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소리는 몸보다 늦게 죽는다 (4)
벤트레스의 머릿속에는 목소리들이 돌아다녔다. 환각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상태에 적응해 가면서 의식의 형태도 함께 변하고 만 것이다. 폐허가 정화된 지금조차도 목소리는 여전했다.
큰 불편은 없었다. 그에게 생각이란 사유의 흐름을 직접 이끌어가는 일이 아니라 수십 갈래의 목소리 중에서 적절한 것을 골라내는 작업이 되어 있었다. 대화 상대가 깐깐하다면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니라면 손에 잡히는 걸 무엇이든 꺼내 보였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그런 태도를 눈감아 주었다. 아니면 한숨을 내쉬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이게 바로 정신 나간 사람의 특권이라는 거지.
"이 먼 타향까지 와서 수리공 노릇이라, 가문 어르신들이 기겁을 하시겠군. 날 보면 차라리 광대짓을 하라고 꾸짖으실 거야. 현명하신 제어공학자님의 의견은 어떠신가?"
첼리비다케는 벤트레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그 옆을 지났다. 표범 시체와, 연금술 폐기물 처리소에서나 나올 법한 수액 괴물들과,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오염체들이 서로 뒤엉킨 채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잔해 한복판에 솟은 것은 늑대인간보다도 높다란 균열이었다. 허공에 칼을 꽂아 넣은 뒤 그대로 그어 내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균열에 한 손을 담그고는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황금빛 마력 갈래가 넓게 퍼져 나가면서 보랏빛 장막을 봉합했다. 돌연변이는 모두 처리했으니 균열만 닫으면 이곳에서의 일은 끝나는 것이다. 이곳이라. 벤트레스는 그 문장을 입속으로만 발음해 보면서,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외곽 미궁은 황야의 새벽빛으로 만든 거대한 종이접기 작품 같았다. 이곳에서는 위와 아래가 역전되고 거리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단절되거나 교차하면서 하나의 구조체를 이루는 공간들. 교묘하게 엮인 통로들은 방문객을 언제나 잘못된 곳으로, 목적지와 무한히 가깝지만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호의 힘을 빌린다면 각각의 벽면을 뚫고 나아갈 수도, 고립된 곳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제어실 역할을 하는 중앙 동공으로 되돌아가는 것 또한 가능하다. 그 위대한 지혜로 한다는 일이 수리공 노릇이라니 기가 찰 일이다. 저 인간들은 맡은 임무에 아무 불만이 없는 모양이지만.
닫은 균열이 벌써 다섯 개였다. 이런 걸 내버려두면 야스와다 놈들이 곧바로 오염지대로 직진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신관들이 본격적으로 미궁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최대한 정리를 해 둬야 한다. 물론 싸울 준비도 빼놓을 수는 없다. 벤트레스는 쓰러져 누운 표범을 향해 다가갔다.
"그나저나 잠든 분께 제물로 바쳐졌다니 분명 여기에도 가문 어르신들이 계실 텐데. 혹시 이게 우리 작은할아버지신가? 바닥이 춥진 않으세요?"
그는 짐짓 친근한 투로 묻고서는 표범의 턱을 걷어찼다. 짐승의 몸이 출렁거리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안개와 같은 덩어리로 변했다. 균열에서 나타나는 표범들은 피와 살이 아니라 정순한 마력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였고, 이시 타브의 미약한 일부이기도 했다. 신의 영혼이 섞여 있다는 뜻이었다.
직접 확인해 본 바로는 표범 한 마리는 요정 일곱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은 제물의 격에 따라 주문의 효능이 달라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제물을 쓰다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숙련된 마법사에게 그런 장애물쯤은 사소했다. 우회로는 언제나 있다.
벤트레스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팔뚝을 째고서는 발밑에 피로 만든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주문의 섬세함을 증폭시키는 문양이었다. 영혼 파편을 떼어내고 충분히 작은 크기로 세공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 획을 그리는 순간 머리 위에서 쯧 소리가 울렸다. 균열 봉합도 끝났는지 첼리비다케가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피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께서는 마력 결정을 가지고 다니질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내가 바로 걸어 다니는 마력 지맥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앞으로도 계속 역겨운 짓을 벌일 생각이라면 제 근처엔 오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불결한 건 질색이거든요."
"자네도 알겠지만 제국의 역사에서 야스와다는 바단만큼이나 피와 가까운 도시였지. 우리 명문가의 선조들은 고문 기술자거나 심문관이거나 처형자였고, 덕분에 도살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첼리비다케가 등을 돌렸다. 키 큰 애인에게로 가서 야스와다 요정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떠들어야 할 테니 당분간 바쁠 것이다. 벤트레스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주문식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력 안개가 흩어지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정의 것이나 인간의 것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타오르는 듯한 보랏빛 광채를 띠고 있었다.
"환희와 비애는 성스러운 넋을 위한 옷이요, 비단으로 엮인 환희가 뭇 슬픔과 기쁨 아래를 누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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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悲歌)를 끝까지 외운 순간 조각이 작게 나뉘더니 위로 치솟으며 벤트레스의 어깨둘레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떼어 둔 영혼 파편은 다른 마법사에게 빼앗길 일도 없는데다가 제물로 바치기에도 훨씬 편하다. 신의 영혼을 쓰는 만큼 위력도 쏠쏠할 것이다.
