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파괴된 사나이 (3)
셀리멘이 로안에게 전생의 기억을 덮어씌운 건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런 미래를 내다보았던 걸까? 지금 당장 속내를 알 방법은 없었지만 란드와르는 오래 전에 죽은 대마법사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외부조 상황이 꽤 괜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로안은, 혹은 알세스트는 쿠벨릭과 협력해 대전쟁 당시 전투용으로 쓰였던 미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벤트레스가 거기에 힘을 합쳤다. 첼리비다케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는 옆에서 계산을 돕고 있다고 했다.
지형 특성상 들킬 가능성은 많지 않으리라는 것이 로안의 설명이었다. 평지에 미궁을 설치해 둔다면 마력 흐름의 조화가 깨지기 때문에 쉽게 간파당하지만, 이곳은 이미 슈문의 영토이므로 겉보기로는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거였다. 꼬마 둘이 아직 행방불명인 걸 제외하면 한 시름을 놓은 셈이었다.
* * *
투명한 황금빛 입방체가 정교한 기계 장치를 감싸고 있었다. 오염체의 침입을 막는 보호장이었다. 란드와르는 보랏빛 점액질이 해파리처럼 그 위를 기어오르다가 불타 사라지는 장면을 즐겁게 감상했다. 전기 모기채로 벌레를 지지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오염 지대를 돌아다니는 내내 저것들이 얼마나 귀찮게 엉겨붙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다니 영광이에요. 평소에 쇳조각을 만지작거리던 보람이 있네요. 신을 고치는 건 처음이지만요. 제가 잘못해서 오작동이라도 나면 큰일인데요! 오작동이라,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미리 사과를 드려야겠어요. 지혜의 주인께 감히 신성모독을 저질렀으니 말예요."
반면 마타치치는 수리 작업 자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새였다. 웃음이 너무 환한 나머지 마력 등불 대신 데리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르시소 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영광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즐길 일인가 싶었다. 수리는 결국 헤이딘과 마타치치의 몫이었던 것이다. 특근을 해야 하는데 기분이 좋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란드와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호장 너머를 넘겨다보았다. 해석기관을 연상시키는 기계 장치가 그곳에 있었다. 사각형으로 배열된 기둥 넷이 바닥면과 천장면을 이으며 골격을 형성했고 내부의 부품은 뼈와 힘줄보다 더 긴밀하고 복잡하게 결합했다.
가로로 놓인 회전축이 거대한 톱니들을 관통하며 구동부의 중심을 잡았고, 작고 세밀한 평판은 주판의 알처럼 겹겹이 쌓인 형태로 조립되었다. 그것들은 입력부의 움직임에 따라 공작의 깃처럼 펼쳐졌다 접히며 옆의 평판을 향해 정보를 전달했다. 전달할 것이었다.
게임 툴팁에서 본 것들을 눈앞의 광경에 적용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공대 출신이긴 해도 학부생 시절에는 빵판에 소자나 꽂았고 한전에 취직한 후로는 전기선만 실컷 만지작거렸지 기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스타트업에서는 프로그래밍을 했다.
그렇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기계공학은 엔지니어한테 맡겨야 하는 거지.
"잘 할 거라고 믿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음, 최선을 다해야죠. 그나저나 다른 신들도 머릿속이 이런 기계로 만들어져 있나요?"
그래도 이건 란드와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작동 원리를 묻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는 마타치치의 기분을 위해 애써 진지한 투로 답했다.
"말했다시피 여기는 무의식의 땅입니다. 정확히는 무의식에 이시 타브가 간섭한 결과물이죠. 손상된 중추의 형태는 꿈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요.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이건 모두 환상이고, 이 땅의 주인이 이렇게 믿는 동안만 진실이지만, 믿는 한은 계속 진실일 겁니다."
"지혜의 주인께서 쉬운 수리법을 마련해 두셔서 다행이네요. 조금만 더 어렵게 상상했으면 도와줄 사람이 열 명은 필요했겠어요. 제가 헤이딘을 돕는 건지, 헤이딘이 절 돕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작업을 시작해 보자구요."
마타치치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헤이딘을 응시했다. 시선이 오가더니 유령 소년의 몸이 땅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금빛 장막 속으로 발을 들였다. 땅에서 솟아난 표범 한 마리가 재빨리 그 뒤를 쫓으려다가 불타 사라졌다. 보호장 성능 하나 끝내주는군.
그리고 란드와르는 바깥에 남은 채로 생각했다. 마타치치가 헤이딘보다 몇 십 년쯤은 어리지 않나? 전략적 제휴관계라 해도…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시군요.>
이거 욕이죠?
