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카스바의 요정들 (3)
카스바의 요정 향우회는 단합력 있는 조직이 아니다. 사실은 조직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은원이 있고, 야스와다에 대한 태도 역시 극명히 다르며, 모든 요정은 서로의 친우거나 원수다. 누군가는 동족과는 최소한만의 연락을 유지한 채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끽하고 누군가는 두문불출하면서 요정 친우의 도움으로 먹고 산다. 심지어는 단 한 명만이 그 사람의 거취를 알고 있어서, 연결 고리가 끊기면 아예 고립되는 구성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우회는 필요하다. 인간은 언제나 요정의 정체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신분을 바꾸고 인간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려면 동지의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향우회가 운영하는 정착 기금과 구제금 제도는 파산 위기에 처한 요정들을 수없이 되살려냈다(당연하게도, 명문가 출신 요정들은 자본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벨레다 역시 그 제도의 수혜자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장 먼저 종달새를 찾았고, 그간 있었던 일을 밝혔다. 종달새는 벨레다에게 요정 모습을 만들어 준 다음 향우회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거기에서 벨레다는 산비둘기라는 별명과 함께 정착 지원금을 받았다. 2천 탈로나어치의 마력 결정이었다. 노예 기술자 일자리도 거기에서 구했다…….
그 후로 산비둘기가 향우회에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벨레다는 줄곧 종달새와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정확히는 벨레다가 종달새에게 신세를 진 경우가 더 많았다. 하기야 다 늙은데다 모아둔 돈도 많은 요정이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애 도움을 받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란드와르가 지하 투기장에서 뱃가죽이 뚫려서 사경을 헤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벨레다는 테네브로즈와 함께 세카두에 도착한 다음 재차 카스바에 다녀왔다. 영토의 출구를 세카두 저택으로 옮겨야 하는 이상, 1호부터 5호까지의 부하를 따로 둘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마침 종달새가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 년쯤 킬카타라이에 머무르면서, 소도시 특유의 아늑함과 값싼 물가를 즐긴 뒤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빈 집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도. 둘의 뜻이 일치했다. 벨레다는 그녀의 집에 부하들을 맡긴 후 세카두로 돌아왔다.
* * *
"1호! 4호!"
벨레다는 거실에 들어서며 남자 둘의 번호를 크게 불렀다.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익숙한 덩치 너머에서 가느다란 형체가 움직였다. 짧게 자른 흰 머리.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창백한 피부와 날렵한 매부리코. 종달새였다. 다과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 듯 주름진 손이 찻잔을 든 채 정지했다.
"그 사람들은 다 뭐냐?"
벨레다는 입을 떡 벌린 채 생각했다. 적어도 한 해는 있을 거라면서요! 아직 봄인데! 뒤따라 들어온 란드와르가 미간을 좁혔다. 한손으로는 테네브로즈의 목고대를 든 채였다.
"아니, 부하 빼고 아무도 없을 거라면서."
* * *
종달새는 벨레다를 뒤따라오는 금발의 인간 소년과, 건장한 전사와, 전사보다 키가 큰 늑대인간과, 헤롱거리는 소년을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환술을 쓰고 있었다). 벨레다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여행을 떠난 게 늦여름이었는데 벌써 돌아왔단 말인가?
"별이 그렇게 떠 대는데 한가하게 휴양이나 즐길 수는 없지. 그래, 돌아오자마자 참매가 네 소식을 묻던데. 아는 게 없냐고 따져 대지 뭐냐. 야스와다에서 널 찾고 있어."
"대답은 하셨어요? 그건 아니죠?"
"남들이 아는 정도로만."
카스바 요정 중 몇몇은 야스와다 명문가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참매는 그들 중 하나였고, 벨레다를 별불꽃으로 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다행인 점은 그가 벨레다를 요정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통구이용으로 넘긴 꼬마가 십 년만에 돌아왔다고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했다. 그는 그런 아이를 한 해에도 족히 백 명은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착오가 다시 정보에 혼선을 빚었다. 카스바 요정 향우회는 물론이고 야스와다 요정들 역시 벨레다를 향우회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애당초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고, 요정 마법을 쓴다고 의심받는데다가, 실제 나이까지 불분명하다면… 그걸 인간이라고 믿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일곱 해 전에 주인을 죽이고 사라진 애완동물을 그녀와 연관 지을 사람은 (나트람과 몇몇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이제 아즈리온 전서에서 내 이름도 볼 수 있는 거냐?"
