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파괴된 사나이 (4)
헤이딘은 란드와르에게 사정을 알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작업에 착수하는 편을 택했다. 재가동을 마치고 왼쪽 중추로 이동할 때 설명해도 충분할 일이었다.
십육면체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기억에 적힌 대로 마력을 흘려보내자 빛으로 이루어진 글자들이 표면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군무를 추듯 장치 주위를 휘돌다가 보이지 않는 평판 위에 배열되었다. 헤이딘은 그 배열을 바꾸거나 완전히 다른 문자열을 불러내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장치를 처음부터 만들어낼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 저장된 주문과 그 구조를 살피면서, 국소적인 오류를 수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이 기계의 연산을 책임지는 건 연산기입니다―기계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지혜의 주인께서는 이 정도의 불손은 눈감아주실 만큼 너그러울 거라고 믿겠습니다. 어쨌든 기술 지침대로라면 연산기의 가동 속도는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닙니다. 그렇죠?"
"글쎄, 그건 문제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고 답해야겠네요. 사실은 아까 부분적으로 작동을 시켜 봤거든요. 예전에 매달리던 난제 몇 개를 넣었죠. 쉬운 거나 어려운 거나 비슷하게 걸리던걸요. 어찌 됐건 필멸자 한 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르지만요."
마타치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헤이딘은 슈문이 제정신을 찾으면 나무 반지에 담긴 영혼을 다른 곳으로 옮길 방법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맙소사, 당신이나 나나 천벌 받을 준비를 해야겠군요. 난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요. 초월자의 머리를 감히 계산용으로 쓰다니. 어쨌든 그 말대로예요. 연산기는 성능이 좋긴 하지만 쉬운 작업이나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하기엔 부적합하죠. 보조장치 중에도 그런 것들이 여럿 있고요. 이게 바로 그 대안입니다."
빵틀으로 똑같은 반죽을 찍어내듯이 중추에서는 십육면체가 그 역할을 했다. 자주 사용되는 논리 도식과 주문들을 각인으로 저장해 연산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특히 궁전 정돈이나 소통, 미궁 제어 등의 일상적인 작업은 상당 부분 십육면체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여기엔 각인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장된 각인들을 다른 장치에게 빌려 주면서 빠른 작동을 돕죠. 중추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군요. 야스와다에서 만들었던 것도 이겁니다."
"이것만 고치면 외부 미궁도 멀쩡해질까요?"
"바로는 안 돼요. 대신 복구 절차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될 겁니다."
헤이딘은 익숙한 태도로 작업을 시작했다. 마타치치의 눈이 유령 소년의 손끝을 쫓았다. 문자들이 자리와 관계를 뒤바꾸는 모습을 매혹된 듯 관찰하던 학자는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러면 아까 전에 저분께서 말씀하신 게 맞지 않나요? 야스와다 신관들이 미궁을 뚫어낸 비결 말예요. 당신 형님이 연구일지를 보고 배웠을 거라고요."
"그럴 리가요. 내가 십육면체를 만든 게 원인이라는 것까지는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은빛매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면 모를까, 형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일단 내가 들은 적이 없어요. 처음 보는 장치를 연구하면서도, 막상 제작자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면 이상하죠.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형님은 학자 체질은 아닙니다.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남을 괴롭힐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만 책을 읽을 사람이거든요."
마타치치는 곧바로 반론했다.
"하지만 당신 형님이 그걸 다른 가문 사람들에게 넘겼다 하더라도, 그 경우에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인걸요. 연구일지를 이해하려면 결국엔 당신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어요. 별채에 갇혀 있는 건 큰 문제가 아니죠. 가둔 장본인이라면 꺼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내가 노망이 너무 심해져서, 은빛매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던 것까지 잊어버렸을 거란 말입니까? 그래요,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겠지만……."
"아뇨, 그건 아직 추측의 영역이에요. 내 입장은 그냥 합리적인 사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요인이 있을 거예요."
"알지 못하는 요인이라―그런 말로는 가설조차 세우지 못해요."
