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소리는 몸보다 늦게 죽는다 (5)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학자들은 복구 절차를 가동했고(정확히는, 잘 막아 보기로 합의한 직후에 누군가가 충동적인 선택을 저질렀다), 어쩔 수 없이 제어실의 영향력이 감소했다. 가호 자체는 남아 있을지라도 종이 구체가 제공하던 기능들이 대부분 먹통이 된 것이다.
다행히도 볼로디아와 로안은 아직 아즈리온 교단 명부에 등록되어 있었고, 신탁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공표식을 치른 관계로 신앙심도 넉넉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용납이 됐다. 정말로 핵심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는 벨레다와 클렘이 이교도라는 데에 있었다. 둘은 슈문을 섬겼다.
왜지? 왜 하필이면 그 둘만 다른 공간으로 떨어진 거지?
<침입자가 공간군 일부를 탈취하면서 다른 곳까지 타격을 입었습니다. 복구 과정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는군요. 기존에, 이시 타브에게 오염되었던 부분 역시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그 둘이었던 겁니까? 로안이랑 같이 떨어질 생각은 안 해 봤대요?
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고함이 거세졌다. 란드와르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서는 심호흡했다. 어차피 외부조를 도울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었다. 나가서 함께 침입자를 처치하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공간 이동마저도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급하기로는 오염지대를 정화하는 게 더 급했다. 외부 미궁에 손상이 가해지면서 가호 지속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남은 분량은 기껏해야 여덟 시간쯤. 그러니까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어 중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면 외부도 곧바로 정상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외부조가 버텨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가호 대상자는 영혼을 조작하는 마법에, 즉 정신 계열 주문에 면역이 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승산을 굳힐 수는 없었다. 인원수에서의 불리함을 극복하려면 학자들의 보조가 필수적이었다. 혼란이나 정신 지배에 면역일지라도, 다섯. 이제는 다섯 명이 수백 명을 막아내야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란드와르는 주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테네브로즈는 솔로틀과 상의하는 중이었고, 헤이딘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골몰했다. 마타치치는 응답 없는 종이 구체를 끝없이 돌리고만 있었다. 마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를 주구장창 들으면서도 통화 버튼을 거듭 누르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삼키고서는 요정 학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침입자가 당신네보다 여기를 더 잘 알고 있다고 했죠."
"전해들은 바로는 상당한 실력자들이에요. 공간 마법의 구현과 이론에 일가견이 있고요, 원리에 아주 충실해요. 의심 가는 사람이 전혀 없긴 하지만, 최소한 서넛 정도가 저쪽을 돕고 있는 것 같다던걸요."
"외부 미궁은 사실상 정지 상태가 됐고요."
"바깥 시간으로 하루는 이럴 거예요. 진짜 문제는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복구 절차에 들어가면서 꼬였거나 반사된 공간들이 대부분 풀렸다는 건데―이래서야 미궁이 될 수는 없죠. 그냥 앞으로 걷기만 하면 언젠가는 제어실에 도달하게 돼요."
"학자들 말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마타치치는 표정으로만 답했다. 비관적인 기색이 묻어났다. 란드와르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앓는 소리와 함께 결론에 이르렀다. 가능한 미래는 세 가지. 첫째는 침입자들이 균열에 진입하거나 제어실에 들이닥치는 것. 둘째는 침입자들이 볼로디아 측과 충돌하는 것. 셋째는 앞선 두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슈문의 제어 중추를 고치는 것.
그는 주제를 바꾸어 물었다.
"도면은 다 모았죠. 부품은 아직 부족하고."
"이 도면에 적힌 숫자가 맞다면, 합나사랑 생성원 고리는 끝났고 진리 톱니와 인식 화소가 절반쯤 남아 있어요. 나머지는 한두 개만 더 구하면 되는 수준이고요."
"수리는 얼마나 걸려요?"
"작업에 들어가 봐야 알아요. 도면이 자세한 편이긴 한데 보조 장치 중에 누락된 게 하나 있거든요. 전체 설계도엔 있는데 기술 지침에는 완전히 빠져 있어요. 이게 문제가 될지 어떨지는, 직접 건드려 봐야 아는 거죠."
"갑시다."
란드와르는 일어섰다. 침입자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자신이 건드릴 수 있는 안건은 세 번째가 유일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 *
"흠."
나트람의 미간이 언짢은 듯 좁아졌다. 블리스키미르도 눈치 챌 만큼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부대장은 지난 몇 시간 동안 벽면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작동 방식과 그 반응을 어렴풋이 익힌 상태였다. 좌표평면에 명멸하던 각인 문양들은 느슨한 광점으로 해체되었고, 그 수 또한 빠르게 줄어들었다. 제어 경로에 접근할 방법이 봉쇄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는 아직 무사하군… 방법이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주름진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노인이 불어넣은 마력 갈래는 철사 조형물을 중심에 둔 적포도주 분수처럼 위로, 아래로, 옆으로 흘렀다. 이윽고 보랏빛 줄기가 빛의 파편을 하나로 묶어 무너지던 형상을 재구성했다. 기존의 문양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질량이 한곳에 모여 들어가듯이 좌표계의 직교 구조가 그 지점에서부터 일그러졌다. 색이 점차로 깊어지고 어두워지더니 공간이 찢겨져 나왔다. 블리스키미르는 자그마한 균열이 표범을 뱉어 내고는 다시 봉합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짐승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물체라기보다는 구름을 뭉쳐 형태를 만든 뒤 그 아래에 빛을 숨긴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희미하게 부스러지는 빛 가루가 몸 둘레를 감쌌고, 관절이 접히는 부분에서는 언뜻언뜻 섬광이 나타났다. 허리를 수그린 나트람은 칼린카를 어르듯 표범의 턱밑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노인이 상체를 꼿꼿이 세운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블리스키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관들이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고 있네."
