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와그다스의 후예 (6)
란드와르는 벨레다가 허공을 향해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꼬마는 쿠벨릭과 함께 사라져서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티끌 같은 희망이 분노로 화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카스바에서 안 죽이고 살려줬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다행히도 그 말을 벨레다에게 직접 내뱉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학자들에게 조금 더 시달리자 화낼 기운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자신은 수학도 논리학도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고, 그 주제를 계속 논의했다가는 당신들을 다 육전으로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외우게끔 한 다음에야 테네브로즈가 저승에서 돌아왔다.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건강해 보였다.
"편해 보인다?"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는데요."
"난 고생했는데 넌 잘 지낸 거 같다고."
순간 그럴듯한 가설 하나가 뇌리를 쳤다.
"너 혹시… 일부러 안 나온 거냐?"
"예?"
"숙취는 진작 풀렸는데 오기 싫어서 안 온 거지? 귀찮아서?"
"전 나으리 때문에 꼬박 앓았는데 이제는 아픈 걸 가지고 타박을 하시다니요. 나으리야말로 쓰러져 누운 시간이 저보다도 한참 많은데 제가 그걸 두고 따진 적이 있습니까? 나으리께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게 아닙니까?"
진심으로 억울한 투였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요정을 빤히 째려보다가 그만두었다. 벤트레스도 데려와야 하는데 이런 데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쪽문을 써서 로야페타로 간 다음 다시 세카두 차원문을 타야 했다.
첼리비다케의 쪽문은 물류창고 내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근무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갖가지 공산품을 들고 옮기는 중이었다. 란드와르는 과연 도둑놈다운 장소 선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곧바로 걸어 나왔다. 작업반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면서 따라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래서인지 물류창고를 나서자마자 치안대원이 따라붙었다. 모두 따돌리고서는 골목으로 들어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 주었다. 지하도시에 한참을 갇혀 있다가 햇살을 받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테네브로즈가 묘한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범죄자가 따로 없군요."
"가서 신고해."
"예?"
"불만 있으면 가서 치안대에 신고하라고."
테네브로즈는 신고하지 않았다. 놈도 공범이 된 것이다. 란드와르는 무탈하게 세카두로 돌아왔고, 전담 사제에게 벤트레스를 데려오게끔 시켰다. 잠시 기다리자 제 동생만큼이나 혈색이 좋아 보이는 요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헛소리 한 무더기는 덤이었다.
"넌 도대체 저승에 계시는 분은 어쩌자고 인간한테 그러냐."
"그분께서도 어차피 내가 쉭겐 패거리랑 놀고 다니는 것쯤은 다 알았으니 상관은 않으실 겁니다. 이미 수백 번은 버린 몸인데 아낄 것도 없어요. 한참은 더 이승에서 지내야 할 테니 살 방법을 찾는 것이죠."
이 녀석은 다음 직업을 제비족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범죄더라? 혼인빙자사기? 취업사기? 잘은 몰라도 범죄적인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냥 지금 저승으로 갈래?"
"나야 달가운 일입니다만 청지기님께서 좋아하실진 모르겠군요. 그쪽과 먼저 상의를 해 보심이 좋겠습니다. 아니면 그 키 작은 꼬마도 괜찮을 것 같고요. 저번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기로는 대형견 하나쯤은 기를 수 있다던데요."
진짜 죽일까? 란드와르는 애써 이성을 다잡았다. 벤트레스는 어쨌건 요정 마법사였고, 요정 마법사는 귀한 동료였다. 로안 수준이 아니라면(애당초 녀석은 영혼부터가 일반적인 인간이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무조건 인간 마법사의 상위호환인 것이다. 참아야 했다. 참아야…….
그때 테네브로즈가 끼어들었다.
"울쿠스한테 소식을 전해주고 왔는데요, 울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가?"
"댁 같은 망나니가 자기 대부님인 게 한심하다며 울더군요."