헤이딘은 학자들의 방식으로 대답했다. 마타치치는 생각에 잠긴 태도로 안경테를 만지작거리다가 운을 뗐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게요. 제사장 직분을 내려놓은 노인이 통솔자 역할을 맡은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 했죠. 그리고 저기에 있는 부제사장은 3교구에 이런 일을 벌일 인재가 없다고도 증언했어요. 그게 모두 진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당신 형님이 십육면체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죠. 그것도 아주 긴밀하게요……."
마타치치의 말을 들으면서, 헤이딘은 잔인하고 강압적인 가주가 오십 년간 금지된 마법을 수련해 온 학자와 동일인일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사촌형제의 칼린카를 죽였고, 그 딸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손발을 잘라 감금했고, 둘째 아들까지 미치게 한 야심가. 그리고 누구에게도, 가장 큰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각인 연구에 매진한 학술가.
둘은 어떤 방법으로도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럴 성품도 아니었거니와 동기도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은빛매가 연구를 주도했다고 보기에도 석연찮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일드얀이 나트람에게 명령했을 것이다―헤이딘의 협조를 얻어 내라고. 그것 또한 기억에 없었다.
차례대로 가능성을 소거해 나가자 두 가지의 가설만이 남았다. 하나는 자신이 협조한 사실마저 잊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타치치의 말대로 비밀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제하고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핵심적이지만 구체적인 상이 없는 무엇. 심지어는 윤곽조차도.
헤이딘은 별채에서 보낸 나날을 상기했다. 가장 큰 고통은 망각의 형태로만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시일이 모호한 일상의 단편이거나 벨레다와 함께한 순간뿐이었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나트람은 언제나 악몽의 동의어였다.
"모르겠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넘어갑시다."
현상의 기저를 파헤치는 건 학자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라면, 그저 방관자로만 남고 싶었다. 그는 손발이 잘린 순간도, 별채에서 보냈던 시간도 잊은 지 오래였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 * *
수리를 마치고 재가동 절차에 돌입하기에 앞서, 헤이딘은 란드와르에게 대강의 사정을 밝혔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란드와르의 시선이 테네브로즈에게로 향했다. 3교구 부제사장이었던 요정은 그 의도를 깨닫고 서둘러 항변했다.
"몰라서 모른다고 한 건데요. 애초에 그 늙은이가 자기 방에서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고발장이 날아왔을 겁니다."
"일드얀은 알았으니까 그 새끼를 여기로 보낸 거 아니냐."
"전 일드얀이 아닌데요. 딤 나겔이 모르는 건 저도 모르는 겁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입장 표명을 받아들였다. 테네브로즈가 비록 눈치가 없는데다가 뻔뻔스러운 놈이긴 했지만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숨겨야 하는 건 기막히게 잘 숨기지 않았나. 덕분에 자신이야 실컷 뒤통수를 얻어맞았지만서도… 가장 큰 비밀이 밝혀진 지금에서야 나트람에 대한 걸 함구할 이유는 없었다.
반면 나트람은, 문제가 있었다. 직접 만나 본 적이 있기는커녕 이야기를 조금 들은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드레스 건도 있었고(이건 벤트레스가 말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벨레다를 애완동물로 삼도록 선뜻 허락해 준 것부터가 이상했다.
조선시대로 치면 대감집 잔치에 쓸 송아지를 잡는데 그걸 기르겠다고 나선 격이었다. 그것도 별채에 감금당한 죄인이. 무시하고 송아지를 잔칫상에 올리는 게 보통 사람의 반응이었다. 나트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여기까지 생각을 뻗을 것도 없이 동생 손발을 자른 시점에서 충분히 이상한 놈이긴 했다. 아니, 그것까지 따지자니 더 이상했다. 손발까지 잘라 놓고 그 지랄이었다. 총체적으로 말이 안 됐고 앞뒤가 안 맞았다.
란드와르는 마타치치의 의견에 한 표를 더했다. 나트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고, 그게 이 상황의 핵심이었다. 그는 그것을 정신병이라 부르기로 했다.
"요정아, 그러면 내가 하나만 더 물을게."
"예."
"나트람이 약간… 정신에 문제가 있었냐?"
"나으리랑 비슷했습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저한테 욕을 하고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며 술을 강권한다는 겁니다."
