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88화 (189/258)

188화 와그다스의 후예 (5)

첼리비다케를 진압하는 건 쉬웠다. 쿠벨릭에게 직접 사기극의 전말을 읊게 시켰던 것이다. 볼로디아와 로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들어 볼 가치가 있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사기꾼적인 면모는 알아서 걸러내겠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굳이 참견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등을 돌리는 순간 사업가적 자의식이 준동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첼리비다케는 다시 말루카의 통치자와 재벌가 후계자에게 장대한 비전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쿠벨릭은 벨레다를 데리고 제단으로 향했으며… 란드와르는 토론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논의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는 몇 겹으로 둘러앉은 학자들을 밀고 들어가 원 한가운데에 섰다. 시선이 단번에 모였다. 세카두 사람들은 화신이 내려왔다 하면 일단 고개부터 조아리는데 목이 이렇게나 뻣뻣한 걸 보면 되어먹지 못한 놈들이었다.

란드와르는 망치를 빼든 다음 통보를 시작했다. 불타는 학구열은 존중하겠다만 자신이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부디 억눌러 줬으면 한다는 것. 자신은 예의 따위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냥 할 일을 하고 싶다는 것.

이 간단한 요구사항을 납득시키는 데만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행동주의적 실천에 나서기 전에 제동이 걸린 게 다행이었다(제일 말이 많은 놈 하나를 으깰 뻔했다는 뜻이었다). 란드와르는 잠들어 누운 마타치치를 조용한 곳으로 옮기게끔 시킨 다음 할 일의 목록을 읊기 시작했다.

그 목록은 이런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슈문에게 시간제 가호를 받기. 슈문의 미궁을 이곳에 불러내기(이때 나르시소의 중앙 동공은 일종의 제어실로 변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야스와다 추적자들을 막기. 가호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슈문의 제어 중추를 복구하기. 그리고 기타 등등.

설명을 마치는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지금 가호를 받은 사람이라면 미궁 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상세한 원리를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시겠지만 회전반사 대칭에 의하여 생성되는 공간순환군은 핵심 공간에 귀속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아시겠지만? 대체 뭘 안다는 거야? 란드와르가 아는 것은 게임 공략뿐이었다. 그것도 내부조에 국한해서.

오염지대에는, 즉 슈문의 깊은 무의식에는 <제어 중추>라 불리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아상이 거대한 기계 형태로 실체화된 것이었다. 수많은 작업이, 예컨대 추종자들과의 소통이나 궁전 관리 등이 중추에서 처리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장 탓에 대부분의 기능이 멈춘 상태였다. 보조 장치 몇 개만이 작동을 이어가면서, 외부 미궁 관리나 영토 할당 등을 도맡을 뿐이었다. 종이 구체나 제어실도 중추 자체가 아니라 보조 장치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게 내부조 공략의 핵심이었다. 제어 중추의 중앙장치를 수리하고, 재가동한 다음,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면 일단 컴퓨터를 켜야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여기에서도 가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건 전투 보조 효과인 동시에 권한이었다. 중추에 접근할 자격 말이다. 물론 제어실에 남은 학자들에게도 약간의 권한은 주어졌지만, 오염지대에서 수리 작업에 착수하려면 더한 특권이 필요했다.

따라서 가호 지속시간 안에(처음에는 나흘이 주어지지만 오염도가 높아질 때마다 남은 시간이 대폭 깎였다)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기회는 영영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외부조가 침입자를 소탕하더라도 그렇다. 이거 생각해보니 끔찍하군.

어쨌건 내부조의 압박감과는 별개로 외부조는 자동전투만을 수행했다. 게임에서는 그랬다. 게이머 이강현의 역할은 직업 조합을 잘 짜서 보내는 것뿐이었다. 미궁의 형태가 수시로 변한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한 원리는 몰랐다. 학자들의 고민은 더더욱 알 턱이 없었다.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해요. 어차피 여러분은 싸우는 법을 모르니까 가호를 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여기 남아서 미궁이나 잘 다듬으시라는 겁니다. 뭉쳐 다니는 놈들을 흩어 놓고, 대장쯤 되는 놈은 외딴 데에 떨어트리고, 그렇게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호가 어떤 식으로 미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자, 난 무예와 살육의 신이고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건 몰라요. 질문을 해 봐야 설명을 못 해 준단 거죠. 내가 해줄 말은 이거 하납니다. 미궁을 어떤 식으로 조정하든 간에 우리한테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거요."

