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와그다스의 후예 (1)
경계하는 기색은 사라졌지만 상식 없는 어린애를 설득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란드와르는 미오리타를 불러냈다가 돌려보내며 자신이 아즈리온의 화신이 맞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 애썼다.
"환영 마법이잖아. 어른들도 다 하는 거야."
"환영은 이것보단 좀 더 투명하지 않냐."
"몰라. 아무튼 신은 그렇게 말 안 해. 믿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 난 신이랑 같이 있대서 와도 된다고 한 거야. 신 아니고 그냥 인간들만 있으면 안 믿어. 인간도 위험해. 난 이모가 인간들이랑 만나고 다니는 거 안 좋아했어."
"미오리타야, 얘 머리카락 좀 잡아당겨 봐라. 너 보고 환영이라잖아."
"아시겠지만… 저희는 물리력이 없는데요……."
기적만 보여 주면 불신자도 개종을 하는 게 도리인데 어떻게 된 게 이런 소리나 듣고 있었다. 꼬마야 그렇다 쳐도 동굴에 틀어박힌 학자들을 마주할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게임에서야 알아서 엄격하고 근엄한 신 노릇이 되었다지만, 두어 시간쯤이면 자신도 연기를 할 수 있지만, 수백은 되는 사람들 앞에서 줄곧 그럴 자신은 없었다.
"이 기회에 조금… 체통에 신경을 써 보는 건 어떻소?"
"제가 그게 됐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습니다."
"화신은 사람한테 예의도 안 차려. 사람이 화신한테 예의를 차리는 거야."
클렘이 끼어들었다. 어른한테 예의 차리는 법은 모르는 애가 화신의 예의를 논하고 있었다.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강렬한 흡연 욕구가 몰려왔다. 품에 손을 밀어 넣고 시가 목함을 만지작거리던 와중 헤이딘이 입을 열었다.
<반지를 아이에게 건네주시오. 나는 학자들이 어떤 족속인지 대강은 알고 있으니까…….>
란드와르는 선뜻 수긍했고, 아이에게 반지를 끼게 시켰다. 불신의 눈초리와, 반항과, 몸부림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건 해결이 됐다. 클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노려보다가 놀란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소리의 원천을 찾는 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이 허공의 한 점에 멈췄다.
"괴물 할아범이다!"
원래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있나? 아무튼 자신이 여기에 있어 봐야 할 일은 없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어린애를 다루는 면에서는 볼로디아가 훨씬 뛰어났고, 와그다스 학자들에 대해서라면 헤이딘이 전문이었다.
란드와르는 무능과 함께 기시감을 동시에 느꼈다. 말루카에서나, 나우파나에서나, 여기에서나… 자신의 역할은 결국 망치나 들고 싸우는 게 고작일 듯했다. 용역 깡패가 따로 없었다. 서른네 살의 용역 깡패는 테네브로즈가 있는 방으로 갔다. 요정이 벽을 바라본 채 누워 있었다.
"이 새끼는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본모습으로 누워 있어. 요정 티 내는 거 카스바에서도 불법이라고."
"누가 본답니까?"
"깨어 있네?"
테네브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을 뗐다.
"내가 고민을 해 봤거든."
"나으리께서 그런 것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자주 하니까 이제부터 알아 두고, 아무튼. 꼬마랑 얘기만 끝나면 바로 갈 거야. 그런데 너를 여기에 두면 안 되잖아. 여기 집주인이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하루 늦게 출발하면 안 되는 겁니까."
"굉장히 여유롭다?"
"전 모릅니다. 나으리가 시켰으니 나으리가 책임지십시오."
테네브로즈는 듣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란드와르는 깊이 심호흡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다행히 짜증을 억누를 만큼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이 사태의 원인은 모두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는 소린데, 너 본체로 돌아갈 수 있잖아. 지혜의 고리로. 내가 그거 주머니에 담아 가면 안 되는 거냐. 너는 술 다 깨면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청지기님한테 허락부터 받고요."
"왜, 허락 안 받으면 변신이 안 돼?"
"제가 저승에 있는 걸 안 좋아하시는데요. 시끄럽다고 싫어하십니다."
아주 잠깐, 그것도 화난 상태로 만난 사람의 성격을 재단하긴 어렵겠지만… 솔로틀이 테네브로즈와 궁합이 맞지 않으리라는 추측은 쉬웠다. 란드와르는 저승의 청지기를 향해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허락 받고 바로 가라. 도착하면 꺼내 줄게."
어느 순간 요정의 몸은 손바닥 크기의 장난감으로 변해 있었다. 란드와르는 지혜의 고리를 시가 목함 곁에 챙기고서는 나왔다.
* * *
란드와르는 종달새를 외곽 수도원에 맡기고서는 카스바로 돌아왔다. 요정 놈은 안주머니에 있었고 클렘도 적당히 협조적이 됐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클렘은 나르시소에 발을 들이자마자 혀를 쭉 빼물더니 계단 난간 너머로 뛰어내렸고,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붙잡지 못한 게 당혹 때문인지, 아니면 꼬마의 발이 너무 빨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벽면에 새겨진 각인만이 야속하리만치 화사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꼬마를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클렘이 자신의 쪽문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침략자들을 직시했다.