란드와르는 가까스로 욕을 참았다. 직접 이 새끼의 주장을 입증하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아니, 새끼야. 내가 지금 농담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 제대로 말하라고."
"듣기 싫은 말이라고 해서 틀린 말이 되는 건 아닌데요."
"내가 진짜 나트람이랑 동급이야?"
"이상한 곳에서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건 똑같지요. 솔직히 공표식까지 한 상황에서 인간 용병이랑 술을 마시려고 환술을 쓰고 나가는 거나 이런 곳에서 머리를 감는 게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테네브로즈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줄줄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샤워기 노릇의 원한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저 놈 앞에서 별 꼴을 다 보이긴 했어도 손발을 자른 적은… 있었다. 놀랍게도 있었다.
당장 말루카에서, 선조의 능묘를 뚫는 동안 그 짓을 시켰던 것이다. 마법사 왕의 주의를 끌고서는 주문을 모두 얻어맞으라고. 잘려나간 팔다리는 재정렬로 붙이라고.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게이머로서의 자의식이 항변했다. 그건 <이스트리아 퀘스트> 공식 팬사이트에도 영상이 올라간 정석 공략이라는 것이 반론의 요체였다.
게이머 자의식과 생활인 자의식 사이에서 균형을 잡던 란드와르는 팔다리를 자른 것보다도 술을 먹인 일을 더욱 미안하게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테네브로즈의 말이 옳았다. 자신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니,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나트람이랑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란드와르는 장대한 내적 독백을 한 어절로 갈음했다.
"뭐?"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 늙은이도 연회를 화려하게 열어 놓고는 항상 2층에만 올라가 있었거든요. 사람이 많으면 시끄러워서 싫다는 겁니다. 메기도한테는 늘상 신경질을 부렸으면서 막상 수정 구슬은 그 녀석한테만 맡겼고요."
"그런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했어?"
"했지요. 자주 했습니다만 제가 따질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사장 업무도 잘 하고 가문 일도 잘 처리하던 사람인데요. 물론 직접 따져본 적이 있긴 한데―"
"있긴 한데."
"3교구 학살이 일어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청지기님이 별을 보더니 슬슬 주인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제 늙은이랑은 못 보게 될 테니 그간 궁금했던 걸 물어보려고 했지요. 작은 어르신의 시체를 장미 덤불 아래 묻었다고 했는데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대답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오두막에 암살자를 셋이나 보내지 뭡니까."
"잠깐만, 나트람이 너 죽이려고 했던 게 그래서야?"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여기까지 오자 할 말이 사라졌다. 헤이딘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형님 이야기라면 진저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시체가 어디에 묻혔든 관심도 없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으며, 사정을 알 마음은 더더욱 없다고 했다. 나트람이 서재에 손 박제를 올려놓았든 어쨌든 간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를 붙잡고 닦달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트람의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목적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야스와다 요정을 죽이고 슈문을 고쳐야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작은 볼로디아의 아버지를 궁금히 여겼던 것과 똑같은 궤의 의문이었다. 란드와르는 오른쪽 중추로부터 몇 발짝 물러난 채, 시가를 태우며 정신병과 성격장애의 목록을 나열해 보았다.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대학교 시절에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택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추론이 맞아떨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그 연구 기록물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치면 어떻겠습니까? 별불꽃 본가 어딘가에는 아직 종이더미가 남아 있고, 나트람은 그걸 보면서 원리를 이해하게 됐다 치면요?
큰 틀에서는 완벽히 적중한 셈이었다. 적중한다고 해서 성과급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는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토했다. 잿빛 덩어리가 점집의 향처럼 휘어지는 궤적을 그리며 허공으로 올라갔다. 점집이라. 지구에 돌아가면 정말로 박수무당 명함을 하나 파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사설탐정 사무소도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게 끝난 뒤, 라는 말은 몽상과 망상 사이의 경계를 맴돌았다. 란드와르는 잠시 가망도 근거도 없으며 숫자로 표현하지도 못할 것들 특유의 한가로움에 취해 있었다. 그렇게 적중률 높은 직감과 신내림에 대한 생각이 신학에 대한 것으로, 그리고 민혁의 이름으로 옮겨갈 무렵 굉음이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평판 부품들이 초원을 내달리는 가젤 떼처럼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