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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92화 (193/258)

192화 악의 계승 (1)

헤이딘의 눈이 멀고서는 한 해가 흐른 후 나트람은 셋째를 보았다. 아들이었다. 그는 늙어 둔 자식에게 네르갈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사이라크에게 그랬던 것처럼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  *  *

별채는 거대한 저택과 그 부속 건물들에 비하면 장난감만큼이나 초라해 보였다. 한때 헤이딘이 여기에 있었고 메기도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적막뿐이었다. 죽음이라는 말에 뒤따르는 단절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한 명이 사라지고 두 명이 사라질지라도 세계는 어제와 같으리라는 사실이 덩어리진 채 모인 듯했다.

"난 당신이 싫어."

네르갈은 별채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키가 작은 소년에게서는 음침한 분위기가 풍겼다. 검고 곧은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왔고 눈동자는 항상 허공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꼭 몸을 한껏 웅크린 새끼 칼린카 같다고, 잘못 건드리면 발톱에 살점이 뜯길 거라고들 수군거렸다.

친구는 하나도 없었지만 네르갈의 마법 실력은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이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다. 단검 던지기의 명수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광대놀음을 보고 연습한 것뿐이었지만 이제는 도시의 어떤 놀이꾼보다도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을 수만 번은 했다.

네르갈은 단검자루를 느슨하게 쥐고는 침실 창문을 향해 던졌다. 칼날이 아니라 손에 무색 마력을 실어서. 칼날에 실었다가는 열다섯 걸음을 벗어나자마자 힘을 잃고는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깨진 창의 구멍이 게걸스러운 짐승의 입처럼 단검을 집어삼켰다. 네르갈은 먼지 낀 그늘을 노려보다가 별채에 발을 들였다.

메기도가 죽은 지 몇 달도 채 흐르지 않았지만 창은 모두 깨졌고 가구에는 흙먼지가 자욱했다. 나트람이 직접 치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누가 보았더라면 버려진 채로 십 년은 지난 줄 알 것이다.

바닥에는 소년의 것이 아닌 신발자국이 좁은 길을 만들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제 동생이 남긴 종이더미를 벌써 수천 번은 읽고 또 읽었다. 그 손발은 박제로 만들어 서재에 두었고 황금빛 각인 기둥은 은밀한 곳에 숨겼다. 그러니까 그를 닮은 아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네르갈은 흔적을 따라가면서 발끝으로는 그걸 밀어 지웠다. 티끌로 만들어진 길은 침대 앞에서 멈췄다. 침대는 다른 가구들이 그런 것처럼 엉망이었다. 환영 그림이 베개와 이불 사이에 끼인 채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십 해 전에 만들어진 가족화였다. 머리카락이 검은 아버지가 보였고 엄마가 보였고 죽은 누나가 보였고 스무 살의 메기도가 보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이 없었던 시절을 노려보다가 윗몸을 수그렸다. 손이 나트람의 얼굴 부분을 관통해 지나가고는 그 뒤의 베개에 가 닿았다. 손끝에 칼자루가 잡혔다. 힘주어 단검을 뽑아내자 먼지가 훅 끼치며 콧속에 매캐한 느낌이 들었다.

기침을 잇달아 터뜨린 네르갈은 짜증스레 가족화를 내던졌다. 각인이 새겨진 도자기판이 반으로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빛이 일그러지는 모습은 허망한 목소리들이 영원할 것처럼 오가다가 뚝 멎는 찰나를 연상시켰다. 언젠가 이곳에서 메기도에게 외친 적이 있었다.

