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94화 (195/258)

194화 소리는 몸보다 늦게 죽는다 (1)

반신들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윰 시밀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저승에 대한 기록을 봉했다. 자신들이 한때 요정이었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늑대를 잊게 되었다. 그들은 땅에서 번성했으며 서로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노예가 주인 가족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요정들이 크게 놀라 그런 짓을 저지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아이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아이가 제게 살려 주기를 청하였으나 돕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살과 뼈를 요리해 먹었으며 제게도 주었습니다. 화를 참을 수 없어 주인을 죽였습니다."

"그 아이가 네게 소중했느냐? 네 주인이 너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갔느냐?"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족은 네게 기쁨을 주고자 좋은 음식을 대접한 것이다. 왜 화를 내었느냐?"

노예가 침묵을 지켰으므로 요정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 소식은 모든 도시로 퍼져나가 많은 사람이 사정을 궁금해 하게 되었다.

요정의 마음은 너그러워 평생을 앗아간 이에게도 앙갚음하지 않았고, 사람을 죽이더라도 그것이 서로 간에 약속된 일이라면 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화낼 것 없는 일에 화를 터뜨리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조차 쉽게 죽였다. 이에 황제가 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을 알아내도록 시켰다.

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몇몇 인간의 영혼에 결함이 있음을 밝혀냈다. 그것은 요정의 넋이 인간으로 변할 때 생겨난 결함으로 고칠 수 없는 광증이었다. 따라서 요정들은 그런 죄인을 먹거나 제물로 바치길 꺼렸다. 병든 짐승을 신께 봉헌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황제는 깊이 고민하여 인간을 다스리는 법률을 따로 마련했고, 합당한 이유 없이 주인을 해한 노예는 대평야와 산맥 사이의 빈 땅으로 보내 그들끼리 살게끔 했다. 이렇게 쫓겨나거나 도망친 노예가 모여 작은 마을이 생겨났으며 그 이름은 세카두가 되었다.

마을이 점차 커져 작은 도시가 되었을 때 나그네 둘이 찾아와 대화를 청했다. 인간들은 그들이 환술을 쓴 요정임을 알고 때려 죽였다.

그러나 주검을 마을 바깥으로 옮기려 하자 피 흘리던 몸은 갑자기 작은 장난감으로 변했고, 날렵한 사냥개가 되더니, 다시 원래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엎드렸다.

"우리가 너희를 벌하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우리는 너희에게 태평을 주러 온 것도 아니요 칼을 주러 온 것도 아니다. 다만 이야기를 듣고 전하고자 할 뿐이다."

"누가 우리의 사정을 궁금히 여깁니까? 땅의 사람입니까, 당신들만큼 거룩한 존재입니까?"

"저승의 청지기께서 그것을 원한다."

*  *  *

솔로틀은 어떤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저승에는 영혼으로부터 씻어낸 기억을 보관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서로 충돌하는 증언과 객관이 결여된 판단들, 정제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고통과 슬픔, 망각 속에 희미해지고 뒤틀린 사건,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목소리들, 그리고 공백. 그 모두가 솔로틀의 수집품이다.

하지만 직접 수집품을 살피는 일은 거의 없다. 기억의 양은 몹시도 방대하거니와 그 삶을 하나로 묶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원사의 업무 중 하나는 가치 있는 목소리를 찾아내 청지기에게 전하는 것이다. 잊힌 자, 말할 수 없는 자,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한 자들이 정원사에게 발견된다―그들의 기억 또한 불완전할지라도.

슈문은 모든 것을 기록한다. 그는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의 궁전은 지식의 총량이 늘어남에 따라 무한히 확장된다. 선별되고 공인된 진실만이, 정련되어 활자에 갇힌 기억만이 여기에 놓일 수 있다. 학자들의 역할은 궁전의 크기를 넓혀 나가는 동시에 보존할 것과 아닌 것을 가려내는 것이다.

각각의 문서는 서로를 지지하거나 반박하면서 더욱 견고한 진실을 만들어 나간다. 더 많이 참조된 문서는 서가의 중앙에 놓이고 지지받지 못하는 해석은 외곽으로 밀려난다. 새로운 맥락 속에서 새로운 진리가 생겨나고 이전의 진리가 몰락한다. 어떤 학자는 외곽에조차 자리가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살피기도 하지만, 궁전은 그러한 시도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

*  *  *

이면 세계를 불러내는 동시에 나르시소의 중앙 동공은 미궁의 제어실로 변한다. 제어실은 완전히 단독적인 공간이지만 다른 모든 지역과 이어진 공간이기도 하다. 가호를 받은 사람들은 슈문의 파편을 통해 제어실과 소통하며, 외부 미궁과 오염지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오염지대는 영토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의식과 실재가 뒤섞이고, 글자로만 남은 기억들이 살아 움직이며, 마음이 몸을 얻는다. 그런 현상은 모두에게 일어난다. 이시 타브가 거느린 영혼들도, 슈문의 파편도, 요정 유령도, 모두.

