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소리는 몸보다 늦게 죽는다 (3)
나트람은 구조물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마력 갈래의 흐름을 흩도록 각각의 작용점에 보랏빛 마력을 주입하자 견고해 보이던 석벽이 아지랑이처럼 허물어지며 격자 평면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각각의 선은 허공에 필기구를 대고 그대로 그어 내린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이건… 뭡니까?"
"자네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를 못 해."
블리스키미르의 질문에 노인은 퉁명스러운 답만을 내어놓았다. 문외한에게 각론을 설명할 여유는 없다는 투였다.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가 펼치자 격자의 칸 각각에 고유한 문양이 떠올랐고, 격자 일부는 어두운 색으로 물들며 기묘한 경로를 빚어냈다. 이윽고 어떤 문양은 함께 모여들고 어떤 문양은 멀어지면서 거대한 구조도가 나타났다.
"도대체……."
입구를 뚫어낸 데에는 선해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건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블리스키미르는 짧게 신음하고서는 대기 중인 신관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정들은 하나같이 공포와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노인의 손끝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문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임한 제사장이 직접 원수장(元帥杖)을 쥐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나트람이 신관들을 이끌 것이란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요정들은 호사가적인 관심과 염려를 섞어 떠들어댔다. 일드얀이 노견을 내버리려는 모양이라고. 젊었을 적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추적자로 위명을 떨쳤다지만, 늙은이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것이 현명한 결정인지 모르겠다고.
그 의논은 모두 틀렸다. 혹은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지금조차도 신관들은 나트람이 지휘역을 맡은 게 합당한 일이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감히 그 말을 입 밖에 낼 만큼 용감한 자는 없었지만, 똑같은 의문이 그들을 휩쓸었다. 이 노인에게 지휘역이 주어진 건, 그가 구조물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어째서?
나트람이 금지된 마법에 정통했다는 것도, 이해가 신의 영토를 자유롭게 헤집을 정도라는 것도 지금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블리스키미르는 조심스레 자문했다. 은빛매의 주인은 이 점을 알고 있었을까? 일단은 그럴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지? 이 상황에서 고발장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텐데? 질문은 사슬처럼 이어졌고 블리스키미르는 한동안 묵상 속에 잠겨 있었다… 긴 시간이 흘러 노인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이끌어왔다.
"그래, 이제 모두 알겠군. 큰 틀을 등축정계로 두고… 결정축 셋은 수직이고, 격자점은 넷, 그리고 배위수는 열둘. 각각의 면이 다시 육방정계의 격자가 되어서… 여길 기점으로 좌우상이 나타나지. 부분적으로 통제를 벗어나긴 했지만, 완벽해. 그렇다면 제어 경로는……."
울림은 단조롭고 강세가 없었다. 듣는 이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중얼거리는 말들 같았다. 각인 문자 덩어리가 액체 위를 부유하는 얇은 운모 조각처럼 노인의 손끝을 따라 흘렀다. 수시로 자리를 바꿔 가면서 형이상학적인 점묘화를 생성하는 빛의 파편들. 팽창과 파열. 직선은 격자 위에 덧그려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이윽고 격자 너머의 공간이 공명하듯 형태를 뒤틀기 시작했다.
"이동하지."
나트람은 움직임이 멎고 석벽이 다시 자라나 격자가 있던 자리를 메울 때까지 기다렸고, 입을 열었다. 블리스키미르에게는 아무 감흥도 없는 목소리가 직전의 광경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안전한 겁니까?"
그는 가까스로 질문을 던져 놓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걸 물었어야 했다. 이런 변화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수를 쓴 것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신관들의 동요를 가라앉힐 만한 정보가 필요했다―그 자신을 포함해서.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설명이 필요합니다. 원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개략적으로라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트람은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블리스키미르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원 같았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이곳의 공간들은 고정적인 게 아니야. 제어 경로가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단 말일세. 우리에게는 실로 불리한 지형이지. 그래서 경로를 역산해 이쪽에서 먼저 공간을 뒤틀었네. 중추로 가는 길을 곧바로 뚫으려 했는데 저쪽에서 차단하더군―다른 허점을 찾아야 해. 확보한 통로 중에 잠든 분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 있어."
