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85화 (186/258)

185화 와그다스의 후예 (2)

한 시간이 흘렀다. 학자들은 아직도 헛소리에 심취해 있었고, 마타치치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으며, 클렘은 쪽문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란드와르는 팔을 쭉 뻗은 채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엄지와 검지에 지혜의 고리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사제야."

변신을 하기는커녕 돌아오는 답조차 없었다. 란드와르는 몇 번 더 불러 보다가 그만두었다. 친정으로 도망간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그리고 번번이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으니’ 소리만을 듣는) 남편이 된 기분이었다. 이강현은 미혼이었고 테네브로즈는 아내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씨발, 이게 제정신으로 할 생각인가?

정신 상태가 악화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주위 환경이 이렇다 보니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잡상을 떨쳐내고는 지혜의 고리를 품에 넣었다. 테네브로즈가 돌아오면 잘 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은 채였다. 지킬 자신이 없었다.

요정 놈 생각을 멈추자마자 흡연 욕구가 맹렬히 끓어올랐다. 나르시소가 지하동굴에 세워진 도시라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런 곳에서 연기를 피웠다가는 화신으로서의 체통을 논할 것도 없이 인간으로서의 평판부터 실추될 게 뻔했다. 학자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중앙 동공을 서성이다가 이내 가장자리에 가서 앉았다.

침울한 기분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니 볼로디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민이라도 있소?"

"연초를 태우고 싶어요. 술도 마시고 싶습니다."

"그건…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볼로디아는 갔다. 란드와르만 구석진 곳에 홀로 남았다. 티아 씨, 우리 끝말잇기라도 해 봅시다. 아니면 지구 소식이라도 전해 줘요(정말 죄송한데, 저희 사무실에는 베네수엘라 잡지밖엔 없네요. 한 달 전 건데 관심 있어요?)…….

*  *  *

요정 사회의 특성상 광인은 어디에나, 동료이자 친우로서 존재했지만 벤트레스는 정도가 특히 심했다. 폐허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미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조사단원이 있을 만큼.

물론 벤트레스는 끔찍한 악당은 아니었으며 고발장이 날아올 만한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그게 핵심이었다. 그는 죄를 묻긴 어렵지만 소문이 널리 퍼질 만한 사고를 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특유의 자아도취가 악명을 드높였다. 벤트레스의 이름은 평민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들은 신관 서임까지 받은 명문가 어르신이 그러고 다닌다는 사실을 우스워했다. 그 비웃음에는 호감이 절반쯤은 섞여 있었다. 평민 된 입장에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귀족에게는 정반대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 정신 나간 요정은 명문가의 오점이자 1교구의 수치였다. 벤트레스에게 순수한 호감을 지닌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물론 순수하지 않은 종류의 인기는 넘치도록 누릴 수 있었다)… 울쿠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 어머니께서 그놈과 약속을 하셨다는 겁니까?"

"그놈이라니, 대부 어르신께 그런 식으로 말해서야 될 일인가?"

저승으로 돌아간 테네브로즈는 숙취를 씻어낸 다음 솔로틀과 짧은 대화를 나눴고, 울쿠스를 찾았다. 벤트레스에게 부탁받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저승에 돌아간다면 정인과 대자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얄미운 사촌형제의 지시를 순순히 들어줄 만큼 관계가 복구된 것은 아니었지만, 울쿠스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테네브로즈는 시킨 대로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반응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청년에게는 아직 땅의 마음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다른 저승의 주민들처럼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죠, 하면서 김새는 대답을 늘어놓진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예상대로였다.