* * *
란드와르는 벤트레스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나르시소에 가면 제발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허튼 소리를 했다가 평판을 망치면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더 나은 꼴로 만들어줄 용의가 있다고. 협박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녀석은 한동안 얌전했다. 첼리비다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자마자 벤트레스가 기선제압을 시도했다("아직 백 살이 안 되었다고 했지? 그러면 나보다 어린 셈인데, 자네라고 불러도 되겠어?"). 자기애적인 자화자찬이 기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수준이 비슷한 얼간이들이 꼴에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사실 저는 역사학자들을 좋아하진 않는답니다. 저 고지식한 얼간이들 중에도 몇몇이 있거든요. 선생 같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낭비하는 동안 나는 미래로 나아간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참으로 명쾌하고 마음에 드는 구분법이지. 나도 좋아해. 그런데 자네는 기술적 진보에 집착하느라 그 진보가 과거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 같군. 우리는 지난 세월을 밟아 여기에 왔고, 미래는 다시 그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지. 달리 말하면 미래는 이미 과거에 내포된 것이며―"
"선생의 주장에는 분명 타당한 지점이 있지요. 도움닫기용 발판이 있어야만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발판 위에서 뛰어오르지 않는다면, 혹은 뛰어오르는 행위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죽은 시간의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작은 위수의 유한군을 따지는 것 자체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지요? 양상논리의 접합성 논쟁만으로 밀떡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요? 혹은 수천 해 전에 끝난 일이 우리에게 고기 한 점을 안겨주는지요?"
"아하, 나는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건 몰라. 그러니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역사란 객관적이고 완벽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 그건 지금 사람들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일 뿐이고, 따라서 아주 오래된 순간조차 오늘의 문제가 된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다시 미래가 시작되는 거지.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를 모른다면 진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쿠벨릭과 란드와르는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요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21세기의 지구가 이스트리아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점이 하나는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사회대 포닥과 공대 포닥이 중앙도서관에서 저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대개 교수들에게 착취당하느라 바빠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슬슬 말리지 그래요?"
"하지만 보기 좋은걸요. 정말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남자들이 저렇게……."
"뭐요?"
쿠벨릭은 뺨에 한쪽 손을 얹더니 수줍게 미소 지었다. 1920년대 미국 남부의 시골 아가씨를 연상시키는 웃음이었다. 이 셋 중에서 제일 위험한 건 쿠벨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그제야 퍼뜩 들었다.
"그래, 그 이야기나 해 봅시다. 격투술은 어쩌다가 익힌 겁니까? 이런 곳에서는 몸싸움을 벌일 일도 없을 텐데요."
"익힌 게 아니에요. 그냥 그게… 저한테 왔어요."
"아무리 그래도 계기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요정은 멈칫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 쪽문도 카스바에 이어져 있어요. 잘 쓰진 않지만요. 거긴 이상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웬만하면 안 가요. 혼자 다니는 사람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불한당도 있죠.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요… 게다가 어느 날은 그놈들이 저를 노린 거예요. 세상에, 상상이 되세요? 세 명이 한 명을 끌고 가려고 한 거죠. 카스바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니까요. 다들 돈밖에 모르고, 무례하고……."
그러더니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 란드와르는 카스바가 얼마나 쓰레기같은 동네인지에 대한 장광설을 듣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스바가 어떤 곳인진 나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한데요."
"별 거 아녜요. 등 뒤에서 마력 흐름이 느껴지길래 일단 막았는데, 몽둥이를 들고 때려눕히려 하길래… 눈앞이 새까매져서… 다 죽여 버렸어요."
"뭐라고요?"
"정신을 차려 보니 다 바닥에 쓰러져 있더라구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재능이 있었나 봐요. 참, 이것도 저이한테는 비밀이에요. 저이는 몸 쓰는 사람들을 어찌나 무서워하는지……."
