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205화 (206/258)

205화 파괴된 사나이 (7)

벨레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복구 절차에 된통 휘말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바닥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허공에서는 표범이 불쑥 나타나는데다가, 발을 내딛자마자 천장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그 근처를 벗어나자마자 이상 현상은 멈췄지만 다른 곳이라고 해서 편히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참을 도망 다닌 끝에 벨레다는 규칙을 이해했다. 일단 거점이 되는 큰 방들이 여러 개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통로가 뻗어 나갔다. 일곱 개의 다른 방과 연결된 곳이 있는가 하면 이어진 길이 하나뿐인 곳도 있었다.

그리고 공간은 주기적으로, ‘불건전한’ 거점들을 골라 그 방과 거기에 연결된 통로들을 지워 없앴다. 기준은 크게 셋이었다.

첫째, 고립되어 있는 경우. 출입로가 하나뿐이거나 아예 없는 거점들이 여기에 해당됐다. 공간 구현에 낭비된 힘을 회수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둘째, 이상 현상이 극심한 경우.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바닥이나 투명한 벽 따위가 있는 거점, 위아래가 뒤바뀐 거점 따위가 여기에 해당됐다. 오류는 당연히 잡아내야지.

그리고 셋째, 표범이 너무 많이 돌아다닐 경우. 이것도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시 타브의 수하가 많을수록 오염률이 높아질 테니까.

조건은 명료했다. 문제는 방이 얼마나 있는지도, 그중에서 현재 거점이 몇 번째로 불건전한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이쯤이면 괜찮겠지, 하고 안심했다가 어둠에 빠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기가 닥쳐올 때까지는 끊임없이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거점을 찾아야 했다…….

"몇 발 남았어?"

벨레다의 질문에 클렘은 기다란 저격총의 주둥이를 쥐고서는 손잡이 부분에 시선을 맞췄다. 빛으로 표시된 눈금이 남은 마탄량과 다음 재충전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하고 있었다.

"한 칸 남았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하나 더 충전돼."

"보자, 저번 주기가 끝났을 때 두 칸 남아 있었지. 지금까지 허공에 쏜 게 다섯 발이고 확인용으로 여섯 발을 더 썼으니까… 곧이네!"

거점이 소멸하는 주기는 마탄이 완충되는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게다가 마탄은 건전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발을 들여도 될까 긴가민가할 때에는 일단 마탄을 쏘고 봤던 것이다. 허공을 지나는 동안 황금색 마력 갈래가 왜곡되어 나타나면 문제가 심한 공간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반면 원래 목적으로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표범은 불쑥불쑥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거나, 성가시게 근처를 맴돌긴 했지만 먼저 덤벼들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 놈들까지 상대해야 했다면 진작 죽었을 테니까.

"저번 방에 가 있자. 거기가 제일 멀쩡했으니까."

빠르게 판단을 마친 벨레다는 직전에 지나왔던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클렘이 잠자코 따라왔다. 주기가 시작된 건 다른 거점에 발을 들인 직후였다.

멀리서부터 진동이 가까워지더니 거점과 연결된 통로 다섯 개 중 셋이 서로 다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 과정에서 인근의 벽들도 재구축을 겪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사암질이 추상적인 격자 평면으로 변하는 장면은 급진적인 환영 예술을 연상시켰다. 좋게 말해 준다면 그랬다.

나쁘게 말하면? 실패한 연극 배경 같았다. 놀라거나 감탄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똑같은 일이 반복되니 이젠 심드렁했다. 벨레다는 시간이라도 때울 요량으로 클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섭진 않아?"

"몰라."

"모른다고?"

"생각 안 해 봤어."

클렘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없으면 겁도 없어지고 걱정도 없어지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한 사람 몫은 제대로 해내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벨레다는 카스바 뒷골목에서의 만남을 아직 잊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짓을 벌이는 애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려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학자들처럼 연구에 매진하거나, 사무원이 되거나, 타일라프람에서 각인소를 차리는 삶. 평온하고 무탈한 시간들. 클렘은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을 조각 같았다.

"그러면 나중 일은 생각해 봤어? 나르시소에 남을지, 아니면 인간 세상으로 갈지 하는 거 말이야. 이모한테 이야기 들었을 텐데……."

"계속 여기 있을래."

"나르시소에 남겠다는 거지?"

클렘은 고개를 돌려 벨레다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요정 꼬마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기계 장치의 작동음과 섞이며 묘한 박자로 울렸다. 내용은 더 묘했다.

"나르시소도 싫고 인간 세상도 싫어. 다들 나한테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짜증을 내거든.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뭐라 그래. 나도 잘 하고 싶은데 총 쏘는 거 말고는 잘 하는 게 없어. 난 그거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서 여기 있고 싶어."

"잠깐만, 총쏘기를 안 좋아한다고?"