"하지만 6회전 나사축을 3/4만큼 병진하는 상황을 가정할 경우―"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학자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반박했다. 이쯤 되니 야스와다 신관들이 나르시소를 소탕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절실히 이해가 갔다. 대전쟁 당시에 배신을 하고 도망간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바로 문제였다.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놈들이 도둑질까지 해 대면 죽여도 정당방위였다. 란드와르는 야스와다의 입장을 존중했다.

*  *  *

란드와르가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쩔쩔매는 동안 벨레다는 쿠벨릭을 따라가 슈문의 제단 앞에 섰고, 숭배 서약을 마쳤다. 어려울 건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선서를 외우면 그만이었다.

허공에 떠오른, 주먹 크기의 종이 구체가 빙 돌더니 은은한 빛을 발했다. 곧이어 벨레다의 손등에 황금색 빛줄기가 흐르더니 각인 문양 중 하나로 변했다. 쿠벨릭이 그걸 보고는 눈을 접어 웃었다. 동화책 삽화에나 나올 만큼 순박한 웃음이었다.

"와, 처음부터 그 징표를 받긴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요. 축하해요!"

"좋은 건가요?"

"그럼요. 그건 스승 징표에요. 세 단계가 있죠. 학생, 연구자, 스승. 보통은 숭배 서약을 하고서도 십 년은 지나야 연구자 징표를 받을 수 있어요. 연구자가 스승으로 승급하려면 특별한 성취가 있어야 하고요."

야스와다로 팔려가서 논리학을 배우기 시작한 게 일곱 살 때였다. 지금은 스물셋이니까 십 년은 이미 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벨레다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헤이딘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쿠벨릭도 요정 유령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이런 얘기는 왜 안 해 주셨어요? 야스와다에서도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나도 몰랐다. 그때는 눈이 안 보여서 까먹었지 뭐냐. 그리고 지금 이건 몸이라기보다는 환영에 가까운 거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였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억상실은 죄가 아니니까. 벨레다는 다시 쿠벨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정의 얼굴에 친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 영토 다루는 법은 이미 알고 있다고 했죠? 다행이에요, 보통은 그걸 배우는 데 몇 달은 쓰게 되거든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더 걸리고요. 빈 쪽문이 몇 개 있으니까 일단은 거기에 연결하면 될 거예요……."

쿠벨릭이 길안내를 위해 성큼 앞서나갔다. 모여 앉은 학자들 곁을 지나는 동안, 벨레다는 일부러 란드와르의 시선을 피했다(제발 도와달라는 표정이었다). 곤란해질 일은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얘야, 아무래도 우리가 가서 설명을 거들어야 할 것 같구나. 연결이야 어차피 하루이틀은 걸릴 테니 저것부터 먼저 해결하자꾸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헤이딘은 너무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카스바에서 칠 년을 살아 놓고도 융통성이란 걸 하나도 기르지 못한 것이다. 벨레다는 똑똑하고 순진한 스승님을 바라보았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두드린 다음, 눈을 잠깐 가렸다가, 검지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벨레다는 다시 했고, 헤이딘이 반론했고, 벨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세상이 조용해졌고 기분도 한결 산뜻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여기에 없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특히 벤트레스를. 그 요정이 나르시소에 발을 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궁금했다.

*  *  *

머리에 심각한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면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정신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충격이 필요하다. 그리고 벤트레스는 아직 카스바에서 당한 것 이상의 충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그 이상의 충격을 도대체 어디에서 받겠는가?).

카스바에서의 경험은 복수심과 결합해 그를 야스와다 제일의 난봉꾼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 사르코의 근황을 확인했을지라도, 그래서 사촌동생에게 소식을 전하길 부탁했을지라도… 벤트레스는 여전히 벤트레스였다.

