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와그다스의 후예 (8)
란드와르는 일단 클렘을 방에 넣었고, 마타치치를 볼로디아에게 인계한 뒤, 하던 일에 다시 착수했다. 하던 일이라고는 중앙 공동 외곽을 홀로 어슬렁거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학자들이 하도 귀찮게 엉겨 붙는 탓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 두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화신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개 같은 놈들이었다.
<관심을 받고 싶으신 건가요, 조용히 있고 싶으신 건가요?>
베네수엘라 잡지나 다시 읽어 줘요.
예리한 지적을 한 문장으로 일축하자 티아는 이스트리아 소설책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장르는 실로 다양했다. 요정과 인간의 비극적인 로맨스부터 나우파나 폐허에 발을 들인 탐사대원들이 차례대로 미쳐 가는 호러까지(여기에는 작가의 실제 체험담이라는 홍보문이 붙어 있었다).
아니, 이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꺼냈어야죠.
그리고 란드와르는 열여덟 시간 동안 오디오북 서비스를 만끽했다. 세 번째 장편 소설은 일종의 스릴러였다―벤 라이히는 상업 가문의 일원으로서 경쟁자인 드코트니에게 큰 분노를 느낀다. 그는 결국 살인자의 본능을 일깨워 드코트니를 죽이고 마는데. 정보사 사제, 링컨 파웰이 명문가 출신 요정과 함께 사건의 내막을 추적해 나간다…….
17장, 모든 진상이 밝혀진 후 파웰의 말―‘하지만 라이히는 드코트니를 죽인 진짜 이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징벌을 내리려 했어요.’ 장면이 바뀌고, 짐스 박사와 파웰의 대화. ‘그는 분명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정신의 어떤 부분만 아니었더라면 우리 세상에 엄청난 도움이 됐을 겁니다. 만약 그걸 고칠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마지막 문장. 과거에 고통이 있었다. 앞으로도 다시 고통이 있으리라
1)… 멋진 이야기였다. 란드와르는 잠시 여운에 젖어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여운을 깼다. 클렘퍼러였다.
1)
"물어볼 거 있어서 왔어."
"나 바쁘다."
란드와르는 심드렁하니 답했다. 이 꼬마한테서 화신 대접을 받겠다거나, 최소한 존댓말이라도 듣겠다거나 하는 포부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그의 소망은 하나뿐이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지금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는 것.
"안 바빠 보이는데."
"계속 귀찮게 굴면 이모 부른다."
"안 돼. 이모가 나오면 혼낼 거라고 했단 말이야. 몰래 나온 거야. 대답만 들으면 바로 갈 거야."
란드와르는 이 꼬마를 동공 한복판에 벌세워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건 또 귀찮은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빨리 대화를 마치고 치우는 게 나았다.
"말해 봐."
"마타치치가 막대기 들고 싸우러 간다고 했잖아."
"오냐."
"내가 마타치치보다 더 잘 하는데."
그래, 용사 노릇을 해 보고 싶다는 거지? 총은 질색이라지만 영웅담에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외부조에 클렘퍼러를 끼워 보낸다면 쓸모가 있을 터였다. 미궁은 특성상 숨을 곳도 많으니만큼 저격의 효율이 극대화된다. 적당한 곳에 엄폐한 채 신관들의 머리만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핵심적인 역할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마탄의 위력은 평균적인 인간 마법사에 비하면 뛰어날지라도 추적자들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쉽게 막히고 말았다. 난전 상황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두세 놈이라도 잘 맞추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가호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애를 위험한 싸움에 끌고 나가면 안 된다는 강박과 인재를 썩힐 수는 없다는 강박이 서로 충돌했다. 결국엔 전자가 이겼다. 클렘이 말을 잘 들을까, 하는 걱정도 컸다.
"성년식 치르고 와라."
"노랑머리는 열여덟이래. 나보다 어려."
"걔는 내용물이 할아버지고."
"내가 어른 되려면 십 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그러면 막대기를 못 쓰잖아. 인간 세상에서는 금지라면서. 마타치치한테 얘기 들었어."
"그것도 그렇지."
"그러면 어떡해?"
슬슬 짜증이 이성을 압도해 왔다. 란드와르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이건 그가 서른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기도 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사는 거지. 원래 기회라는 게 사람 좋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세상이 너한테 대고, 좋은 기회가 있는데 넌 못 하지, 하고 약을 올린다는 소리다. 하긴 어려서 모르겠지. 모르면 이번 기회에 배우고……."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클렘퍼러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홱 달려 나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란드와르는 꼬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는 어린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은 원래 꿈속에서는 대통령도 과학자도 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이건 그냥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들 앞에서 해도 재수가 없을 소리였다. 이런 젠장. 란드와르는 사태를 수습할 요량으로 꼬마를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
초기 상태의 영토는 순전한 공백이다. 공백이란 가구가 일절 없는, 사각형의 깨끗한 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바닥도, 천장도, 벽도. 거기에 물리적인 실체를 부여하려면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다행히 여기까지는 쿠벨릭의 도움으로 빠르게 했다.
하지만 필요한 주문들을 모두 새겨 넣는 데에는 한참이 더 걸렸다. 벨레다는 마지막 획을 그리자마자 사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방은 장관이었다. 각인 문자가 모랫빛 벽을 뒤덮었고, 황금색 빛줄기가 그 사이를 흐르며 벽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영토를 사람이 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데에 쓰인 것을 제외하면 여기에 적힌 주문은 고작 여덟 종류였다. 똑같은 각인을 종류별로 백 번은 넘게 새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장된 마법은 일회용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모아야 했다.
"어둡게."