"정원사님께는 큰 은혜를 입었고, 그 점은 감사히 느끼고 있습니다만, 이런 농담은 사양하고 싶군요. 여기가 야스와다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테네브로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울쿠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고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결투를 신청했을 터였다. 그는 테네브로즈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애써 되새겼다. 뒤틀린 면이 있을지라도 악당은 아니었고, 자신에게는 은인이었다. 이렇게 대면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저승에서의 삶은 뜻밖에도 만족스러웠다. 어머니와도 재회했고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았다. 그는 영혼을 수선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먼저 가디스에 도착한 넋들과도 안면을 익혀 나가고 있었다. 무덤덤하지만 좋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땅에서의 시간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이, 숨결을 닮은 산들바람이, 칼린카의 부드러운 털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때도 있었다. 기억의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것은 피송곳니 본가의 정원으로부터 왔고 어떤 것은 왕궁 별채의 창가로부터 왔다. 스카르파가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유리창으로부터.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볼로디아가 지닌 심장에서 스카르파의 혼만을 떠낼 수 있으리라고 했다. 볼로디아에게도 별 탈은 없으리라고. 그러니 대부분의 걱정거리가 무난하게 해결되었거나 무난하게 해결될 예정이었다. 다만…….

"왜, 저승에 있는 게 다행인가? 여기가 고향이었더라면 곧바로 대부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하인과 뒹굴면서 다른 가문의 뜰을 더럽히는 놈을 그렇게 부를 마음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치른 맹세를 아들이 함부로 깨서야 안 될 일이지. 그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약조한 건이지 않나."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할아버지께서 말씀을 해 주셨을 겁니다."

"했을까?"

테네브로즈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만면에 띤 채로, 그렇게만 되물었다. 울쿠스는 벤트레스와 똑같이 생긴 요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만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안 하셨을 수도 있죠. 저라도 함구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 의심스러우면 그대 어머니 되시는 분께 물어도 되겠지."

청년의 표정이 삽시간에 단호해졌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확언을 들어야지 않겠어?"

"듣고 싶지가 않단 말입니다!"

울쿠스는 반사적으로 고함을 내질렀고,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낙담한 듯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테네브로즈는 물론 첨언하지 않았다. 자세한 사연을 들려준다면 태도가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괴로워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 인간이 널 찾는구나. 슬슬 올라가거라."

한동안 악취미를 만끽하던 테네브로즈는 음산한 울림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해골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생각은 짧았고 대답은 빨랐다.

"싫은데요."

*  *  *

란드와르가 구석진 곳에서 금연을 시도하는 동안 다른 셋은 나르시소를 돌아다니며 곳곳을 살폈다. 외부인을 제지할 만큼 행동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진작 쪽문으로 도망갔고, 겁이 없고 상식이 처참하게 망가진 부류만 동공에 남아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 동공의 전체적인 모습은 로야페타 공장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망한 공장 말이다. 벽면을 뒤덮은 각인은 잔뿌리를 내리듯 바닥으로까지 이어졌고, 폐쇄된 입구가 있는 곳 근처에는 오래된 실험기기들이 아무런 규칙 없이 늘어서 있었다. 크기는 다양했지만 어느 무엇도 실제로 쓰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모두 제국 시절의 물건입니다. 이건 제 기억으로는 부유 미립소자 계수기였는데―적어도 몇 백 년은 쓰이지 않은 것 같아요."

"한 번 열어보게나. 혹시나 회로는 멀쩡할 수도 있으니."

볼로디아의 말에 로안은 익숙한 태도로 네모난 기기의 접합부를 만지작거리고는 뚜껑을 떼어냈다. 손바닥으로 부품 곳곳에 낀 먼지를 걷어내자 부식된 각인이 드러났다. 마력을 주입해 보았지만 회로 자체가 끊긴 듯 빛이 이어지질 않았다.

"완전히 고철이 됐는걸요. 쓸 만한 게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래 전 물건인데 기대할 게 있어?"