― 내가 가주가 되면 제일 먼저 형을 백치로 만들어서 가둬 놓을 거야. 아버지가 삼촌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형이 시끄럽게 울 일도 하인들을 괴롭힐 일도 위험하게 돌아다닐 일도 없겠지. 형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조용히 쉴 거야. 그 애완용 생쥐들이나 돌보면서. 어차피 형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반면 네르갈에게는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가주가 되어 형과 엄마와 하인들을 풀어 줘야만 한다는 것. 그러려면 아버지를 죽이고 누나도 죽여야 한다는 것. 이대로라면 사이라크가 직분을 물려받을 테니까. 그 계획이 얼마나 옳고 그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네르갈은 자신이 태어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다.

엄마는 거주구에서 온 평민이었고, 나트람은 반려를 창고의 궤짝이나 푸대자루 따위로 대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투명한 듯 지각되지 않는 무엇이었다. 하인들은 명문가가 아니라면 피붙이조차 멸시하는 남자가 사랑하지조차 않는 여자를 집안에 들인 이유를 의아하게 여겼다.

사이라크는 그 사실에 치를 떨었다고, 그래서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했다. 오래전에 죽어 없어진 피송곳니 친척과 자신을 견주어 보면서. 나트람이 자식에게 냉담한 것이 천한 피 때문이라 믿으면서. 바보 같은 일이다, 아버지를 진작 죽였더라면 다들 이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설령 지금이라도.

메기도는 죽었고 사이라크도 죽었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남아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랑은 다르게 사람을 죽이는 법은 몰랐다. 대신 엄마는 화내지 않았고 나트람이 없는 곳에서는 네르갈을 안아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3교구 제사장이었던 노인보다 훌륭한 셈이다.

네르갈은 단검을 챙겼다. 마당으로 돌아가 별채를 눈앞에 두자 등 뒤에 도사린 저택이 보이진 않아도 지각되었다. 모두들 죽은 것처럼 조용한 볕에 잠겨 다니는 그곳. 차라리 문을 여닫을 때마다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더 살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는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밤이 되도록 여기에 있으면 엄마가 걱정할 것이다.

그는 몸을 돌렸다. 장미덤불이 울타리를 넘어 하늘을 가리도록 자라 있었다. 잎사귀 사이로 저택의 한쪽 모서리가 보였고 모랫빛 벽이 보였고 그 뒤편으로 비스듬히 구부러져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누군가가 거기로 오고 있었다. 네르갈은 노인과 그 뒤에 선 남자를 알아보았다. 은빛매 사람들이었다.

헤이딘이 별채에 갇힌 것도 메기도가 넋이 나간 것도 모두 저 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나트람은 제사장 자리에 눈이 멀어 잠자코 따랐다고, 엄마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막 별채 울타리 앞을 지나고 있었다. 소년은 덤불에서 떼어낸 잎에 핏빛 마력을 담았다.

단검을 쏘아 사람을 죽이려거든 칼날이 지면과 직교하도록 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갈비뼈에 막혀 떨어지고 만다. 비스듬히 눕혀 보내야만 그 사이를 가르고 심장을 찌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잎을 두어 개 휙 던져서, 하나는 목을 가르고 다른 하나는 가슴팍을 파고들도록…….

"아이가 장난을 치는구나."

노인의 말이었다. 하나는 가슴팍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고 다른 하나는 경로가 꺾이면서 남자의 뺨에 길고 얕은 상처만을 남겼다. 남자는 고개를 슬쩍 돌려 울타리를 바라보았다. 쭉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서 흔들리더니 보랏빛 마력 줄기가 네르갈을 옭아맸다. 덤불을 돌아오는 듯 발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은빛매 사람 둘이 저녁놀을 가리고 소년 앞에 섰다. 올빼미가 먹잇감을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막내로군. 몇 살이지?"

"아직은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서른도 못 되었을 겁니다."

"두 해만 있으면 나도 어른이야!"

네르갈이 으르렁대자 남자의 얼굴에 이죽거리는 기색이 떠올랐다. 핏줄기가 외눈안경의 줄처럼 뺨에 일그러진 선을 긋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나이가 많군―그런데도 네 아비에게 배운 게 없어? 혹은 배워서 이런 건가? 첫째 가문의 주인에게 이런 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느냐?"