정해둔 시동어를 읊자 빛의 세기가 약해지며 어둠이 밀려들었다. 희미한 빛은 여전히 남아 달밤에 이는 파도처럼 철썩였지만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포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미뤄 두었던 졸음이 몰려왔다. 그리고…….
"아."
벨레다는 짧은 신음에 잠이 깼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눈을 떠서 상대가 아, 소리를 낸 건지, 그 소리에 눈이 뜨인 건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녀는 누운 채로, 고개만을 돌려 울림이 온 곳을 바라보았다. 쭈그려 앉은 클렘이 보였다.
"내가 깨운 거 아니야. 난 가만히 있었어. 그냥 보기만 했어."
목소리가 졸음 너머에서 윙윙 울렸다. 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왜 왔냐고 물어야 하나? 질문을 붙잡고 이어가기에는 피곤이 너무 깊었다. 벨레다는 다시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끼며 가만히 있었다. 클렘이 계속 말했다.
"난 어려운 마법은 못 써. 계단 미궁 만드는 게 끝이야. 근데 그거 가지고 이런 짓이나 했다면서 어른들한테 엄청 혼났어. 방에만 들어가 있으래. 나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어차피 평소에도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그래서,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소리는 의미로 바뀌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졌고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한 차례 뛸 때마다 잠이 깨고, 잠이 오고, 잠이 깨기를 반복했다. 마치 무한한 회전문 속에 갇힌 기분이다… 꿈이 불쑥 튀어나와 눈앞을 가리더니 이제는 다시 요정 소녀가 보였다. 아직도 혼자서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잠 좀 자게 내버려두면 안 되나?
"…마타치치가 너랑 같이 간대. 마법이 아니라 막대기를 잘 써서 그렇대. 그게 쓸모있는 건 처음 봤어. 근데 화신이 맨날 오는 건 아니잖아. 이거 다 하면 다시 예전처럼 살 거잖아. 그러면 막대기도 쓸모없고 나도 쓸모가 없잖아."
하지만 짜증을 내뱉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앓는 소리만 길게 흘리던 벨레다는 가까스로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알고는 있었는데, 떠오르는 낱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야."
그리고 다시 잠기운이 벨레다를 덮쳤다. 클렘이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해지니 좋았다. 꿈속에서 벨레다는 다시 꿈을 꿨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푹신한 베개를 베고, 푹신한 이불을 덮는 꿈이었다.
* * *
란드와르는 클렘퍼러에게 사과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대신 꼬마는 벨레다의 곁을 맴돌았다. 벨레다는 그 상황에 적잖은 당혹감을 느끼다가… 그냥 즐기기로 결론내렸다.
한편 마타치치와 첼리비다케는 한림원 총장 자리 문제로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 다른 학자들은 늑대인간들의 땅에서 교수 노릇을 할 만큼 개방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내심 신경을 쓰는 듯했다. 몇몇이 볼로디아나 로안을 찾아가서 한림원의 운영방식을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와중 벤트레스와 쿠벨릭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의외인가? 덕분에 첼리비다케는 벤트레스를 일종의 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놈을 만날 때마다 예민하게 굴었다―그리고 쿠벨릭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의 추태를 즐겁게 관람했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학자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갈무리했고 벨레다는 예비용 주문을 모두 새겼다. 로안도 타일라프람에 들러 마력 증폭구를 바꿔 왔다. 시나리오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참, 한 명은 예외였다.
"편해 보인다."
란드와르는 은발의 요정을 내려다보았다. 이 중요한 시국에 어디 갔나 했더니 구석진 곳 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세카두 저택에서 하던 짓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불편한데요."
"넌 앞으로 침대 압수다."
으르렁거린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일으켜 세운 뒤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모여든 학자들이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나머지 일행은 벌써 제단 앞에 서 있었다. 제단은 널바위 위에 사람 머리보다 약간 큰 종이 구체가 둥실 떠오른 형태였다.
<곧바로 가동하겠습니다.>
티아의 속삭임과 동시에 어두운 기운이 왼손을 감쌌다. 아즈리온의 권능이었다. 그 상태로 종이 구체를 움켜쥐자 각인과 쪽문은 석벽 너머로 후퇴했고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빛 조각이 사방에서 솟아 올라오며 각인에 쓰이는 문양들을 형성했다. 학자들은 일시에 감탄을 터뜨렸고, 매혹된 표정으로 변화를 지켜보았다.
마법 그 자체인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동굴은 반구 형태의 공간으로 변해 있었고 벽면은 아무 빈틈이 없는 사암질이었다. 란드와르의 시선은 그 위에 남은 황금색 측지선(測地線)과 평행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평판 화면이 관리실의 CCTV처럼 미궁 곳곳을 비추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란드와르는 빌딩 관리인 시절의 기억이 낭만을 깨부수기 전에 생각을 멈췄고, 자신의 손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물을 떠내듯 구부린 손바닥에는 진득한 황금빛이 담겨 있었다. 빛이 고운 모래알처럼 밑으로 흐르더니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면서 몇몇 사람들의 발밑에 고리 무늬를 그렸다. 가호를 받았다는 표시였다.
"됐다."
확인 차 왼손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펼치자 사과 크기로 작아진 종이 구체가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구체를 지도로 바꾸려면 다른 손으로 구체를 가볍게 돌리면 된다. 지구본을 돌리듯이. 여기까지는 게임과 같았다…….
"우리 중에도 하나가 있습니다!"
미궁의 지형을 살피던 란드와르는 예상치 못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이 한 줄기, 학자들 사이로 뻗어 있었다. 그 끝에 선 사람은 하나. 혹은 요정. 혹은 애. 클렘이 뚱한 표정으로 종이 구체를 불러냈다 되돌려 보내길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엔 소원을 들어줘야 할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얘를 데려가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