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파괴된 사나이 (6)
검은 머리의 부제사장과 젊은 남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차투랑가 놀이판은 정교한 마법의 소산이었다. 희고 검은 자기 조각이 맞물리며 격자무늬를 이뤘고, 그 밑에 새져진 주문 각인은 두 명의 피를 매개로 작동했다.
환영 기물은 제국 시절의 병사를 모사할 뿐만 아니라 그 행동까지도 보여 주었다. 두 기(機)의 만트리가 젊은이의 라자를 포위한 채 위협하듯이 허공에 마력 불꽃을 터뜨려 보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로로 여덟 칸 떨어진 지점에서는 괴수가 이끄는 전차가, 즉 라타 기물이 돌진할 준비를 마치고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젊은이에게는 남은 기회가 얼마 없었다. 라자의 퇴로는 대각선 지점이 유일했지만 그 경우에는 좌측에 남은 기물들을 모두 잃을 위험이 컸다. 장고의 끝은 항복이었다.
"…졌습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편은 아니로군."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는 없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
부제사장은 심드렁한 투로,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곧게 펼친 뒤 천천히 구부렸다. 포위당한 라자가 밧줄에 매달리듯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환영 제왕은 교살당하는 사형수처럼 몸부림치다가 이내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자네는 야망에 찬 젊은이고, 3교구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는 신관이기도 해. 하지만 평민 출신인 탓에 항상 진급에서 밀려나고 있지. 여기에 온 건 좋은 자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일 테고. 그러니 하나만 묻겠네. 내가 시작하자마자 라자를 죽였더라면, 항변할 수 있었을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젊은이의 낯빛이 한층 창백해졌다. 장인어른의 사촌 형제라는 관계는 혈연이 되기에는 너무 미미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딤 나겔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나트람과의 독대를 부탁했을 때, 눈에 띄게 석연찮은 기색을 보이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그런 의도로 찾아뵌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안부 인사를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단순히 예를 갖추고 싶었더라면 교구에서 굽실거리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걸세. 하지만 자네는 내 사촌에게 부탁해 별불꽃 장원에 발을 들이려 했고, 나는 그걸 허락했지. 이럴 때에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네."
젊은이는 참담한 기분이 단번에 몸을 뒤집는 것을 느꼈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었다. 그는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트람은 엄지와 검지를 튕겨 차투랑가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서른두 기의 땅 기물과 네 기의 공중 기물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도자기 격자 위에 도열해 섰다.
"훌륭한 놀이판이지."
"예, 이토록 정교한 건 처음 봅니다."
"동생이 만들다 멈춘 걸 내가 개량한 걸세. 성년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바쁠 게 없었어. 장난감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수 있었지… 이제는 거의 장식품이 되어 버렸네만."
나트람의 손짓에 기물들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환영 병사들은 주인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칼을 겨누고 마력 갈래를 이끌어내며 싸우기 시작했다.
"만트리는 각각의 차례에 한 칸만을 움직이지만, 근처 다섯 칸과 공중에 영향을 줄 수 있지. 반면 라타는 직선으로 열 칸까지를 움직이더라도 용 기수에게는 대적하지 못해. 그런 것들이 얽혀서 한 판의 승부를 만들어내지. 그건 아마도 세상사의 지극한 축소판일 걸세―우리는 모두 규칙과, 규칙 사이의 관계와, 그 역학 속에서 살아가고 있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든,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든 말이야."
"예, 그렇지요."
"하지만 그런 원칙이 언제나 준엄한 것만은 아닐세. 어떤 부모는 자식을 죽이고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빼돌려. 교구 운영은 공정해야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한 자리를 얻어내기 위해 혈연을 발판으로 삼지. 부당한 취급도 참을 각오로……."
남자의 손끝으로부터 섬세한 마력 갈래가 뻗어 나왔다. 보랏빛 줄기에 닿은 파다티 기물은 즉시 크기를 두 배, 세 배로 키우더니 포악스러운 기세로 아군과 적군을 함께 짓밟았다. 건조한 목소리가 소란 위에 얹혔다.
"그러니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일을 마법이라고 부르고 싶네. 규칙 사이의 허점과 예외를 찾아내 파고드는 작업 말일세. 나는 자네에게 내 마법을 베풀 생각이야―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주지. 대신 자네도 내게 그만한 마법을 보여줘야 할 걸세."
응접실의 공기가 삽시간에 서늘해졌다. 나트람이 요구하려는 것이 단순한 충성은 아닌 듯했다. 불안이, 단순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예감에 가까운 느낌이 심장을 터뜨릴 듯 움켜쥐었다. 젊은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부제사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흥미 삼아 새의 날개를 부러뜨리는 어린아이처럼 무감각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네. 자네 반려를 죽여."
* * *
"숨결 대신 독을 내쉬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봐. 그 사람이 호흡하는 걸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 그 사람한테 숨을 참으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내가 사람들의 주인이라면, 내가 칼린카의 목을 꺾듯 그 사람의 목도 홀가분하게 꺾을 수 있다면, 반드시 그래 줄 거야. 그게 그 사람 자신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나은 일일 거야."
* * *
사르코 부부의 결혼생활은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비대칭적인 교환이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남자는 귀족 가문의 이름을 받았지만 사르코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치고 있다며 수근거렸다. 별채에 갇힌 어둠달 청년의 이름을 입에 담는 이는 없을지라도 손님들은 언제나 신부의 망설임으로부터, 한숨으로부터, 허공에 머무르는 시선으로부터 그를 발견했다.