<사실 적시입니다.>
란드와르는 머릿속의 베네수엘라 국적자에게 한국에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티아는 자신이 대한민국에 입국할 예정이 없으며 따라서 처벌받지도 않으리라는 입장을 밝혔다. 과연 우문현답이었다.
그는 담당 천사의 현명함에 욕설 섞인 감탄을 표하고는 쉴 만한 곳을 찾았다. 저 둘이 중추를 수리하는 동안 머리를 감아 볼 작정이었다. 피를 볼 일은 없었지만 점액질은 잔뜩 뒤집어썼던 것이다.
주위를 휙 둘러보자 허공에 떠오른 호수나 갈고리처럼 바닥에 돋아난 척추뼈 따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잔뜩 부푼 채 흔들리는 부종 덩어리들. 땅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수액 괴물. 입술 없는 입이 오염된 땅 한가운데에서 벌렸다 닫히며 상어만큼이나 날카롭고 조밀한 치열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신록은 여전히 짙푸르고, 과수는 탐스러운 과실을 매단 채 가지를 휘고 있다. 실로 조화롭지 못한 광경이다. 란드와르는 과수 근처의 잔디밭이 충분히 안전한 걸 확인한 다음 이동식 샤워기를 불러냈다. 요정 모양이고 가끔 명령에 불복종했으며 수온을 조절하는 기능이 부족했다.
샤워기는 서너 번의 실패 끝에 겨우 미온수를 만들어냈다. 란드와르는 허리를 굽힌 채 머리에 손가락을 밀어넣어 점액질을 씻어냈다.
"머리는 나가서 감으면 안 되는 겁니까?"
"내가 못 씻으면 미치는 사람인 거 알잖아."
란드와르는 물소리 속에서 답했다. 샤워기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씻는다고 해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왜 또 지랄이야."
그렇게 되묻자마자 샤워기가 작동을 정지하더니 업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중추를 수리한다고 해서 일이 곧바로 끝나는 건 아니지 않냐는 것이었다. 말은 옳았다. 재가동이 시작되면 보호장이 사라졌던 것이다. 쏟아지는 오염체들을 막아내다 보면 우두머리가 나타나고, 뭐, 어쨌건 그것까지 잡으면 시나리오가 끝났다.
"오냐."
"제일 중요한 전투가 남았는데 태평하게 씻고만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어쩌라고."
"진지한 고민을 해 보시는 게 좋겠다는 건데요. 지금 늙은이가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있단 말입니다.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졸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입 다물고 물이나 다시 틀어 봐. 조금만 더 씻으면 돼."
란드와르는 이의 제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건 건설적인 논의가 아니라 그냥 항명이었다. 짧은 정적이 흐르더니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고의성이 다분했다.
* * *
란드와르가 말 안 듣는 샤워기를 붙잡고 진땀을 빼는 동안 다른 둘은 평화로운 한때를 만끽하고 있었다. 헤이딘이 간혹 두통을 호소하는 걸 제외하면 작업은 순조로웠다. 가장 먼저 저장소가 수리되었고, 그 다음에는 입력부가 기능을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논리 연산기였다.
"여기부터는 슬슬 복잡해지네요. 존재 예화 기능이랑 양화사 전환에 문제가 있고, 개체 상항 지시기를 저장소에 연결한 다음, 속성 양화기를 점검해야 해요. 그리고 세부 지침이 누락된 보조장치가 하나 있는데, 하필이면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나와 있네요."
"일단 중앙장치는 당신이 수리를 해요. 내가 그동안 보조장치 도면을 보겠습니다. 고민을 해 보면 뭐든 떠오르는 게 있겠죠."
"괜찮겠어요?"
종이 묶음을 건넨 마타치치는 헤이딘의 안색을 살피고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부품을 본격적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후로 두통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려 애쓸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손발이 사라졌을 때에는 이것보다 세 배는 더 아팠을 테니까… 형님이 다시 나타나서 왼손에 오른발까지 자르는 게 아니라면 난 뭐든 괜찮습니다."
헤이딘은 입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종이를 차례대로 넘겼다. 도면 묶음은 장치의 명세와 기술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손상 지점과 정확한 수리 방법까지도 쓰여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논리 연산기에 부착된 보조 장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도면에 유실된 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우상단의 기둥을 돌아 파손된 보조 장치에 가까이 다가갔다. 요정 머리 크기의 십육면체가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헤이딘은 바닥에 종이 묶음을 내려두고서는 겉면에 손바닥을 얹었다.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 장치를 작동시키는 건 각 부품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각인 문자의 조합인 듯했다. 손상 역시 물리적인 것은 아닐 터였다.