종달새는 란드와르를 힐끔 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란드와르는 불편한 표정으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카스바 요정에게 행선지를 밝히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고 정체를 들키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이 노인이 벨레다의 후견인 격일지라도, 아무튼.
"그러다가 신벌이라도 받으면 어쩌게요?"
"받으면 받는 거지. 숨만 쉬어도 죽을 나이가 됐는데 무서울 게 뭐냐."
"역시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어색한 통성명 시간이 시작됐다. 종달새는 란드와르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고, 그 판단을 철회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도 들은 게 있는데다가 며칠 전엔 세카두에서 공표식까지 있었으니 솔직히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거였다. 란드와르는 칼을 꺼내들까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뜸 살인멸구를 시도하는 건 화신이 할 짓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전서에 이름 정도는 써 드리죠."
"의외로 격의가 없으시군. 요정 주제에 이렇게 말해도 되나? 괜찮지?"
종달새는 낄낄 웃었다. 란드와르는 진득한 두통을 느끼며 과자를 한 입 깨물었다. 요정이 선입견만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들은 인간이 그런 것처럼 고결하거나 숭고하거나 이타적인 삶을 살아낼 수 있다. 헌신이라는 면에서는 더욱 뛰어날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불행은 얽힌 요정들이 모두 나사가 한두 개씩 빠져 있다는 데에서 왔다. 벤트레스는 모티스가 아니었고 테네브로즈는 딤 나겔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헤이딘까지. 둘에 비하면 실로 멀쩡하긴 하지만 정상인 축에 든다고 말하긴 어려우니까. 이 늙은 요정도 마찬가지일 모양이었다.
"편한 대로 해요. 그쪽이 야스와다에 소식만 일러바치지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아무도 안 죽이고 여기를 나가는 거예요. 물론 수레를 하나 빌려준다면 더 좋겠죠, 걸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전서에 한 문단쯤은 추가할 수 있을 겁니다."
"두 문단."
"그래요, 두 문단. 이 일은 함구하시고. 그나저나 고향이 불타도 괜찮으신가? 떠돌이 신세라 쳐도 이거 하나로 믿기가 좀 그런데."
"나도 내 입은 못 믿지. 계약서라도 써 드릴까?"
계약서, 씨발, 계약서. 이제는 그 단어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었다. 생쥐도 아니고 요정 하나가 종이에 뭘 쓴다고 해서 소용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란드와르는 일단 나머지 사람을 모두 다른 방에 집어넣기로 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아즈리온의 체통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었다.
<지킬 체통이 남아 있으셨나요?>
남아 있다고 쳐요.
제일 먼저 벨레다와 부하들이 갔고, 그 다음에는 로안이 갔다. 란드와르는 볼로디아가 테네브로즈를 들쳐 업고 나가는 것까지 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자, 솔직히 말해 봅시다. 종이에 글자 몇 자 끼적였다고 카스바 요정한테 신뢰를 주는 건 문제가 있는 일이죠. 화신이 아니라 저 변방에서 올라온 촌뜨기도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사실 지금 제일 현명한 선택은 그쪽을 죽이고 벨레다한테 수레를 부르라고 시키는 거고요. 그러지 않는 이유는 나한테 마음의 여유가 약간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어떻게 지내는지가 항상 궁금했는데, 여기랑 비슷한가 봐?"
"카스바보다 훨씬 질이 나빠요. 사기꾼이 아닌 놈은 한 명도 없고 계약서에 이름을 빼는 건 예삿일이죠. 그렇게 써 놓은 서류로 남 인생을 저당 잡으려 들고요, 무능하고, 그렇다고 해서 싹 죽여 없앨 수도 없고, 여러 가지로 엉망입니다. 이건 모두 거짓말이니까 알아서 생각하시고."
"잠깐, 이쯤 되니 이쪽에서 질문을 하고 싶은데. 일단 화신은 맞으신 거야?"
