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파괴된 사나이 (2)
정원사들은 인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카두에 네 달 보름간 머물렀고, 한 해중 달이 가장 클 때 저승으로 돌아갔다. 솔로틀이 땅의 소식을 듣고 깊이 고민하여 늑대의 아홉 머리 중 하나를 깨웠다.
"제 아비와 형제가 당신을 업신여겼으므로 그 처분을 여쭙고자 합니다."
황제는 저승의 사람을 일꾼으로 삼았으며 윰 시밀은 땅에서 늑대의 이름을 몰아냈다. 늑대는 요정들이 저지른 일에 크게 상심했고, 세카두 사람들의 뜻을 알고자 했다. 솔로틀이 그 명령을 받들고 정원사의 몸을 빌려 그들 앞에 나아갔다.
"그분은 한순간에 꿈을 무너뜨리고 너희 기억을 고루 씻을 수 있다. 새로이 지은 땅에서 세 종족은 고루 어울릴 것이다."
"사냥개는 토끼를 물어 죽이거늘 어떤 토끼가 사냥개와 함께하길 바라겠습니까? 만일 사냥개가 풀을 뜯는 세상이 오더라도 모두의 넋이 이전과 같지 않다면, 그게 저희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 말 또한 옳다. 달리 원하는 바가 있느냐?"
"정원사들이 말하길 신이란 본디 별을 받은 요정에 불과하다 하였습니다. 요정에게 베푼 은혜를 저희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간의 신이 요정의 신을 대적하게끔 허락해 주십시오."
"인간의 혼은 약하므로 그 힘을 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섬겨야만 하겠습니까? 저승에 계신 분을 받들며,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에 늑대가 꿈을 그대로 둔 채로 인간의 신을 마련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요정의 마음은 인간과 어울리지 않았고, 인간의 넋은 힘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했으며, 그 둘을 섞으면 별을 만났을 때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용을 만들었듯 새로운 혼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마음 또한 인간과 같지 않았다.
솔로틀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 청지기의 몸을 빌려 와그다스로 향했다. 슈문은 나그네의 정체를 알고 환대했다.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솔로틀이 슈문의 뜻을 알기 위해 물었다.
"지혜의 청지기시여, 당신이 거느린 학자들은 땅의 일을 모두 읊지만 지고하신 분만큼은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타마기스의 주인이 그 기록을 봉하게끔 시켰다. 우리가 한때 요정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다른 요정들이 이 자리를 탐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뜻도 그와 같습니까?"
"그렇지 않다―허나 너는 수정 심장이 깨져 조각난 것을 직접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 내가 어찌 항거하겠느냐?"
이에 솔로틀이 늑대의 뜻을 밝혔다. 슈문이 그 말을 듣고 은밀히 답했다.
"지고하신 분께서 내게 지혜를 맡겼으므로 나는 세상이 모르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너는 이 땅도, 저승도 아닌 곳을 알고 있느냐? 거기에 머무르는 이방인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느냐?"
"저는 알지 못하니 당신께서 설명해 주십시오."
"그들은 한때 다른 세상을 다스렸지만 이제는 방랑하게 된 자들이다. 그러니 이방인들로 하여금 인간을 이끌게 한다면 요정 신의 권세도 빛을 잃을 것이다."
* * *
복구 절차 돌입은 학자들에게도 뜻밖의 사건이었다. 최외곽 지역을 담당하던 젊은 학자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중추에 직통으로 연결된 격자 평면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청년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밀쳐낸 뒤 말릴 틈도 없이 제어 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기점으로 허공을 뒤덮은 환영들이 빠르게 사라지더니 정중앙의 격자 평면 하나만이 남았다.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모두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압도적인 침묵을 뚫고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그 외침과 동시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섰다. 청년은 여전히 제어 신호 조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팔을 붙들어 세우려던 남자는 격자판의 흐름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아, 이제 알겠군. 제어 권한을 탈취하려던 건 미끼였던 거야, 그렇지? 우리는 모두 거기에 속았던 거고. 왜냐하면 침입자가 내부 오염까지 모두 파악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요. 왜 그 가능성을 배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이시 타브의 하인들이에요. 오염이라면 우리보다도 더 잘 알겠죠. 지금도 완벽히 막아낸 건 아니에요. 경로 하나가 강제로 열린 상태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남자는 몸을 돌리고는 다른 학자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이게 최선이었어!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보라고!"
* * *
볼로디아 일행은 벨레다와 클렘이 사라진 걸 깨닫자마자 종이 구체를 통해 제어실과 교신을 시도했다. 통신이 두절된 듯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윽고 쿠벨릭은 복구 절차가 강제로 시작되었고, 두 꼬마가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티아가 신탁으로 볼로디아와 란드와르를 중개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논의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보자는 말로 끝났다. 실로 공허한 합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첼리비다케는 제어 통로에 접속하려 애쓰다가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첼, 울지 마요. 평소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라구요."
