써 여덟 해가 됐어. 부제사장이 직접 제물을 마련할 자리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겨우 참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 직분을 버틸 수가 없었어……."

기쁨이라고는 없는 울림을 뒤로 하고 어둠이 속도를 냈다. 그것은 장마철에 불어난 강물인 듯 빠르게 흐르며 소리를 멀리 치워 보냈다. 환영 그림이 발작적으로 떨더니 나트람의 시선이 탁자 가장자리에 밀어 둔 지혜의 고리로 향했다.

"저건 뭐지?"

"장난감입니다. 줄을 움직여서 구슬 두 개가 한쪽에서 만나게 하면 되지요."

"그림과 같이 산 모양이지. 줘 봐."

시큰둥한 태도로 사각판을 만지작거리던 나트람은 이내 조소를 흘렸다. 보이지 않는 힘이 사각판의 양옆을 잡고 비틀다가 아예 부숴 놓았다. 조각이 투둑 소리를 내며 탁자로 떨어졌다.

"네놈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치고는 영리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협잡꾼에게 속다니 실망스럽군. 이건 그냥 하찮은 속임수야. 어떤 방법으로든 줄만을 움직여서는 구슬을 옮길 수가 없어. 정답이 있을 거라는 망상 속에서 무의미한 일을 반복할 뿐이지―태워 버려. 저딴 물건을 한 번만 더 샀다가는 내가 직접 네놈을 죽일 테니."

"취하셨군요. 장난감이 언짢다고 목숨을 앗으려 하시다니요."

나트람은 탁자에 팔꿈치를 얹은 채, 이마를 괴고 파편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다시 올라가며 테네브로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검은 눈 아래에서 태울 것 없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러고 보면 네놈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군."

"제가 술을 입에 대면 어떻게 되는지 저번에 보셨을 텐데요."

"마셔."

"어르신께서 즐기는 건 특히 독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명령하는 쪽은 나야. 목을 꺾어 놓기 전에 시키는 대로 해."

거친 으르렁거림이 귓전을 쳤다. 한참을 망설이던 테네브로즈는 한 호흡에 잔을 비웠다. 나트람은 그가 정신을 잃고 탁자에 얼굴을 파묻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잠들고 싶지 않아. 그랬다가는 모두 잊어버릴 거야. 딤 나겔이 했던 말은 물론이고 내가 네놈에게 이랬다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겠지.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해 두어야겠군. 이 탁자 위에 널브러진 조각들이 바로 내 평생이야. 싸구려 장난감 같고 협잡 도박판 같은 것이지. 한두 판쯤은 좋은 패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고, 정말로 원했던 걸 얻으려거든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 말이야.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때까지도 환영 그림은 곧 숨이 끊어질 병자처럼 깜빡이고만 있었다. 나트람은 그걸 깨 부수고서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건조한 어둠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오더니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밤의 복판에서 중얼거렸다.

"됐어, 난 이 깨달음까지도 잊어버릴 거야. 다시 먼 길을 돌아가는 거지."

*   *   *

본가로 돌아간 나트람은 이틀 밤낮을 더 깨어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던 시간만큼이나 긴 잠을 잤고, 아무렇지도 않은 삶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사람들은 나트람에게서 유약한 면모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나운 성정 사이에 섞여 보이던 무기력증이나 우울 따위는 이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결심한 게 분명하다고 믿게 되었다. 부제사장보다도 더 높은 직분에 마음을 두게 되었으리라고. 나트람 또한 자신의 변화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호사가들은 딤 나겔의 머리가 하루만에 하얗게 센 일을 그의 딸과, 사위와, 사촌형제와 연관짓곤 했다. 그 셋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사르코의 반려가 별불꽃 장원을 방문하고서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황무지로 가는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 나트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딤 나겔과 나트람이 어떤 식으로든 달라졌기 때문에.

*   *   *

벨레다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를 악물었다. 나트람을 죽이는 상상을 수만 번은 했는데 정작 다시 만나고 보니 이 꼴이 된 것이다. 하긴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인간이랑 요정 꼬마가 전직 제사장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탄은 모두 막혔고, 이제는 <차원 분리>로 벌어 놓은 기회까지 날리고서는 붙잡혀 있었다.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트람은 벨레다가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을 열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벽 너머로 가는 길 말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절대 열어주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 늙은이가 하려는 게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나는 너희와 다툴 마음이 없다. 기실 죽이려면야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지. 길을 연다면 해코지하지 않으마."

"별채에서는 그렇게 괴롭혔으면서!"

물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슈문의 가호는 둘의 영혼을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으로부터 지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을 헤집는 종류의 주문으로부터. 정신 지배가 들어먹히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길을 열려면 둘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더라도 협박뿐일 테고.

만약 정신 지배가 효과를 발휘했더라면 먼저 클렘이 죽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마법에 걸렸겠지. 인간의 영혼으로 요정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정말로 위험한 건 자신이 아니라 클렘이었다. 벨레다는 눈동자만을 흘겨 요정 꼬마를 살폈다. 짓눌린 개구리처럼 엎드린 채, 멀리 떨어진 총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린 인간아, 나는 네게 잘해주었다. 치워 없애고 싶은 걸 수없이 참았단 말이다."