란드와르는 편의점 알바생에게 민증을 건네듯 성흔을 보여주었다. 차가운 불이 손등을 기어오르며 낫과 망치의 형상을 그렸다. 종달새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고위직 사제들은 성흔을 찍고 다니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알고는 있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요. 댁이 아즈리온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사제를 내버려두진 않겠죠―정 믿기 어려우면 고개를 돌려 보시고."
뒤편에 선 견습 천사를 보고서야 종달새는 웃음을 터뜨렸다. 란드와르는 손짓만으로 미오리타를 돌려보낸 다음 다시 요정과 시선을 맞췄다. 노인이 꼭 열두 살짜리 장난꾸러기처럼 눈을 반짝였다.
"마음에 드는데! 좋아!"
전동 안마기를 시연하는 방문 판매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신인데 말이야. 란드와르는 입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고서는 사무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합시다. 난 당신이 비밀을 잘 지킬지가 의심스러운데,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일단 하나는 그쪽이 우리 교단 쪽으로 개종을 한 다음 황무지까지 가는 겁니다. 그 동네 요정들한테 볼 일이 있어요. 당연히 가서 싸워야 하고."
"이 나이에?"
천사가 마음에 들고 화신에게 존댓말을 듣는 게 좋을 뿐이지 용사 노릇은 사양이라는 투였다. 이해했다. 자신도 마음 같아서는 세카두 저택에서 빈둥거리고만 싶었다.
"그러면 두 번째. 마력 구속구를 끼고 우리 시설에서 얌전히 지내는 겁니다. 최고의 대우는 못 해 드려도 그런대로 살기 좋아요. 밥도 잘 나오고 마당도 넓습니다."
"냉큼 따라갔다가 죽는 거 아닌가?"
"정신 나간 요정도 잘 돌봐주는 중입니다. 정 못 믿겠으면 꼬마 불러서 물어 보시고."
정신 나간 요정은 벤트레스를 의미했다. 란드와르는 벨레다를 불러 그 사실을 증언하게 시켰고, 저택 시설과 펠로시에 대해서도 말하게끔 했다. 종달새는 다른 무엇보다도 흰둥이 늑대인간의 존재에 마음이 동한 것 같았다.
"그러면 더 따질 것도 없으니 바로 출발합시다. 일단 우리는 이쪽 지리는 잘 모르니까 같이 가야 할 겁니다. 얘한테 운전대를 맡길 수도 없는 일이고―"
"저 자가용도 있는데요."
벨레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운전 된다는 이야기 한 적 없잖아. 원래 있던 거야?"
"폐허에 가신 동안에 계약했죠. 로야페타에서도 최고급인 상표예요."
꼬마는 캐피탈의 힘을 빌려 BMW 5시리즈를 중고차로 뽑은 20대처럼 웃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려면 몸이 운전석에서 절반은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자가용을 마련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너 뭐, 대출 끼고 산 거 아니지?"
"일시불이거든요! 선물 청산해서 번 돈이에요!"
잘 생각해 보니 벨레다는 원래부터 돈이 많았다. 그걸 모두 선물 거래에 투자해서 대박을 냈으니 이제는 더 많아졌을 터였다. BMW 5시리즈가 아니라 롤스로이스도 뽑을 재력이 된 것이다. 성공한 청년 사업가의 표본이군.
란드와르는 성공하지도 못한데다가 구형 제네시스를 타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업가를 떠올렸고, 그만두었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근데 바닥에 발은 닿냐?"
벨레다는 부들부들 떨다가 뛰쳐나가듯 거실을 떠났다. 어쩐지 미안했지만 자신의 잘못은 아닌 듯했다. 바닥에 발도 안 닿으면서 어떻게 운전대를 잡는단 말인가? 란드와르는 빠르게 생각을 멈춘 뒤 종달새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아무튼 서부 쓰레기장으로 가야 해요. 거기에 쪽문이 있어서."
"서부 쓰레기장?"
"쓰레기장 들어가기 직전 골목요. 반쯤은 폐가라던데."
"보자, 그쪽도 지금 난리인데―와그다스 꼬마 하나가 깽판을 놓고 있거든. 혹시 이거랑 관련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