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와그다스의 후예 (3)
나르시소에는 두 종류의 배움이 있다. 하나는 도망술이나 수호 영역 등의 실용적인 마법이고, 다른 하나는 정밀공학에서 위상수학까지를 아우르는 다종의 연구다.
학자들은 전자를 육신의 가르침으로, 후자를 정신의 가르침으로 부른다. 도망술은 실제로 생존의 문제기 때문이다. 각종 생필품과 식재료를 꾸준히 훔치면서도 덜미가 잡히지 않으려면 마법을 갈고 닦아야만 했다. 인간 도시에서 붙잡힐 경우에는 정보사 조사를 거쳐 나르시소로 환송되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적었다(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간혹 개혁개방을 외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늙은 학자들은 젊은이를 데려가 바깥세상의 진실을 알려 주었다. 만약 인간 사회와 하나가 된다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으리라고. 모든 용역과 재화의 기본 교환 단위는 돈인데, 돈을 얻으려면 그들이 시키는 일을 (하기 싫을지라도) 묵묵히 해야 한다고. 함부로 물건을 가져왔다가는 끌려가서 고초를 겪게 된다고.
설득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나르시소 요정은 자본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이란 걸 한 적이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관심 없는 것에 시간을 쏟을 바에는 죽음을 택할 족속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정신의 가르침에, 즉 자신이 고른 연구 주제에 봉헌했고… 결과적으로 나르시소는 돈을 벌지 못할 학문의 지성소가 되었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들에게 물적 자원과 필요가 동시에 부재하다는 점이었다. 나르시소에는 신기술을 겨룰 사업체들이 없었고 국책과제를 던져줄 정부 기구도 없었다. 원자재를 조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를 활용할 방법조차 없었다. 로야페타에서 가장 대우받는 종류의 공학 분야가 그런 식으로 쇠퇴했다.
둘째 이유는 미궁 설계로 대표되는 와그다스 학파의 주류 마법이 공간군 개념과, 위상수학과, 기호논리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결정학적 점군, 미끄럼면과 나사축, 단위격자의 병진대칭, 결정이 가질 수 있는 230개의 공간군. 양화 양상논리와 시제 논리. 자유 변항을 양화사에 속박해 주문을 시전하는 일.
따라서 절반 이상의 나르시소 요정은 기호논리학자거나 대수학자였고, 나머지의 절반이 다시 위상기하학자였다. 그 나머지의 나머지가 소수파를 이뤘다: 언어학. 역사학. 인식론을 포함하는 몇 가지 철학 분과. 어쨌거나 돈을 벌기엔 글러먹은 학문들의 집합.
그리고 소수파조차 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있었다. 타일라프람에서 연구실을 얻었더라면 쭉 뻗은 출세가도를 달려 나갔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르시소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 수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줄었으며… 이제는 세 명만이 남아 있었다.
첼리비다케와 마타치치, 그리고 쿠벨릭이었다.
* * *
첼리비다케가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기기 뒤에서 쭈뼛거리던 요정도 나와 이름을 밝혔다. 키가 껑충하니 크고 머리카락이 곱실거리는 쪽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반으로 접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쿠벨릭이라고 해요… 이 기계들이 모두 고장 난 건 아니에요. 제가 하나씩 고치고 있거든요. 쓰는 법도 알고 있어요. 쓸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만요. 첼리비다케는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어요. 네, 정말 이상한 데에 집착을 하죠. 연료 효율이 아주, 아주, 세지도 못할 만큼 조금씩만 개선되는 마력 회로를 종이에 그려 놓은 다음에 자화자찬을 하는 거예요.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도요."
"이거 원, 죄송합니다. 이 친구는 기술 발전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거든요. 그 사소한 개선이 얼마나 큰 차이를 불러오는지 짐작조차 하질 못하죠. 그러니까 수리공 노릇에만 만족하는 거고요."
그는 팔꿈치로 쿠벨릭을 밀어내듯 찔렀고, 자신이 제어공학과 정밀공학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해 왔는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볼로디아와 다른 둘을 놀라게 한 것은 연구 실적보다는 곁가지였다. 첼리비다케는 로야페타의 생리를 로안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여 로야페타에 머물렀던 적이 있소? 아니면 다른 인간 도시라거나……."
"물론입니다, 대장군님. 서른 해 전까지는 저를 알던 이가 몇 살아 있었지요. 다만 그 덧없음 때문에 인간 세상에는 잘 가지 않는답니다."
"그건 의외로군. 능숙한 사업가처럼 말을 하기에 연이 깊은 줄로 알았는데."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면 경험도 그만큼은 쌓이는 법입니다, 대장군님. 어떤 기억은 수십 해가 흐르도록 선명하고요."
"지나간 인연에 대해서는 애도를 표하겠소."