이시 타브에게 그 자신을 봉헌하다니, 실로 재미있는 일이다. 우스운 사실은 그밖에도 몇 개가 더 있다. 잠든 분은 배교자가 바치는 제물일지라도 받아들인다는 게 그중 하나가 되겠다.
그건 세상의 엄정한 규칙 중 하나다. 보랏빛 마력 갈래는 영혼을 촉매 삼아 반응하고, 그만큼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 말이다. 일단 제물을 바쳤으면 그만큼의 힘을 주어야 한다. 비록 이시 타브가 보랏빛 갈래의 주인일지라도 원칙에 개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그 힘이 방향을 틀어 건방진 배교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건 다른 문제지만… 아직 그럴 만큼 의식이 명료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인 일이다, 잠든 분께서 이 광경을 똑바로 보았더라면 요정의 영혼쯤은 쉽게 찢어 놓았을 테니까.
제국 시절에는 그런 일이 곧잘 일어났다고 했다. 특히 명문가 사람들에게. 덕분에 공정한 재판관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제국은 오래전에 무너졌고 잠든 분은 심신이 편찮으셨다. 요정 하나를 감시하고 벌할 여력이 없다는 소리였다.
벤트레스는 자신의 넋이 멀쩡한 것에 만족하고서는 다른 일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멀찍이에서는 인간 소년과 늑대인간이 무언가를 논의하는 중이었고 꼬마들은 꼬마들끼리 붙어 있었다. 진지한 사람들보다는 꼬마들이 더 재미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피 떨어지잖아요!"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벨레다가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벤트레스는 다른 소매로 팔뚝을 닦아냈다. 마법진을 그릴 때 묻었는지 앞섶까지 엉망이었다.
"요정 피는 앞으로도 실컷 볼 텐데 이 정도쯤이야. 그래, 별불꽃 늙은이가 오는 중이라고 했지? 세 번째 균열을 닫을 때쯤에 소식이 왔으니까… 지금쯤이면 도착했으려나?"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이야기하는 중이에요. 중앙 동공에서 문제가 터졌다던데요."
"제어실에서? 추적자들이 벌써 거기까지 간 거야?"
벤트레스는 로안과 볼로디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떠오른 종이 구체는 3차원 구조도 모양으로 변한 채 이곳엔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제어실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니고요, 저쪽에서 우리 미궁을 역으로 뚫고 있대요. 벌써 공간 몇 개가 침입자한테 넘어갔다네요. 복구 절차 때문에 의견이 갈리는 중이에요."
"아니, 그렇게 실력이 좋은 놈이 있어?"
"그걸 나한테 물어 보면 안 되죠, 신관이었던 건 내가 아니라 아저씨인데요."
"흠, 어쨌든 정말로 요정 피를 봐야겠는데……."
그는 씩 웃고서는 클렘을 내려다보았다. 총을 품에 안듯이 쥔 채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난데없이 슈문에게 가호를 받은 데다가 이제는 오염물들을 소탕하는 데에 끌려왔으니 말이다.
잠깐, 끌려왔다는 설명에는 어폐가 있다. 학자들은 클렘을 데려가는 것에 너나할 것 없이 반대표를 던졌던 것이다. 영리하지도 않거니와 마법에도 능숙하지 않은 어린애가 가 봤자 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란드와르도 석연찮은 기색을 보였다. 반면 마타치치는 클렘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으리라 주장했다.
결국엔 클렘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총을 가져와서 로안이 만들어준 표적을 맞춰 떨어트린 것이다. 이백 걸음 너머에서, 날아다니는 얼음 새를 모두 명중시켰다면 정밀성은 증명된 셈이었다. 그게 바로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요정 꼬마가 여기에 있는 이유였다.
"저 오염체들이야 그냥 맞추면 그만이지만, 신관들은 보호장을 두를 수 있단 말이야. 빈틈을 못 노리면 한 명을 죽이기도 전에 탄환이 다 떨어질 걸. 재충전 속도가 얼마였더라―참, 그걸 내가 외우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아무튼 괜찮겠어?"
"사람은 머리를 맞으면 죽어."
클렘이 툭 내뱉었다.
"이런,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질 못했군. 여기까지 올 추적자들이라면 평범한 요정은 아니란 말이야.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을 테고. 네가 쏘아대는 마탄쯤은 어렵잖게 막아낸다는 거지. 사실 평생 별점술만 친 놈들도 나이가 충분히 들면 그 정도는 하거든. 물론 여긴 개활지가 아니니까 그런 걸 잘 이용할 수는 있을 거야. 이용해야 할 테고. 대신 난전 상황에서 마탄을 잘 명중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이거 참, 지하서고 관리자 주제에 전투 교관 흉내를 내려니 고역이군 그래. 임무는 모두 실패했고 3교구 직함도 뗀 지 오래인데 말이야. 어쨌건 무슨 뜻이냐면―"
실컷 설명을 늘어놓던 벤트레스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틀었다. 슈문의 파편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리?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변화였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을 뒤로 옮기자마자 발 앞의 공간이 종이가 접히듯 휙 기울어졌다. 그렇게 두 꼬마의 모습이 한순간에 세상 너머로 사라지더니, 견고한 벽과 바닥이 추상적인 격자무늬로 변하면서…….
소리가 멎었다.
슈문의 파편은 종이 공 모양으로 돌아갔고 공간 역시 온전한 형태를 되찾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두 꼬마를 제외하고. 벨레다와 클렘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