"누님은 와그다스 각인만 배우셨으니 모르시겠지만, 서로 장단이 있습니다. 인간 방식은 마력 처리가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정밀성이 부족하고, 와그다스 방식은 그 반대에요. 예전 방식을 복원해서 접목할 수만 있다면 타일라프람에는 다시 혁신의 바람이 불 겁니다. 최근 학계 동향은 잘 모릅니다만, 가문 어르신들께 듣기로는 정밀도 면에서는 기술적 한계점에 도달해서―"

로안은 멈추지도 않고 설명을 늘어놓았다. 벨레다는 소년의 첫인상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다. 알세스트의 기억을 얻었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대마법사가 된 건 좋은 일이겠지만… 어쩐지 입맛이 썼다. 싹싹한 소년이 헤이딘과 비슷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그녀는 스승님을 좋아했고, 연구에서도 즐거움을 느꼈지만, 가끔은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나기도 했다).

지금의 로안과 헤이딘을 붙여 놓으면 어떤 대화가 오갈지가 궁금했다. 열여덟의 겉껍데기를 뒤집어 쓴 인간 노인과, 백오십이 넘은 요정 유령. 그 유령이 평소에는 소년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구성미까지 느껴졌다. 완벽한 대칭이 아닌가…….

벨레다는 머릿속에서 우스갯소리를 이어가다가 뚝 멈췄다. 헤이딘의 목소리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연구자 자리가 있는지 물어 보거라. 너야 워낙 생각이 빠르니 인간 방식도 쉽게 배우지 않겠느냐. 소년의 말대로 두 방식을 접목할 수 있다면―>

아니, 스승님, 늪지대에는 움직이는 시체가 득시글거리고 이시 타브도 멀쩡히 살아 있는데 연구실 얻을 생각부터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애초에 세상을 구하면 연구자 자리가 다 뭐예요, 타일라프람에서 제일가는 대학에서 학장 노릇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말루카에서 평생 식객으로 살아도 될 테고요!

"꽤나 흥미롭군. 만약 이 요정들을 인간 세상으로 끌어내야 한다면… 말루카에 정착지구를 따로 조성할 용의가 있네."

…볼로디아가 말루카 한림원(翰林院)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늑대인간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헤이딘의 닦달이 심해졌다. 받지도 않은 연구실을 빼앗길까 겁먹은 투였다. 벨레다는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만들어내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헤이딘이 스스로 떠들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렇게, 반지를 낀 사람을 괴롭혀대는 게 아니라.

어쨌건 이시 타브까지 끝장내기 전까지는 별 도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유령 스승님의 말을 충실히 전해 나르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물론 어떤 대사를 고르느냐는 벨레다의 자유였고, 계속 입을 다무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지만… 자칫했다가는 잠들기 전까지 잔소리에 시달릴 위험이 있었다.

마음을 정한 벨레다는 최대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몸값을 올리려면 비굴하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됐다. 저쪽에서 먼저, 제발 학장 자리를 맡아 주십시오, 하고 빌어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능력은 충분하니까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밉보일 것도 없다.

"그런데 연구협력 말이야, 인간 쪽에서도 할 사람이 있긴 한 거지?"

"물론입니다. 대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걱정이긴 해요. 인간 도시에서는 와그다스 각인의 맥이 끊어졌고, 여기 학자들은 우리네 방식을 모르니까요. 혹시 두 분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가문 차원에서 지원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로안은 기다렸다는 듯 제안했다. 헤이딘이건 벨레다건 간에, 둘 중 누구라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대답은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왔다.

"저, 관심이 있습니다만……."

검은 곱슬머리를 짧게 자른 요정이 기기 뒤편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큰 체구와 수줍은 태도가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는 여자였다. 로안이 반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학자가 기기들 사이로 걸어 나와 손님들 앞에 섰다.

"나르시소의 일원, 첼리비다케가 귀하신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이번의 요정은 색소가 옅은 백금발을 뒤로 쓸어 넘긴 남자였다. 자신감을 대언하듯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극장의 인기 배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중후한 저음이었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인사하더니 턱 끝으로 곱슬머리 요정을 가리켰다.

"애석하게도 저 친구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답니다. 지금 화두에 오른 주제와는 관련이 없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와 깊은 대화를 나눠 보시는 게 어떤가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