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87화 (188/258)

187화 와그다스의 후예 (4)

첼리비다케는 나르시소보다 로야페타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의 목은 자존심만큼이나 꼿꼿하며 목소리에는 우아한 경멸이 감돈다. 어떤 것을 실제보다 더 좋게 포장하고, 확실하지 않은 전망에 아름다운 장식을 더하고, 불편한 진실은 감춰 버리는 것이 그의 주특기다―명확한 계획도, 시제품도 없이 계약을 따내려는 상인들이 그런 것처럼.

다행히도 나르시소 학자들은 첼리비다케에게 넘어가기에는 너무 똑똑하다. 그들은 1할의 자원 효율 개선이라는, 아주 간단한 서술에서도 이틀만큼의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부류기 때문이다. 이론적 환경과 실제 환경의 차이. 효율을 계산하는 방법론. 기타 등등의, 엄밀함과 정확함을 위한 긴 여정.

대신 그는 악마적인 재능을 발휘할 곳을 발견했다. 로야페타로 떠나 사기극을 벌이는 것이다. 소꿉친구인 쿠벨릭이 여기에 가세했다. 둘은 오랫동안, 갖가지 신분을 써 가면서 유망한 청년 사업가 행세를 했다.

그리고 정보사가 그들을 찾아냈다. 처음부터 종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연쇄적인 사기 행각을 추적해 나가다가, 그 사기꾼의 정체가 사실은 요정이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첼리비다케와 쿠벨릭은 정보사로 연행되었고, 나르시소의 일원임을 밝힌 후,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도망쳤다.

첼리비다케와 쿠벨릭은 이제 떠들썩한 일을 벌이진 않는다. 한 차례 더 들켰다가는 좋은 꼴이 나진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면을 기대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합법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길 바란다.

*  *  *

수십 해 전에 일어난 연쇄사기사건의 내막은 21세기의 지구인이 듣기에도 놀라웠다. 처음에는 환술로 얼굴을 바꾸고는 도매상 주인인 척 물건을 빼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고용인들로서는 요정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리고 야스와다 요정들은 그런 짓을 저지르기엔 인간 세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게 ‘먹힌다’는 걸 깨닫자 둘의 사기 수법은 점점 대담해졌다. 몇몇 인간의 탐욕이 일을 키웠다. 그들은 장밋빛 전망에 눈이 먼 채, 신원이 불분명한 누군가와 손잡는 우를 범했다. 그러한 관계는 다시 이력서의 한 줄이 되었다―"그 사람들, 괜찮은 거 맞아?"

"찬드라세카한테 직접 소개를 받았어. 이쪽 판에서는 믿을만하지."

인맥에 기반한 신뢰와, 혁신이라는 환상과, 불분명한 정보가 한데 뭉쳤다. 끔찍한 혼돈을 완성시킨 것은 다섯 개의 가짜 신분과 열여섯 개의 ‘빌린 신분’이었다. 긴 소요 끝에 모든 전말이 밝혀진 순간, 상업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작해야 두 명의 황무지 괴짜들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고… 이 사건은 완벽한 비밀로 부쳐졌다.

금전적인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첼리비다케와 쿠벨릭은 결국 나르시소 학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돈을 일종의 놀이패나 차투랑가 기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거대한 흐름이자 세계를 휘두르는 규칙이 아니라, 그냥 건네면 무언가가 돌아오는 종잇조각으로.

여분의 수표와 어음은 그들의 임시 거처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상업 가문은 몇 달간의 가문 회의 끝에 적절한 분배안을 제시했다. 만족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이 손해를 덤터기썼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모두가 만족했다. 이 두 사기꾼은 단순히 거짓말만 늘어놓은 게 아니라 유용하게 개량된 도면과 가설 또한 남겼던 것이다. 첼리비다케가 자화자찬한 것에 비해서는 초라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덕분에 혼란이 수습될 무렵에는 그들을 찾으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황무지 요정이든 뭐든 좋으니 정식으로 연구 협약을 체결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정보사 조사를 받던 도중에 나르시소로 도망쳤고, 그 유산만이 학계에 남아서…….