"하지만, 하지만… 누가 마음대로 복구 절차를 가동시킨 거야? 무티? 토스카니니? 클라이버? 워낙 멍청한 놈들이니 누가 그랬든 이상하지도 않아.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쩜 이렇게 바뀐 게 없을까. 세카두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올 때에도 당신은 울기만 했잖아요. 결국 탈출로는 내가 다 뚫었고요. 로야페타 사람들 앞에서 사업 설명회를 벌일 때는 누구보다도 자신만만했으면서. 이러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첼리비다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흐느끼고만 있었다. 쿠벨릭은 허리를 숙이고서는 은발의 요정을 부드럽게 포옹했다. 작은 몸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어느 순간 뚝 멎더니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박동이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간 것처럼. 이 상황에서 느끼기에는 얄궂은 재미였지만 첼의 이런 모습은 언제나 큰 기쁨이 되곤 했다.
그녀는 외부 미궁에 발을 들이고서 균열 다섯 개를 닫을 때까지도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지 않았다. 첼리비다케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간에 주먹을 휘두르며 싸운다면 일단 질색할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쿠벨릭은 이 고고한 요정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상상해 보았고, 등줄기를 토닥이듯 어루만진 다음, 몸을 일으켜 볼로디아에게로 돌아갔다.
늑대인간은 막 교신을 마친 상태였다. 금발의 인간 소년이 맞은편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볼로디아는 쿠벨릭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아, 부르려 했는데 잘 왔소. 상황을 정리하지. 복구 절차에 들어가면서 가호가 약해진 게 맞는 것 같소. 그리고 직접 확인해 본 바로는, 구조도를 살피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만큼은 가능하오. 다만 제어실에서 적의 위치를 알려줄 수 없으니 실로 불리한 입지에 놓였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볼로디아는 말끝을 흐리고는 한쪽 손으로 구체를 가볍게 돌렸다. 종이 구체는 관성이 붙은 팽이처럼 그 속도를 유지하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빛으로 변했고, 다시 3차원 조형물로 재구성되었다. 기존의 구조도에 비해서는 훨씬 단순화된 형태였다.
"겹치거나 꼬인 공간이 모두 일반적인 공간으로 변했고, 제어 경로까지 차단된 것으로 알고 있소. 단순히 걷기만 해도 미궁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거요―그건 저쪽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되겠지. 그러면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
"역으로 이용한다면, 어떤 식인가요?"
"나는 공간 마법을 잘 모르니, 이 추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먼저 일러두겠소. 만약 어긋난 점이 있다면 말해 주시오. 미궁은 각 공간군의 연결이고, 이 공간군을 잇는 선을 그린다면, 그건 아주 복잡하게 얽힌 채 양 끝이 붙은 끈 형태가 될 거요. 정교한 매듭이지. 이렇게 풀린 매듭은 원형 구조로 단순화될 테고. 맞소?"
"그렇죠."
"직관적으로 보자면, 원은 단일한 순환 경로요―그렇다면 침입자들은 이동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특정 지점을 지나게 될 거요. 그게 정확히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내 제안은, 우리가 먼저 그곳에 가서 대비할 수 있으리라는 거요."
볼로디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로안이 나섰다. 소년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두 걸음 앞으로 이동한 뒤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손가락 하나 굵기의 얼음 기둥들이 치솟으며 그를 철창처럼 에워쌌고, 곧이어 공기로 변해 사라졌다.
"일반적인 공간은 아니라 따로 확인을 해 봤는데, 미리 각인해 둔 마법들도 멀쩡히 작동하더군요. 미궁 자체의 마법은 효력을 잃었지만 공간 마법을 따로 각인한다면 기존의 효과를 비슷하게나마 낼 수 있을 겁니다. 원소학을 함께 섞는 것도 가능해요. 대규모 혼란도 쓸 수 있을 테고요."
로안의 제안에 쿠벨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수긍하는 기색과 염려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음,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첼은 미궁에는 완전히 소질이 없어서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를 해야 할 텐데 시간 안에 될지를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각인을 새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주문이 필요할지는 고민해본 적이 없어서요. 지금까지는 남들을 미궁에 가둬 놓고 도망치거나, 아니면 싸우거나 둘 중 하나였지 미궁을 써서 싸울 일은 없었는걸요. 애초에 복잡한 설계는 제어실에 남은 학자들이 전문이고, 저는 기초만 익혀 둬서……."
미궁 설계는 공간군 개념과, 위상수학과, 기호논리학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었다. 첼리비다케나 쿠벨릭 류의 실용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분야라는 뜻이었다. 로안은 잠시 고민에 잠겨 있다가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운을 뗐다.
"여기에서는 제가 제일 전문가일 겁니다. 비록 그쪽 분들의 마법을 제대로 배운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천 년 전의 마법이니까 개량된 것도 있고 잊힌 것도 있겠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필요한 주문들과 그 상호작용을 읊을 테니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