"죽여 봐! 내가 죽어도 그 작자는 눈도 깜짝 안 할 걸!"

남자의 시선이 판결을 청하듯 대모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네르갈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네 아비가 그 나이였을 때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줄곧 기억하고 있었지. 그런데 너는 생쥐가 맹수 흉내를 내려 하는구나."

"조용히 넘어가시렵니까?"

"위험할 것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 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지요."

"어린 것에게 화를 내거든 너만 꼴이 우스워지는 법이다."

"놀이에 어울려주려는 것뿐입니다."

노인은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얼굴은 빛을 뒤에 두어 어두웠고 저물어가는 햇볕이 머리 위에서 찌르듯 했다. 네르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야가 좁아지는 찰나 남자의 손가락이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목이 따끔거렸다. 손등으로 목덜미를 훔치자 피가 묻어 나왔다. 그리고 웃음소리.

"이거 어렵군요. 하마터면 죽일 뻔했습니다."

"닮아 가는구나."

"대모님은 말씀이 심하십니다."

노인은 그렇게만 꾸짖고 더는 답하지 않았다. 네르갈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무언가 뜨거운 게 눈 뒤에서 울컥거렸다. 이 사람들이 가기 전까지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죽일 작정을 해 놓고 울면 꼴이 사납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눈가가 축축해졌다.

턱 끝에 눈물이 방울지는 게 느껴지더니 온갖 냄새가 섞여 났다. 미지근한 저녁 공기, 장미덤불의 아릿한 향, 콧속에 남은 흙먼지. 울 때에는 모든 냄새가 선명해진다. 눈도 귀도 먹먹해져서일 것이다. 네르갈은 그런 느낌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울면 안 되는데.

나트람은 그가 잘 우는 것을 두고 어미의 피 때문이라고 했다. 거기에 자신의 몫은 일절 없다는 것처럼. 없을 것이다. 그 작자는 태어났을 때에도 울지 않았을 테니까. 낄낄거리던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네르갈의 눈가를 닦고는 목을 감싸 주었다. 꼬마를 울려 놓고 귀여워하는 친척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갔다. 네르갈은 그 자리에 남아 조금 더 울다가 화풀이하듯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웃옷이 피로 물들어 엉망이었다. 엄마에게로 가면 걱정만 시킬 테니 먼저 러스터를 보아야 할 것이다.

*  *  *

일드얀이 헤이딘의 일을 들어 나트람을 설득하는 동안 쉭겐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협의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수레를 타기 위해 길을 돌아 나오던 와중 나트람의 어린 자식을 마주쳤고, 암살 시도를 눈감아 주었다.

"피는 왜 닦아 주었느냐?"

은빛매 장원으로 돌아온 일드얀은 테라스에 앉아 담뱃대 를 빠끔거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설대는 손길이 들어 매끈거렸고 연통에는 매 부리 장식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푸른 연기가 저녁놀과 함께 가라앉으며 어둠의 일부가 되어갔다.

"그 나이답게 우는 모습이 하찮고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조만간 죽는 꼴을 볼지 모르는데도?"

일드얀은 질문과 함께 지난 삶을 반추했다. 그녀는 자신이 탐욕스럽고 맹렬한 사람으로 여겨지도록 최선을 다했다―모든 결정이 첫째 가문을 위한 것으로 보이게끔. 그 이면을 아는 자는 아주 적었다.

나우파나에 파견된 추적자들은, 실패했다. 황무지에는 더 많은 추적자가 보내지겠지만 의회는 그 결과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요정 모두를 위한 일을, 하지만 다른 가문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거야 아이의 운이지만 이건 제 소관이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로구나."

가만히 연초를 태우던 일드얀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쉭겐을 보았다.

"네 동생 목숨이 간당간당하다지."

"치유사가 말하길 내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습니다."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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