볼로디아는 정중한 태도로 답했고, 첼리비다케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 쿠벨릭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고만 있었다. 어떤 식으로 화두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벨레다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첼리비다케에게서는 어딘가 구린 느낌이 났다. 아무 근거도 없는 직감을 가지고 억측을 벌이는 건지도 몰랐지만, 카스바에서의 경험이 열심히 위험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헤이딘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는 듯했다.
<사기꾼 냄새가 나는구나. 마타치치가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했어. 혀만 잘 움직여대는 녀석이 하나 있다고. 얼간이랑.>
벨레다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마타치치랑은 사이가 안 좋은가요?"
"꼬마 아가씨, 그런 폭탄광과 나를 비교하지 말아 줘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부수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법이니까요."
어린아이라도 대하는 듯한 말투에 벨레다는 이를 질끈 악물었다. 혀만 잘 움직여대는 녀석, 이라는 게 첼리비다케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 요정과는 영 친해질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었다(물론 머리에 문제가 있고 협잡질에 능한 건 벤트레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면이 있었다).
* * *
그때 란드와르도 강렬한 직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기꾼의 냄새가 그 멀리까지 흘러 들어왔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볼로디아와 로안이 첼리비다케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게 재미있어 보였을 뿐이다. 최소한 티아에게서 베네수엘라 뉴스를 전해 듣는 것보다는 흥미로울 듯했다(그 나라 부통령이 타레크 엘아이사미로 바뀌었다고요? 그게 대체 누굽니까?).
게임에서도, 첼리비다케와 쿠벨릭은 마타치치만큼이나 인상적인 등장인물이었다. 체구는 쿠벨릭이 한참이나 크지만 관계의 주도권은 첼리비다케에게 있다. 이 관계의 더한 아이러니는 쿠벨릭이 무투가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온다. 그녀는 와그다스 학파의 주문식을 근접전에 적합한 형태로 개량했고… 원한다면 첼리비다케쯤은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 반갑습니다. 아즈리온의 화신 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아니긴 한데, 아무튼."
란드와르는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첼리비다케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숙여 인사했지만 쿠벨릭은 상황을 깨닫지 못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고동색 눈동자를 끔벅이면서, 새로 나타난 존재와 이미 있었던 사람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첼리비다케가 오른발을 슬쩍 내뻗어 정강이를 걷어차고서야 그녀의 허리가 함께 반으로 접혔다. 꺽다리처럼 큰 키 때문에 술집 앞 바람풍선 인형이 몸을 꺾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참,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란드와르는 과도하게 공손한 요정 둘을 향해 됐다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일단 허리부터 펴시고. 이런 대우 받는 거 안 좋아해요. 편하게 합시다, 편하게."
"의외로… 격의가 없으시군요. 필멸자 주제에 감히 무례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원래 이럽니다."
심드렁하게 내뱉은 란드와르는 막상 말을 걸어놓고 보니 이야기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일라프람에 연구소를 세우든 말루카의 통치자가 기초마도학 육성을 국책과제로 삼든 간에 무예의 신과는 무관한 것이다. 심지어 스타트업 사장으로서 첨언할 자격도 없었다. 하나는 일국의 왕이고 다른 하나는 재벌가의 일원이니까, 아무래도 체급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대업을 방해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서는 (쿠벨릭과 첼리비다케의, 석연찮은 표정을 외면하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돈 문제는 돈 많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무예의 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복기할 생각이었다.
일단 학자들의 토론이 끝나면 슈문의 제단에 접근할 방법이 생긴다. 곧바로 벨레다를 데려가서 숭배 서약을 시킬 예정이었다. 나눠 받은 영토에 주문을 새기면 마력 적성이 부족해도 미궁 안에서만큼은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조건부긴 해도 꼬마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벤트레스를 데려와야 한다. 이것도 귀찮을 건 없다. 나르시소의 학자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면 대부분의 쪽문을 빌려 쓸 수 있으니까. 대륙 전역으로 이어진 차원문이 생기는 셈이다.
지금 시점에서 처리할 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염지대를 정화하는 것이나, 추적자들을 막아내는 것은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에나 닥쳐올 문제였다.
당장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은은한 짜증이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갈굴 요정 놈까지 저승에서 쉬는 중이었다. 막연한 무력감 속에서 지혜의 고리를 만지작거리던 란드와르는 뜻밖의 속삭임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 둘에게 다시 말을 걸어 보시죠. 의심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 야스와다 첩자라도 되는 겁니까? 둘 다 시나리오에서는 그냥 동료였을 텐데요.
<그건 아닙니다. 화신의 일과도 관련이 없고요. 다만… 불미스러운 사태를 예방할 필요성이 있을 듯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굳이 따지면 정보사의 통상 업무기도 하니까요.>
정보사 업무라고요. 잠깐만, 정보사 업무? 첩보원 비슷한 거요? 내가 로야페타에서 하고 다녔던 거?
<약 반 세기쯤 전에, 로야페타에서 2인조 요정 사기꾼이 활동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정보사에서 수사를 맡았고요. 사건은 이미 종결 처리가 됐고, 시뮬레이터를 검토할 때에는 지난 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