쿠벨릭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았다. 란드와르는 쿠벨릭과 벤트레스와 첼리비다케를 꼭 외부조에 몰아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벤트레스는 그렇다 쳐도 첼리비다케는 자신이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를 명확히 지각할 필요가 있었다.
* * *
벨레다의 불운은 마력 감응이 두뇌회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헤이딘의 반지가 없으면 기초적인 원소학 주문조차 쓰지 못할 만큼 처참한 적성이었다.
방법은 있었다. 슈문의 영토에 각인해둔 주문은 마력 적성과 무관하게 시전되었던 것이다. 이런 편법으로 다룰 수 있는 마력 갈래는 황금색뿐이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야스와다보다 와그다스 마법에 더 익숙했으니까.
벨레다는 비어 있는 쪽문에 영토를 연결하자마자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루가 꼬박 지났을 즈음에야 마타치치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동료 학자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전해 듣자마자 벨레다의 쪽문으로 달려갔다. 그때 소녀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벽면 가득 각인을 채우고 있었다.
"네 스승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직접 인사를 해야겠는데―여기 계시지? 저긴가?"
"아, 네. 저도 마타치치 씨 이야기는 몇 번 들었어요. 그냥 반지를 드릴게요……."
"그래도 괜찮니? 반지가 없으면 마법을 못 쓰잖아."
"각인 새길 때는 필요 없어요. 아뇨, 스승님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고요, 물건 취급도 아니고요… 스승님, 저 지금 머리 아프니까 나중에 이야기해요……."
바닥으로 내려온 벨레다는 마타치치에게 반지를 건넸고, 크게 하품한 다음, 다시 사다리 위에 올라갔다. 마타치치는 소녀가 태엽이 덜 감긴 태엽인형처럼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반지를 꼈다. 곧바로 기억의 궁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요정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며칠 만에 다시 뵙는군요. 제자 녀석이 퉁명스러운 건 대신 양해를 구하죠. 보면 알겠지만 잠을 아예 안 자는 중이라, 나도 말을 못 걸고 있습니다. 아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게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마타치치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나무 반지에 어떻게 영혼을 담아냈는지가 궁금했다… 자세한 구조를 살피고 싶을 만큼. 그녀는 일단 바깥으로 나와 계단에 걸터앉았다.
"이게 완성품이군요! 도면은 따로 정리해 둔 게 있나요? 한 번 보고 싶은데―"
<맙소사, 댁도 결국 여기 사람이군요. 헐뜯으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도면은 없지만 만드는 법은 얼추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옛 신의 별이 떠오르고 화신이 땅에 내려왔는데 당신은 반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뜻이죠. 다른 학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래, 우리 쪽 사람들이랑 통성명은 했어요?>
마타치치는 높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란드와르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다른 학자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가 왔을 때 신을 모시는 예법을 두고 긴 토의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자신도 똑같이 보일 터였다.
"아뇨, 깜박 잊고 있었네요!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수면약 때문에 아직은 정신이 뚜렷하지가 못하거든요. 일어나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어요. 그 전에 일행 분들께도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던 거죠."
<그러면 카스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이건 그쪽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사고라도 있었나요? 손님맞이를 하라고 조카를 보내 뒀는데."
그렇게 묻자마자 헤이딘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일었다. 소년 유령은 천천히, 카스바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클렘퍼러가 골목에 들어서는 계단에 미궁 주문을 걸어 놓았다는 것. 그러고는 옥상에 올라가서 계단을 쓰려는 사람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두 명이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까지.
<붙잡아 놓고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토론 결과가 안 나와서 그랬다더군요. 회의도 안 끝났는데 우리가 먼저 들어오면 여기 규칙을 깨게 되니까, 그래서 막았다는 겁니다. 나쁜 의도가 있진 않았겠죠. 다만 세상엔 차라리 악의가 있는 게 나은 경우가 있기 마련이고…….>
"세상에."
마타치치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클렘의 성격은 그녀도 익히 알았지만… 이런 사고를 칠 거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클렘은 어디 있죠? 호되게 혼을 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