참을 수 없는 헛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진심인 듯했다. 이게 진심이라고? 벨레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컥 짜증을 터뜨렸다.

"안 죽였으니까 잘해준 거라고? 그게 잘해준 거야? 애초에 그렇게 싫었으면 왜 십 년씩이나 살려 뒀는데?"

"내 동생은 오래전에 기억이 멈춰 있었다. 움직이는 박제 같았지. 도무지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았어. 이미 죽은 걸 다시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박제가 갑자기 생명을 되찾더구나."

"뭐?"

"헤이딘을 되살린 것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녀석의 목숨을 거두는 건 내 몫이었다. 평생토록 참아 왔지만 어쨌든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지. 그런데 애완동물 따위가 그 기회를 훔쳐 간 게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해 보거라―그놈이 네게 죽여 달라고 시켰나? 찌를 때에는 어떤 기분이었지? 놈이 비명을 질렀어? 어떻게 했어? 피는 얼마나 나왔지?"

이 작자는 도대체 뭐가 문제지? 동생을 싫어한다는 건 알았고, 제정신이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이제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벨레다는 나트람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속박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마력 갈래를 다룰 줄만 알았더라면 스스로 구속을 끊어냈겠지만 그녀가 쓸 수 있는 주문은 한정되어 있었다. 일단 <수호 영역>은 피해를 막아줄 뿐이지 이런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공간을 다루는 종류의 마법도 비슷했다.

도움이 될 주문은 <차원 분리>가 유일했다. 다시 시전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지만, 어쨌건 쓰기만 하면 나트람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한테 써야 하지? 스스로에게? 아니면 클렘에게?

생각을 뻗어 보려는 찰나 목덜미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칼로 저미는 듯한 아픔이었다.

"죽이겠다 이거지? 길을 열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상관 없다. 조금 더 걷는 게 귀찮을 뿐이야… 편한 쪽을 택하려 했더니 애완동물을 죽이게 되었구나."

맙소사, 이제 보니 처음부터 계산이 틀린 모양이었다. 저 성격 나쁜 늙은이가 협상을 시도하기에 자신 쪽이 마냥 유리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별채 이야기가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에서 피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냥 길 열고 거기로 도망쳐! 이 늙은이가 못 들어가게 해!"

벨레다는 클렘에게 차원 분리를 시전했고, 크게 외쳤다. 어차피 이 통로 안에 남아 있는 이상 나트람에게 붙잡히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반면 벽 너머로 이동한다면 놈을 따돌리는 게 가능했다. 점액질이나 바닥에서 나타나는 입 따위가 수상쩍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잔디밭은 안전해 보였으니까…….

*   *   *

몸부림치던 클렘은 온몸을 짓누르던 기운이 단번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클렘퍼러는 벌떡 일어나서 총을 움켜 쥐었고, 이상한 요정 늙은이를 향해 쐈다. 이번에도 모두 막혔다. 늙은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남의 죽음을 헛되이 버리는구나. 인간 영혼이라도 제물로 쓰려면 쓸 구석이 많거늘."

"벨레다 벌써 죽었어?"

벨레다는 여전히 공중에 걸려 있었다. 눈이 감겨 있었고 피도 많이 났다.

"아직."

"내가 길 열어 주면 안 죽일 거야?"

"어차피 곧 죽을 게다."

클렘퍼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벨레다의 목덜미에 시선을 맞췄다. 핏줄기가 시작되는 곳 약간 아래에서 목걸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재정렬 주문이 걸려 있어서, 저걸 끊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바로 살아난다고 했다. 목만 안 잘리면 됐다.

"나도 죽일 거야?"

"아무 관심도 없다. 너는 길만 열어 주면 돼."

"내가 길 열어 주면 벨레다 목 안 자르고 갈 거야?"

"주검이야 온전히 남겨줄 수 있지."

"그럼 길 열어 줄래."

종이 구체를 받쳐 든 다음 아무 방 번호나 부르자 벽이 양옆으로 벌어지면서 전혀 다른 장소를 드러냈다. 늙은이는 마력 갈래를 모두 거두고는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벨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클렘은 단 둘이 남자마자 벨레다에게 달려갔다. 목걸이 줄은 쉽게 끊었고 혈색도 돌아왔지만 눈은 뜨지 않고 있었다. 기절한 건 안 고쳐주는 모양이었다. 주기도 어느 새 끝나 있었다.

"마탄 이제 다섯 칸이야. 내가 아까 전에 네 발 썼으니까―다섯 발인가? 잠깐, 그러니까… 모르겠어. 주기가 언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고 여기가 없어질지 안 없어질지도 모르겠어. 너 안 일어나면 우리 같이 죽어. 그러니까 안 일어나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거기까지 말한 클렘은 고개를 돌려 나트람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그때까지도 벽은 열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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