* * *
야스와다와 나르시소는 천 년간 도박을 벌였다. 판돈은 명문가의 창고에서 훔쳐낸 비약이거나 교구 내부 문건이거나 목숨이었다.
승리는 대개 학자들의 몫이었지만 한 번의 패배조차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비대칭적인 승률을 고정값으로 바꿔 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도망술과 미궁 구축. 작용점을 분산시키는 설계. 기능 단위로 분절되어, 하나가 와해되더라도 나머지에는 아무 영향이 없는 부속 주문들.
학자들은 슈문의 미궁에도 빠르게 익숙해졌다. 제어실을 뒤덮은 환영은 채광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 조각처럼 부드럽게 빛나며 조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의 격자 조각은 미궁의 각 구역에 대응되었고 부가적인 상태 정보를 수반했다. 이곳에서의 공간은 주문의 다른 표현형이었으며 복잡한 상호 역학이 적용되었다. 마력 갈래의 흐름은 완벽히 조화로웠다.
그리고 침입자가 발견되었다. 야스와다의 신관 무리는 외곽 구역 중 한 곳을 무력화시킨 후 어느 지점에 멈췄다. 학자들은 그들이 복잡하게 얽힌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으리라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상대는 주문을 파훼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이용하면서 통제권에 접근했다. 이번의 시도는 차단했지만 완벽한 해결은 아니었다.
"통제권을 얻어내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일곱 개 공간군이 우리 제어를 벗어났고요. 최소한 다섯 개의 핵심 분야에서 스승 단계에 올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떠나간 이들 중에, 그만한 능력이 되는 자가 있었던가? 야스와다에 붙잡힌 이들 중에서라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없어요. 만약 누군가가 저쪽에 협력하고 있다면,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일 겁니다.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요. 지난 한 세기 동안 나르시소 바깥에서 사라진 사람의 수는 열다섯을 넘지 않아요. 그들 모두가 야스와다로 넘어갔으리라고 추정하긴 어렵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제야 행동에 나설 이유도 없고요―그래요, 이건 핵심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지금이라도 제어 경로를 모두 차단하고 복구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저기에 있는 게 누구든 말이죠."
"하지만 복구 절차를 진행시킨다면… 가호의 영향력이 감소할 걸세. 우리 쪽에서도 통신이 끊기고 말아. 무력화된 공간들이 어떻게 변칙적으로 작용할지도 모르는 일일세. 신중하게 판단해야 해… 추가적인 침입 시도가 있나? 접근 위치가 어디지?"
"78-9-2 지점에서부터 간헐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있어요. 무력화된 공간 중 하나입니다. 일단은 해당 구역의 담당자들이 통제권을 되찾으려 하고 있지만, 기회가 별로 없어요. 더 지체했다가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갈 겁니다."
* * *
어떤 책에서였나, 이런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의 가장 큰 장애물은 순진성이라고. 삶의 구성요소는 케이크의 재료와 같아서, 조리법을 그대로 따르면 케이크가 완성되며, 다른 무엇이 나올 여지가 없다고 믿는 기질이 문제라고.
다섯 달쯤 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더란다. 로야페타 선물 거래소 최상층에서, 캄파놀로 종합금융사 건물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메기도가 로야페타 한복판에 마력 폭풍을 불러낸 날 이강현은 자신의 순진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느끼기만 했고 순진성의 함정을 벗어날 방법은 궁리하지 않았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한계였다.
이런 씨발, 뭔가 해 보려고 하면 오만 사건이 난데없이 튀어나와서 뒤통수를 쳐 대는데 인문학이고 자아성찰이고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작가나 철학자 같은 것들은 다 죽어버려라. 푹신한 쿠션을 깔고 앉아서 펜을 끼적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질 수 있다고 믿는 놈들.
강현의 내면에서 7.1채널 오디오 시스템이 고함을 재생했다. 내면에서만. 입이 있는데도 고함을 지를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애써 음량을 0으로 맞추고는 테네브로즈를 바라보았다.
"사제야, 어떻게 생각하냐."
"예?"
"지금 야스와다 애들이 미궁을 뚫고 있다잖아. 학자들이 거기 끼어 있대. 3교구 부제사장으로서 의견을 밝혀 보라는 거야."