부부는 시종이 주인의 침실을 청소하듯 가정을 꾸려 나갔다. 같은 식탁에 앉았고 자식도 하나 보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이 아니었다. 남자는 아들을 무릎에 두고 어르다가도 이 모든 순간이 누구도 원하지 않는 소꿉놀이에 불과하다는 감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대신 매진한 교구 일에서도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는 감각이 남자를 밀어붙였다. 그는 부제사장의 제안을 의심했고, 두려워했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였다.
대화가 끝난 후 나트람은 테네브로즈를 불러 황무지에 따라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자가 사르코의 목숨을 앗아 간다면 놈을 죽이고, 아니면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남자의 행동을 기억해 두었다가 모두 읊어 달라고. 테네브로즈는 이유를 물었고 나트람은 졸린 듯 대답했다… 이유는 없어. 나는 그냥 예외를 보고 싶은 거야.
무슨 예외 말씀이십니까?
무엇은 당연하고 무엇은 당연하지 않다, 하는 말은 칼로 잘라내서 종이봉투에 포장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야. 바람에 올라타는 일에 비유하는 게 차라리 낫겠군. 강풍은 날개를 꺾지만 산들바람은 길을 이끌어. 그나저나 제일 놀라운 사실은, 수없이 많은 종류의 바람이 뒤엉키는데도, 새들은 깃털이 마르자마자 하늘을 난다는 것이지. 아주 쉽게. 덕분에 가끔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칼린카가 된 기분이 들어. 허우적거리면서 이게 어떤 종류의 바람인지 분간하려 애쓰는 거야… 내 말을 알겠나? 이해하겠어? 그랬으면 좋겠군. 네놈도 머리에 문제가 있으니까.
테네브로즈는 답하지 않았다. 강세 없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런 규칙들… 아주 변칙적이고 유연한 규칙들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매 순간마다 다른 논리가 들이닥치는데도… 됐어. 이 일에서 네놈의 역할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황무지에 가려거든 가고 고발장에 내 이름을 적고 싶다면 그렇게 해. 물론 그랬다가는 네놈도 멀쩡하진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러나저러나 사이라크가 기뻐하겠군. 메기도야 그렇다 치고 나는 첫째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어. 나를 죽이고 싶은지 내게 칭찬을 듣고 싶은지 종잡을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긴 정적이 있었다. 테네브로즈의 입이 열렸다.
저 자를 시험하고 싶다는 것만은 알겠습니다. 출세욕이 이길지, 도의가 이길지를 보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제가 따라가서 목숨을 취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딤 나겔의 딸은 무슨 잘못이 있어 여기에 얽혀야 합니까?
나트람은 답하지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별불꽃의 가주에게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는 찰나 징벌이 필요해, 하는 중얼거림이 얼핏 들려왔다. 그 말 앞에 무슨 어절이 섞인 듯도 했지만 분명치는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문간에 서서 조금 기다렸다. 이번의 목소리는 체념으로만 이루어진 한숨만큼이나 느리고 미약했다.
이제 지긋지긋해… 딤 나겔이 나를 죽일 거야.
그리고 나트람만이 응접실에 남았다. 그때까지도 차투랑가 놀이판은 탁자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놀이판을 작동시켰고, 기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례를 거듭할수록 양측의 진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으며 누구도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홀로 두는 대국이 종반에 접어들 무렵 나트람은 남은 군사들이 스스로 행동하도록 움직임을 조정하고서 놀이판에서 손을 뗐다. 길고 무의미한 난전 끝에 상대편의 라자가 그의 마지막 병졸을 집어삼켰다. 나트람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상대편의 라자는, 온화하고 상냥한 징벌의 신은, 지혜의 광명은 딤 나겔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인에게는 징벌이 필요했다.
* * *
아직 어리고 숫기가 없었던 시절에 나트람은 차투랑가 놀이판을 들고 딤 나겔의 거처를 찾곤 했다. 어른들은 금발의 소년을 두고 사촌형제의 유모라고들 했다. 혹은 스승이거나.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제 딤 나겔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그와는 같은 탁자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트람에게는 여전히 훌륭한 차투랑가 놀이판이 있었다. 직전의 승부를 되풀이하거나, 기물들이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거나, 아예 다른 규칙을 따라 싸우도록 각인을 더한 물건이었다. 생각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깊어질 때에는 놀이판을 꺼내 환영 군사들이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런 구경마저도 지겨워지면 모두 부수어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허망한 밤의 기억들이 몸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그 반대로 향했다. 이제 그는 이시 타브가 움직이는 환영 기물이었다. 놀이판은 수많은 거점과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보랏빛 짐승의 흐릿한 형체가 곳곳에서 깜빡였다. 신호를 훔치고 전달하고 변조하면서 영향력을 넓혀 나가는 표범들. 통로는 찢어진 혈관이 아물듯 붙었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은 제어 경로가 실체화된 장소, 미궁과 중추 사이의 중간 지대였다. 가장 깊은 곳으로 단번에 진입하려면 여기를 거쳐야만 했다. 표범은 그에게 통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해 주었다. 조금 먼 곳에 두 명이 더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권한이 있었다.
모든 계산을 마친 후, 나트람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헤이딘을 어떻게 죽일지는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므로 걱정하기에는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