<이상입니다.>

좋아요, 정리해 봅시다. 사기꾼이고 허풍이 심하긴 한데 사악한 종류는 아니란 거죠. 굳이 따지면 도움이 된 면이 더 많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정신상태가 저 꼬락서니다 보니 명함을 파 주면 사고를 거하게 칠 것 같고.

<장기적으로 보아서 활용할 방법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산업 발전에 있어서는 총기 발명가보다는 저 둘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다만 방법은 고민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때 볼로디아는 첼리비다케에게 말루카 한림원의 체계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첼리비다케와 벨레다가 한껏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걸 보니 둘 다 감투가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대전쟁이 일어나느니 마니 하는 이 시국에 말이다.

란드와르는 앓는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사기꾼 놈들이 종신 교수직을 따내기 전에 진압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사기죄가 잘 해결되더라도, 누군가가 학장 역할을 맡아야 한다면, 벨레다와 헤이딘의 편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  *  *

이름은 쿠벨릭. 란드와르와 비교하자면 고작 한 뼘 정도가 부족한 장신. 요정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구라는 설명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 체구와는 영 딴판이다. 짧게 자른, 곱실거리는 고동색 머리카락. 두터운 속눈썹. 반쯤 감긴 눈은 졸린 것 같기도 하고 수줍은 것 같기도 한다. 목소리도 그렇다. 낮은 울림은 입을 벗어나자마자 힘을 잃고는 흐릿해지고 만다.

대학생이던 시절에, 그는 쿠벨릭 같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 체크무늬 남방과 청바지를 걸치고는 강의실 맨 뒤편에 앉아 있다가 유령처럼 떠나는 복학생들. 성별은 다르지만 어쨌든 쿠벨릭에게는 공과대학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학점만큼이나 처참한 자신감에 시달리는 부류.

하지만 쿠벨릭이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녀는 격투술의 달인이고, 뛰어난 엔지니어이자… 사기극의 사령탑이었다. 첼리비다케가 프레젠테이션과 자기과시를 맡았다면 쿠벨릭의 역할은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것. 얕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뭐라 하려는 거 아니니까 솔직히 말합시다. 정보사에도 아직 그쪽 기록 남아 있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로야페타에서 가명 쓰고 다닌 거 말입니다. 내가 저 말 많은 양반 내버려 두고 댁한테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아실 텐데."

첼리비다케는 볼로디아와 이야기하게 두고, 쿠벨릭만 따로 빼온 참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대뜸 사기극을 까발렸다가는 분위기를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화신에게 정체가 들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싶었다.

"각설하고, 이것부터 묻겠습니다. 로야페타에서 사기 치다가 정보사한테 잡혀서 도망갔죠. 정보사는 아즈리온 교단이 주축이고. 그러면 내가 그쪽을 보자마자 눈치를 채지 않겠어요? 예상을 못 하셨나?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쿠벨릭은 우물쭈물거리다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보면 순진한 마을 사람이라도 겁박하는 것으로 착각할 듯했다. 이 표정까지도 연막작전의 일환이라는 데에 걸고 싶었다.

"그런데… 아즈리온의 화신은 맞으신 건가요?"

"맞습니다. 협조적이면 사면 처리도 해줄 거니까, 대답이나 해요."

그런 문답이 몇 차례 더 오가고, 천사까지 불러내 공증을 맡긴 뒤에야 쿠벨릭의 입이 열렸다.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저는 그냥 조용히 있자고 했는데 저이가 막무가내로, 말을 걸어 보자고 하지 뭐예요. 이렇게 될 줄 알았죠. 하지만 어떻게 말리겠어요, 항상 저랬는데. 사고는 첼이 다 치고 뒷수습은 언제나 제 몫이에요. 잘 되면 그게 모두 자기 덕인 줄 알고, 안 되면 항상 제 탓이죠. 연구도 그래요."