연구에 소질이 없어서 나르시소가 싫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부 머리가 되는 애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의아하기만 했다. 카스바에서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더더욱 그랬다.

"해야 돼서 한 거야. 안 해도 되면 안 하는 게 좋아."

"왜?"

"예전에 새가 가지고 싶어서 총으로 쐈는데 죽어 버렸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해.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보통 안 좋은 거야."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헤이딘과 함께 지내면서도 놀란 적이 많았다.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진 않았던 것이다. 자신도 거기에 영향을 받기야 했지만 그 사고방식을 온전히 이해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카스바에서는 죽이려 했잖아!"

"외부인이 막 들어오면 안 돼. 야스와다 요정들도 인간들도 우리랑은 사이가 안 좋아. 그래서 막은 거야."

표정을 보면 이것까지도 진담인 듯했다. 벨레다는 이 요정 꼬마에 대한 판단을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두뇌회전이 느리고, 융통성도 없고, 마냥 착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최소한 비열하진 않은 애. 옆에 둬도 괜찮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러면 나랑 같이 다닐래? 스승님은 네 이모한테 맡겨 두고, 난 따로 사업을 해 볼까 싶거든. 산골짜기에 박혀 살기엔 내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본금도 충분하고, 인맥도 쌓았고, 이번 일로 이름값까지 생기면… 참, 이렇게 말해 봐야 모르겠구나. 장사를 할 거야. 그래서 로야페타에 제일 큰 건물을 세우고 개인용 주차장에는 최고급 수레를 가득 채울 거라고."

"난 장사하는 법 몰라."

"아니, 그런 걸 도우란 말은 아니야. 운전사 겸 경호원 자리가 비어 있다는 거지."

동업자와는 별개로, 바로 옆에 끼고 다닐 사람은 조금 멍청하고 우직할 필요가 있었다. 장부를 빼돌려서 경쟁자에게 가져다 바치진 않을 놈들 말이다. 카스바에서는 1호에서부터 5호까지가 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로야페타에서 새 출발을 하려면 이력이 깨끗한 부하가 필요했다. 녀석들 중 셋은 도시 연합에 수배령이 걸린 데다가 다른 둘도 훌륭한 삶을 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클렘은 여건이 꽤 좋았고, 상징성도 충분했다. 요정을 부하로 쓰는 아즈리온의 동료. 완벽한 그림이지.

"어려운 일을 시키진 않을 거야. 말만 잘 들으면 된다구."

벨레다는 시간을 들여 직업 소개를 읊어 주었다. 자신은 수레를 몰기에는 키가 작지만, 클렘은 한참 더 자랄 테니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도.

"난 인간 도시 길도 몰라. 카스바 말고는 안 가봤어."

"외우면 되지! 미궁 설계나 공간 마법보다 훨씬 쉬워. 구시가지 도로들은 조금 복잡하긴 한데, 재건축되는 쪽은 길이 곧게 닦여 있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클렘은 처음 사탕을 먹은 아기처럼 눈을 깜박였다. 낯선 행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는 모양새였다… 아니면 그냥 제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운전하면서 총을 쏴서 돈을 버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무서워하니까?"

하는 말을 봐서는 후자인 듯했다. 벨레다는 참신한 오해에 혀를 내둘렀다. 운전사와 경호원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 강도질을 연상하다니 상상력이 범죄적인 쪽으로만 잘 뻗어가는 애였다. 겪은 인간 도시가 카스바뿐인 탓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상식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빼야 할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경호원이랑 운전사는 다른 일이야. 날 수레에 태워서 다른 곳에 데려다주는 건 운전사 일. 그리고 상대가 허튼 짓을 못 하게 뒤에서 째려보는 건 경호원 일."

"그게 다야? 째려보기만 하면 돼?"

"물론 가끔은 싸워야겠지. 그래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거야. 카스바에서는 거래처를 만나러 갔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로야페타는 그 동네보다는 훨씬 신사적이거든.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을 죽이면 바로 치안대가 달려온다고. 와서 죽인 쪽을 잡아 가."

"그러면 경호원이 왜 필요해? 치안대가 있잖아."

"혹시 모르니까. 세상엔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숫자나 계약서나 약관으로 장난질을 하려는 놈들도 있고. 그래서,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 사람이 날 지켜 준다! 난 이렇게 무서운 사람도 데리고 다닐 수 있다! 하고 광고하는 거야."

클렘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깜박이다가 무너지지 않은 통로를 가리켰다.

"그럼 저런 건 어떻게 해?"

시선을 옮긴 벨레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통로의 그늘을 헤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정 노인이었다. 그것도 어딘가 낯익은…….

나트람?

벨레다는 잠시 굳어 있었다. 놈이 통솔자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테네브로즈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상대가 혼자라는 사실조차도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이 전직 제사장은 아이 둘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실력자였다.

눈이 마주쳤다. 벨레다는 생각을 멈추고 외쳤다.

"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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