그리고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란드와르는 티아가 불러주는 대사를 따라 읊은 뒤 조명팀을 불러냈다. 천사의 휘광이 어깨를 뒤덮는 걸 느끼면서, 그는 주민등록제도의 이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신성도 카드 한 장으로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편의점에서 민증을 보여주듯이, 그것만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다면.
신성 증명 절차는 길고 고통스러웠다. 학자들의 반응마저도 고통이었다. 늑대의 존재는 겨우 납득시켰지만 그들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저 남자가 아즈리온의 화신이 맞다면―이 경우에는 다른 도시의 신을 대하는 예법을 갖춰야 하오. 83―7번 서가에 그 내용이 있었어. 찾아 오지."
"잠깐만, 아즈리온의 화신은 본신과는 별개라는 주장이 있어요. 그 경우에는 온전한 신격이 아니라 반신격으로 간주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의 관건은 화신을 타마기스의 황제와 동격으로 대할 것이냐가 되겠지요. 황제는 다른 반신들보다도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보다도 83―7번 서가에 있는 건 제국의 신에 대한 논증일 텐데요. 인간이 섬기는 신에게는 다른 예법이 적용될 거예요. 신학 잘 아시는 분? 제 전문 분야는 이론공간학이라서요, 읽어도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지금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결함이 하나 있다네. 서가에 있는 연구들은 모두 제국 시절의 것이야. 당시에는 인간의 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예법 또한 논의되지 않았단 말일세.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기존의 예법대로 하고, 새로운 준칙을 세우는 위원회를 발족해―"
"새로운 준칙이라니!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어딘가에는 이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을 겁니다."
아즈리온의 화신에게 적합한 예법이 뭐든 간에, 란드와르는 신을 앞에 세워놓고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무례라고 생각했다. 개그 컷씬(* Cutscene)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던 걸 실제로 겪자니 웃음은 나오질 않고 헛웃음만 흘렀다. 란드와르는 그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진 걸 확인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어 볼로디아에게 속삭였다.
"대장군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시다시피 공포정치는 꽤나 효과적인 도구고, 한 명을 끌어내 본보기로―"
"본보기로?"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텐데요."
"애석하게도 이런 종류의 사상가에게는 별 효력이 없다오."
볼로디아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가면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 미소에는 자조와 우울이, 그리고… 실로 짓궂은 농담이 섞여 있었다.
"전문가로서 보증해 드리지."
그랬다. 볼로디아는 한때 독재 정권의 적통이었고, 대공분실의 책임자였으며, 공포정치의 전문가였다. 란드와르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서는 불가피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컷씬대로라면 토론이 끝나기까지는 여섯 시간쯤이 더 걸렸다. 학자 중에서 겁이 많은 놈들은 이미 자기 방으로 도망쳤고 그나마 용감한 놈들만 이러고 있었다. 누가 옆에서 죽어나가도 말을 멈추지 않을 만큼 열성적인 놈들이었다. 심지어 마타치치가 깨어나려면 하루가 더 필요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른 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벨레다는 헤이딘의 말을 듣는 듯 턱 끝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는 중이었고, 로안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이윽고 알세스트의 기억 중에는 와그다스에 대한 것도 있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소감이 어떻냐."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전쟁 때 같이 지냈잖아."
"아."
로안은 짧게 신음했고, 대답을 망설이다가, 도무지 눈을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제 기억으로는,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충분히 이상했고, 인간들이랑은 섞여 살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황무지로 가려 할 때도 말리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어떻게든 타일라프람에 남겨 뒀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요."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 순간 강렬한 기시감이 뇌리를 덮쳤다. 로야페타에서도 똑같은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 공표시기를 조정해야 해… 마력 폭풍 사태 이후로 무색 마력 결정 가격이 235까지 올랐어… 암적색 별까지 합하면 보름 만에 3할이나 급등한 거야…….
― 발표를 늦추면 더 올라가겠지요… 불확실성은 시장의 가장 큰 적이에요…….
― 이봐, 마력 지맥 범람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이 바로 고갈기에서 범람기로 넘어가기 직전이란 말이야… 때를 맞추기만 한다면 가격은 충분히 안정화될 거야…….
정보사 사제를 앞에 세워두고 돈 이야기만 하는 꿋꿋함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났다. 상업가문의 반요정이나, 나르시소의 학자나 다를 바가 없었다. 천 년이 흘렀고, 교류가 끊겼으며, 심지어 영혼의 성분까지도 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와그다스의 후예였다.
"타일라프람에 남았어도 똑같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인간 세상에 두었더라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은 배울 수 있었을 겁니다."
"로야페타 요정들 봐라, 본성이 어디 바뀌나. 로야페타가 이렇게 된 건 너 죽고 나서도 좀 지난 다음이긴 한데."
"상업 가문 사람들 말씀이시군요. 후손들에게, 아니, 가문 원로분들께 몇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로안은 그렇게만 말했고, 깊은 한숨으로 남은 내용을 갈음했다. 그 심정이 절실히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