"여전히 떠다니시는군요."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있소. 다만 공중에 있는 편이 더 익숙해서……."

"그냥 목소리는 멀쩡히 들리는데 허공에 있는 게 낯설어서 그래요. 목소리야 벨레다의 방에서 몇 번 들었지만 그때는 바닥을 밟고 계셨잖습니까."

"그거야 영토에 따로 각인을 해 둔 덕분이라오. 설계를 조금 뜯어고치면 몸을 가진 채로 지금처럼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처음 영토를 꾸밀 때에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해서―"

벨레다의 거처에 적용된 각인 기술에 대한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말을 잘못 꺼낸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들려오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헤이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몸 너머로 지금부터 발을 들일 곳이 언뜻언뜻 비쳤다. 실체 있는 장소라기보다는 악몽을 마구잡이로 이어 붙인 결과물 같았다.

하기야 오염지대는 슈문의 무의식이기도 하니까 아예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란드와르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꿈 한번 고약하게 꾸시는군. 빛으로 만들어진 폭포는 위로 치솟고 삐죽삐죽한 풀밭은 초록색 송곳처럼 날이 서 있다. 기묘한 형태의 생물. 혹은 생물조차 아닌 무언가. 반으로 잘려나간 호수의 단면과 지면 곳곳에 돌출된 척추. 깜박이듯 나타났다가 깜박이듯 사라지는 보랏빛 표범 무리…….

"총이 먹힐까 모르겠는걸요! 한번 쏴 봐도 될까요?"

경쾌한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란드와르는 혼란스러운 풍경을 곱씹길 멈추고 마타치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왼손 검지에 껴둔 나무반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더니 품에 안은 마공학 기기가 주의를 사로잡았다. 총이라기보다는 손대포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굵기는 팔뚝 두 개 이상. 마탄량은 다섯 발. 연사 속도나 재충전 속도는 느리지만 파괴력만큼은 발군이었다.

"먹힐 겁니다. 다 쏘기엔 아깝고, 저놈 머리만 한 번 맞춰 봐요."

란드와르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표범을 가리켰다. 마타치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능숙한 태도로 부품을 조이고 풀더니 조준경을 왼쪽 눈에 맞춰 들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오지 탐험가를 연상시키는 흥분과 긴장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타치치의 손가락이 달싹인 것은 표범이 가장 가까운 책장 옆을 돌아 나올 때였다. 거친 굉음이 귓전을 치는 동시에 황금빛 덩어리가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몸뚱이는 물에 빠진 잉크 덩어리가 풀려 나가듯 허물어졌지만 소리는 그 후에도 남았다.

"한 발로 충분한 건가요? 이러다가 바로 앞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데요!"

"죽었습니다. 소리는 몸보다 늦게 죽어요. 여기에서는 원래 그럽니다."

원래, 라는 낱말을 뱉자니 기분이 묘했다. 세계의 비밀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괴리를 두고, 원래. 신이 되어놓고는 장담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 한심스러웠다. 엉망진창인 시뮬레이터에는 이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이번에는 시뮬레이터가 어떤 식으로 엿을 먹일까? 학자들이 사고를 칠까, 아니면 외부 미궁이 오작동을 시작할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마타치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시가를 빼어 물었다…….

일단 한 대 태운 란드와르는 시뮬레이터의 완성도는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을 뻗어나갈수록 기분이 끔찍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걸 제하더라도 골머리를 앓을 문제는 태산으로 남아 있었다.

"나으리,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요."

"뭐냐."

"나트람이 지금 출발했답니다."

"벌써?"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 안일한 질문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제단의 종이 구체를 깨트리고서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그건 학자들이 제어실에 적응하는 데에 걸린 기간이기도 했다). 미궁이 올라오는 걸 보고는 곧바로 소집령을 내린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그렇게 빨라?"

"황무지 전역에 차원문이 열일곱 개가 있습니다. 거기에 감시관을 두 명씩 보내 놨다던데요. 이상 현상이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라고요. 신관들이야 별이 뜬 후로 줄곧 대기하고 있었고요."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로 보여?"

"궁금하지도 않은 걸 왜 물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됐다, 관두자."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은 란드와르는 망치를 불러내 손에 쥐었다. 이제부터는 할 일이 많았다. 무의식 영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부품과 도면 조각을 모아 중추를 수리하는 게 첫 번째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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