쿠벨릭은 눈꺼풀을 반쯤 닫은 채, 불안한 듯 엄지손톱을 잘근거리면서, 여전히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형을 노리고 연기를 하는 중인 걸까?

첼리비다케는 지원가에 가까운 반면 쿠벨릭은 전투력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공간 마법을 격투술과 접목시켜 실로 기묘한 움직임을 빚어냈던 것이다. 무력으로만 따지면 쿠벨릭이 우위에 서는 게 옳았다. 판단력 면에서도. 이런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쪽이 저 말 많은 양반한테 끌려 다니는 건 알아요. 이유가 뭡니까? 키 차이도 나는데, 그냥 한 대 때리면 얌전해지지 않겠어요?"

"귀엽잖아요……."

"예?"

"바보 같아서 귀여워요."

쿠벨릭은 부끄럽다는 듯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란드와르는 잠시 굳어 있다가 가까스로 그 문장을 해독했다. 철없는 어린애를 오냐오냐하듯 첼리비다케가 개짓거리를 하고 다녀도 맞춰 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첼리비다케는 자기가 엄청 잘난 줄 알아요. 계속 그렇게 착각하게 두고 싶어요. 세상물정도 잘 모르면서 자신만만한 모습이 좋거든요. 로야페타에 따라간 것도 그거 때문이고요. 혼자 보냈다가는 그날 바로 죽었을 테니까요. 참, 지금 이건 그이한테는 비밀이에요……."

이쯤 되자 사기극에 내막이 따로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기실 물건이 필요했다면야 다른 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훔치면 될 일이고, 사기꾼들이 으레 그런 것처럼 돈이 목표였다면 수표와 어음을 집에 내버려두고 도망가진 않았을 터였다. 애당초 물욕보다는 인정욕구에 더 불타는 부류인 것 같고… 잠깐만.

"궁금한 게 생겼는데, 사기는 왜 쳤습니까? 돈 때문은 아니죠?"

"아마 제 생각에는… 인간들이 자기를 알아주고 칭찬해 주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여기 사람들은 그이랑은 잘 어울려주지 않거든요. 사실 그럴 만도 해요, 성격이 워낙 고약해야 말이죠. 하지만 그게 귀여운 건데. 그러니까……."

분명히 귀는 멀쩡한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뇌가 스스로 청각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윙윙거리는 울림에 갇힌 채 세 개의 항목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요정들과의 대화는 보통 시간 낭비에 정신 낭비다. 보통은 그 정신머리를 이해하려 애쓸수록 미궁에 빠지고 마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게 순애보든 악취미든 이상성욕이든 간에.

둘째, 첼리비다케와 쿠벨릭은 무조건 외부조로 보내야 한다. 이런 정신상태의 소유자와 같이 다녔다가는 오염지대를 정화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타락할 게 분명했다. 이왕이면 벤트레스까지 묶어 보내는 게 좋을 터였다. 이이제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대장군님, 이런 것들을 떠넘기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대장군님은 저보다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도 많으시니까 인내심 역시 뛰어나리라 믿습니다…….).

셋째, 셋째, 셋째. 셋째를 읊으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분노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신인데, 왜 이 새끼들 사정을 다 봐 주고 있는 거지?

그랬다. 잘 생각해보면 자신의 역할은 슈문을 구출하는 것뿐이었다. 아즈리온의 체면이 망가지든 말든, 이 취향 고약한 사랑이 어떻게 흘러가든, 인간 문명이 발전하든 말든, 신을 대하는 예법이 뭐든 간에 서른다섯 살의 이강현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알았으니까 가서 마법 연습이나 하고 있어요. 조만간 야스와다 요정을 잔뜩 죽여야 할 테니까. 참,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댁 애인한테도 적용되는 이야기고요."

통보를 마친 란드와르는 볼로디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첼리비다케를 떼어 놓고서는 곧바로 토론까지 진압할 작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용의가 있었다. 무예와 살육의 신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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