나트람은 그렇게 툭 던지고서는 덧붙여 말했다. 시선은 부대장에게 고정한 채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은 하나?"
"죄송합니다만, 모르겠습니다."
"들으면 미쳤다고 할 게야."
다시 정적이 사방을 짓눌렀다. 블리스키미르는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사형을 예감한 죄인이 판결문을 기다리는 심정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말을 하려거든 지금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나트람의 입이 열렸다. 내용은 예상 가능한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만찬을 벌이면서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네. 보통은 테라스에서 다른 요정들이 모여 떠드는 걸 지켜보았지. 아래층에 있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작자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테니까. 그런데도 말을 걸 놈들은 꾸역꾸역 2층으로 올라와서 나를 귀찮게 하더군. 불편하고 짜증스러웠어. 당장에라도 서재로 돌아가고 싶었지. 그런데 나는 가주라는 명목으로 거기에 있어야 했단 말이야."
"예?"
"가주 자리에 오른 후로 좋았던 적이 없단 말일세. 연회를 왜 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시끄러운데다 가문 일이라면 별 시답잖은 것까지 내가 결정해야 하더군. 그 거추장스러운 걸 왜 그렇게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물론 가문은 내 것이고, 내 것이라면 어떻게든 얻어내야 하지! 내 것을 잃었다면 마땅히 화를 내야만 하고! 그런데 가문이 내 것이라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더 많이 가지면 뭐가 달라지지?"
"예?"
"가보, 재물, 반려, 지위, 권력, 명예, 자식들!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들! 내가 그걸 왜 원해야 하지? 잃었을 때 슬퍼하거나 분노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지? 왜 다들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왜? 왜 다들 그걸 좋아하지? 어떻게 좋아할 수 있지?"
블리스키미르는 가장 먼저 귀를 의심했고, 그 다음에는 나트람의 표정을 살폈다. 농담을 하려는 건 아닌 듯했다. 애당초 3교구에서의 기억을 논해 보자면 이 노인은 농담이라는 걸 한 적이 없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저의가 어떻든 간에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들을 질문은 아니었다. 별불꽃을 의회의 한 자리에 올려놓은 남자가 할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트람의 발언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었다. 한 문장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었다. 어르신, 외람된 말씀이오나, 혹시 미치셨습니까? 블리스키미르는 노인에게 자기객관화가 될 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다는 데에 기대를 걸면서, 최대한 정중히 답했다.
"여기에서 풀어 설명하기는 어려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맡은 바를 다하는 게 좋겠습니다."
"왜 그래야 하지?"
"동족의 미래가―"
"아니, 대답이 필요해서 꺼낸 말은 아닐세. 그런 소리는 수없이 들었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됐지. 새로운 걸 얻어낼 때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중얼거렸지만 모두 헛수고였어. 그 짓이 이제 지긋지긋해. 서약이고 뭐고 지겹단 말이야. 난 혈족이나 영광 따위는 모르겠으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필요한 건 다 해 주었어."
퍼붓듯 말을 쏟아낸 나트람은 당연하다는 듯 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견고해 보이던 석벽이 진득한 액체처럼 갈라지며 노인의 몸을 집어삼켰고, 표범이 그 뒤를 따랐다. 뒷발까지 벽 너머로 옮긴 짐승은 채찍을 거두듯 꼬리를 몸통 쪽으로 말았다.
그러자 점액질처럼 변했던 석벽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그 장면은 무른 반죽에 빠진 덩어리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사라지는 순간을 연상시켰다.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통솔자도, 표범도, 황금빛 격자도. 그저 사암질의 거대한 돌덩어리뿐이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블리스키미르는 절박한 심정으로 손바닥을 얹었다. 틈새가 있기는커녕 손끝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작용점 몇 군데에 마력을 주입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떻게 한 거야? 아니, 그보다, 어쩌자는 거야?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의문이 맹렬히 공회전했고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참 동안 벽을 더듬던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무리의 신관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굳어 있었다. 부대장으로서, 뭐라도 해야 했다. 해야 한다고? 뭘? 여긴 구조물 한복판이고, 나갈 방법도 모르고, 나간다 쳐도 속 편히 야스와다에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단순히 인간들에게 사로잡혀 죽는 것보다 훨씬 암담한 전망이, 그저 공허와 공백으로만 이루어진 전망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