<합나사>나 <생성원 고리>를 비롯한 황금빛 조각들을 절반쯤 모은 시점이었다. 제어실에서 통신을 시도했다. 종이 구체는 학자들과 연결되자마자 달갑지 않은 소식을 쏟아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편에 아주 뛰어난 와그다스 연구자가 있다고, 덕분에 지원을 모두 끊고 복구 절차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 그래요, 그 배신자가 도대체 누구랍니까?
학자들은 아는 바가 없었다. 티아도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이제 시뮬레이터에는 기대도 걸지 않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고가 터질 거라고도 예상했지만, 기분이 끔찍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긋난 계획은 언제나 마음에 상처를 낸다. 그런데 씨발, 이 새끼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왜? 이제 숨길 것도 없는데?
"저도 모르는데요."
"니가 그걸 몰라? 3교구 부제사장이었는데?"
"지하 감옥에 있던 학자들을 꺼내주긴 했죠. 죄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돌아갔고요, 여기서도 감사 인사는 못 들었습니다. 나으리께서 보시기에 저놈들이 3교구 신관이랑 손을 잡을 족속으로 보이십니까?"
그는 요정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간 축적된 경험이 아드레날린으로 변해 끓어올랐다. 이 새끼에게 뒤통수를 맞은 횟수를 세자면 두 손으로도 모자랐다. 깨닫지 못한 걸 합하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씨발, 합리적이지가 않았다. 저번까지는 저승의 일을 감추느라 거짓말을 했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솔로틀은 슈문과 동맹 관계인데다가 어둠달은 이미 망했다. 그렇다면 테네브로즈가 일부러 정보를 숨겨 가면서 이렇게 나올 까닭이 없었다. 벤트레스도 귀띔해준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몰랐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와그다스 학자들이 야스와다에 협조할 이유 또한… 그 순간 생각의 단편이 번뜩이며 맞물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에 떠오른 유령 소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르신, 별채에 감금당하기 전에는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연구 기록물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렇죠?"
"모르오. 이전에도 여러 번 말했다시피, 예전 일들은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떠올리려 하면 두통이 올라오거든……."
헤이딘의 미간이 좁아졌다. 청문회 자리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편두통 환자 같은 표정이었다.
"확신을 가져야 할 일은 아니에요. 그냥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나트람이 직접 고발장 건을 무마했어요. 그러면 오두막에 남은 흔적을 처리한 것도 나트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연구 기록물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치면 어떻겠습니까? 별불꽃 본가 어딘가에는 아직 종이더미가 남아 있고, 나트람은 그걸 보면서 원리를 이해하게 됐다 치면요?"
비약에 가까운 추론이었지만 뒷받침할 정황은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나트람에게 통솔자 역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례적인 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퇴임한 제사장이 현장에 나서는 경우는 없다고. 그때의 대화는 나트람이 일드얀의 눈 밖에 났으리라는 추측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나트람이 바로 적임자였다면?
"그럴 리가. 형님이 지혜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내게 뭐라도 물어봤을 거요. 영리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연구를 할 작자는 아니지."
말하는 게 꼭 칼린카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리라도 들은 투였다. 사람이 손에서 불도 내뿜는 세상인데 고양이가 날아다니면 안 된단 말인가? 더 따져 보고 싶었지만 치매 환자를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면이 있긴 했다…….
강현은 재차 내면의 비명을 억누르고서는 마타치치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학자들과 이론적인 면을 논의하고 있었다.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끔찍했다. 한껏 진지해졌던 정신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암울한 전망이 뇌리를 뒤덮었다. 그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려 애쓰며 테네브로즈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의견은 어떠냐. 너도 나트람이랑 같이 살았잖아."
"같이 안 살았는데요. 그 늙은이는 본가에 있었고 전 오두막에서 지냈단 말입니다. 쉬는 날에 본가에 놀러 가면 영감이 욕을 했습니다."
"너는 씨발, 내가 지금 그 대답을 들으려고 묻는 거 같아? 니가 생각하기엔 그래?"
"아니, 같은 집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영감이 자기 방에서 뭘 하는지를 제가 알아야 합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말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