눈을 감은 채 마력 갈래만을 더듬어가자 심상 속에서 무언가가 안개에 감싸인 윤곽처럼 떠올랐다. 두통이 훨씬 강렬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심해지면 오른손만큼은 아플 것 같군. 잘렸던 날도 기억에 없긴 마찬가지지만…….
얄궂은 농담이 수레바퀴 아래의 자갈돌처럼 덜그럭거리는 동시에 생각의 흐름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걷잡을 수 없는 힘이 그를 움켜쥐었다. 헤이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세상에, 정말로 괜찮아요?"
시간이 잠시 멎더니 마타치치의 목소리가 깊은 물을 넘어오듯 윙윙 울렸다. 갖가지 소리가 뒤섞여 났고 시야는 삼면화를 한데 겹쳐 놓은 듯 혼란스러웠다. 마력 갈래를 잘못 건드린 걸까? 수저에 휘저어진 죽그릇이 된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아마……."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지만 환영은 좀처럼 씻겨 나가지 않았다. 눈동자가 불탄 탓에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탄 자국까지 함께 마주해야 했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위대하신 지혜의 주인께서는 영혼의 눈까지도 불태울 수 있는 모양이지.
하기야 한낱 요정 따위가 신의 머릿속을 헤집으려 했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헤이딘은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억눌린 숨이 혓밑까지 차오르는 순간 사방의 풍경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백일몽이 그 자리를 메웠다.
무너진 제단이 바로 앞에 있었다. 매캐한 흙먼지 냄새… 오래전에 버려진 종이 더미… 뼈가 돌바닥과 맞닿는 감각이 무릎에 느껴졌다. 눈을 감자 소리가 시각을 침범했다. 부풀고 부풀다가 끝내는 파열하듯 더한 침묵으로 변해 버리는 울림들. 의미가 그 사이로 쇄도해 갔다.
― …이로써 지혜의 주인께 저의 혼을 맡깁니다.
입술이 움직이며 마지막 문장을 불어 내쉬었다. 이렇게 말하는 건 누구지? 내가 정말로 움직이고 있나? 백일몽에 습격당했을 때만큼이나 급작스럽게 정신이 되돌아왔다. 헤이딘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고, 손등으로 눈가를 쓱 문질렀다. 바로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내가 너무 오래 기절해 있었던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중앙장치는 다 고쳤습니까?"
"쓰러졌다가 깨어난 사람이 할 말이 그건가요? 그래도 대답을 하자면, 일단 내가 맡은 쪽은 끝났어요. 영혼을 치료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어서 그냥 눕혀만 뒀거든요. 나머지도 내가 할까요? 그럴 능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상자보다는……."
"머리는 이제 맑아졌습니다. 그리고 십육면체는 내가 고칠 수 있어요."
대뜸 대답한 헤이딘은 이어질 말을 망설이는 듯 입술을 잘근거렸다. 마타치치의 심장이 수백 번은 뛰고서야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궁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내가 뭐라고 했었죠? 포탑을 만들고 있었다고? 내가 당신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까? 내가 했던 이야기랑 당신의 발명이, 관련이 큰가요?"
"아뇨, 그냥 포탑을 만들고 있었다고만 했어요. 그러다가 별채에 감금당했다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포탑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잊어버렸다면서 대답을 못 하길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최소한 야스와다에서 보낸 첩자는 아닐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그게 뭔지 알아내려고 궁전을 돌아다니다가 손대포 도면을 발견했고요. 그나저나 이게 지금 일이랑 관련이 있나요?"
유령 소년은 고개를 돌려 마타치치를 바라보았다. 모종의 결연함이 혼란스러운 기색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만들던 건 포탑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거였어요. 제작법도 궁전에서 배운 게 아니고요. 내가 그걸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그건 아마 착오였을 겁니다. 오작동이 빚어낸 착오 말입니다. 제단이 망가졌기 때문에 불신자에게 결코 보여줘서는 안 될 걸 보여준 겁니다. 아니, 저의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이 두통은……."
마타치치는 헤이딘이 쏟아내는 말을 이해하려 애쓰다가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잘 모르겠네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나도 이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짧게 정리하죠. 나는 저 장치를 본 적이 있어요. 직접 만든 적도 있고요. 해당 장치가 도면 묶음에 없는 건, 그 명세가 나에게 왔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한테요?"
헤이딘은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모두 내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기억 대부분이 망가져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본 게 진실이라면, 나는 쉰 해 전부터 그 도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