"마흔쯤이라면… 요정에게는 어린 나이 아닌가요?"

책을 읽던 와중 창밖으로 인간이 지나가기에 말을 걸었을 뿐인데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벤트레스는 젊은 사제, 반다나의 얼굴이 동정심으로 물드는 걸 보고는 매끄러운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팔꿈치는 창가에 걸치고서는 윗몸만 약간 바깥으로 내민 채였다.

"그렇죠, 성년식은 치렀지만 제대로 된 어른 취급은 받지 못한답니다."

"그 나이에 그런 일을 겪다니―세상에, 괜찮아요?"

요정이라면 질색을 할 줄 알았는데 사제는 금방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이대로라면 인간 동네에 덩그러니 떨어진다 쳐도 살 길은 있을 듯했다(벤트레스는 신비롭고 사악한 종족과의 성적 교섭을 은밀히 원하는 인간이 최소한 열 명 중에 하나 꼴로는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아직도 악몽을 꿔요. 하지만 다행히―"

"당장 대화를 멈추고 저걸 기억에서 지우는 게 좋을 겁니다."

아즈리온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 점수를 따 보려던 찰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벤트레스는 갑작스러운 방해에 미간을 좁혔다. 요정 관리 임무를 맡은 남자였다. 짧게 줄이면 간수가 되는 셈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어머, 라나지트. 언제부터 있었던 건가요?"

"당신이 저 요정 나이를 물을 때부터요. 저게 백 살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군요."

"마흔쯤이라고 했는걸요."

"당연히 인간 나이로 치면 마흔이라는 말이죠. 요정이 한 세기를 살면 그 정도인 거 알잖아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저 놈들은 원래 늙을 때가 되어야 한꺼번에 늙으니까."

반다나는 대답을 요구하듯 벤트레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는 전략적으로 퇴각했다. 순순히 진실을 밝혔다는 뜻이었다. 지난 하루 동안의 경험만으로 판단하더라도 라나지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진짜 나이를 듣자마자 반다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죄송해요, 그렇게 연세가 지긋하신 줄은 몰랐네요. 실례했어요. 왜 거짓말을 하셨는지는 안 물을게요."

"잠깐만, 기왕 들켰으니 편하게 말하지. 내가 요정이라는 건 괜찮아?"

"그것도 물론 문제죠. 하지만 나이가 증조할아버지보다 많으면 좀……."

반다나는 갔다. 라나지트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다가 벤트레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갈색 곰처럼 생긴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기만 하는 모습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이성과 야성의 조화라고나 할까.

"한 번만 더 물의를 일으키면 화신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야박하시군. 그저 이직을 시도하기 전에 근무조건을 알아보려 했을 뿐이야. 사제님도 알겠지만 이 짓이 다 끝나도 난 고향에 못 가. 여기서 새 직장을 구해야지."

"저희를 돕고 싶으시다면 남으셔도 괜찮습니다. 정보사의 통상 업무 중에는 비리 감찰이나 국제 범죄자 추적 등이 포함되어 있으니, 환술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 부분을 논의하고 싶으시다면 제게 문의해 주십시오. 파르타님께 뜻을 전하겠습니다."

벤트레스는 뜻밖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은 몰라도 이 정보사란 것들은 굉장히 실용주의적인 족속인 게 분명했다. 하기야 이런 조직에서, 그만큼 중대한 덕목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럴듯한 직함이 아니라 마음껏 놀고먹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야스와다에 있을 적에는 서고에서 책만 읽다가 본가에 돌아오면 밥이 나왔던 것이다. 늙은이들만 제외하면 본가는 실로 낙원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모두 불타고 말았지만.

"이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부잣집에서 느긋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은 거야. 역할이야 남편이든 아내든 애완동물이든 상관없어. 그네들이 나한테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면 그만인 것이지. 청소도 해 줘야 돼. 난 내 손으로 방을 치운 적이 없거든. 직접 세어 본 바로는 열흘만 지나면 쓰레기장이 되더군. 참, 약은 바라지도 않으니 술이랑 연초도―"

"한 번만 더 물의를 일으키면 화신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화신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와 계십니다. 함께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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