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카스바의 요정들 (2)
마타치치는 헤이딘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궁전을 떠났다. 익숙한 작업 선반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클렘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얹고서는 말했다.
"클렘, 손님맞이는 네가 해 주렴. 카스바 쪽문으로 오기로 했어. 쓰레기장 근처 말이야."
마타치치는 서부 쓰레기장에 쪽문을 두고 있었다. 클렘 역시 이모를 따라다니며 카스바 지리를 대강이나마 익혀 두었다. 건물 앞의 미궁을 작동시키는 법도 알았다… 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었다. 마타치치의 조수였던 시절은 이제 끝난 것이다. 클렘은 불퉁하니 물었다.
"내가 왜?"
"일단은 다른 학자들이랑 이야기를 해볼 거란다. 아무 말도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들어먹을 리가 없잖니. 일단 만나봐야 하는지, 아니면 막아야 하는지를 두고 떠들어대다가 천 년이 훌쩍 지날 거야."
나르시소의 중대사는 토론으로 결정되었다. 발언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으며 요정들은 이견이 없을 때까지 논의를 거듭했다. 참, 학자들이 만장일치제를 택한 것은 아니다. 말을 마치면서 "이견 없습니까?"를 외쳤을 때 거수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이건 만장일치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토론은 며칠 내내, 혹은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중앙 동공을 떠나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자신의 연구를 살피는 것은 각자의 자유였다. 하지만 삶을 돌보기 위해 중앙 동공을 떠났다가는 토론에서 질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끼리 조를 이루어서 토론 시간을 분담하는 것이다. 자리를 비우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할 수 있도록. (연구주제가 아니라, 공동체 운영에 대해서라면) 토론은 이제 건설적인 논의라기보다는 시간을 낭비하고 주제를 교묘하게 돌리고 이미 한 말을 반복하면서 상대가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투가 되어 있었다.
"그럼 내가 가서 어른들한테 말할래. 마타치치가 가서 그 사람들 데려와."
"맡길 게 따로 있지."
그리고 클렘은 모든 종류의 토론에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교활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영리하지조차 않은데다가… 솔직히 털어놓자면 멍청한 편이었다. 마타치치는 조카를 자신의 방식대로 아꼈지만 검은 걸 희다고 말하진 않을 정도로는 정직했다.
"들어오는 법을 알려주긴 했다만, 암호 풀기가 어려울 거야. 네가 직접 가서 열어놓는 게 낫지 않겠니. 허튼 짓은 하지 말고."
* * *
마타치치의 예상대로 학자들은 이방인의 방문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은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를 따져 물었고, 다시 토론을 시작했다. 이번의 주제는 <그 요정이 한 말을 믿어야 하느냐> 였다.
"궁전이 망가진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 요정의 주장을 정리해 봅시다. 이 땅이 어떤 지고한 존재의 꿈이고, 신들은 그분에게서 힘을 나누어 받았을 뿐이라는 것 말입니다. 완전히 금시초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됩니까? 이렇게나 중대한 사안이 완벽히 감춰져 있었다고요?"
"제국 시절에는 요정 신들이 나서서 그 기록을 지웠다고 해요. 인간의 신들에게도 진실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었고요."
"마타치치, 당신도 알겠지만 간결하고 직관적인 설명이 최우선입니다. 가정은 최소화되어야 하며 부가적인 요소는 없을수록 좋습니다. 비밀스러운 과거를 상상하기보다는 그게 모두 야스와다 놈들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잠깐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소. 만약 야스와다 놈들이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소리를 전해 왔을 거요―그러니 나는 아주 허무맹랑해 보이는 주장에도 가끔은 진실이 숨어 있다고 말하려 하오. 상상하지도 못하고 믿을 수도 없는 거짓말을 누가 지어내겠소? 어떤 얼간이가?"
그 질문을 시작으로 수십 명의 목소리가 뒤엉키기 시작했고, 갑자기 뚝 멎었다.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처리할 게 하나 있었다. 마타치치에게 수면약을 먹여야 했던 것이다. 정신의 궁전에서 헤이딘을 만나 논의를 전달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타치치는 선뜻 병을 비웠다. 사흘은 잠들어 있겠지만, 어쨌든, 그때까지도 토론이 끝나진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는 쪽과 믿을 수 없다는 쪽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때 갇혔다가 풀려난 입장에서 말하자면, 글쎄, 잘 모르겠어요. 야스와다 부제사장이 사실은 지고하신 분의 하수인이었고, 그 화신과 만나기 위해 우릴 일부러 풀어 줬을 가능성보다는… 도망자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려는 수작이라는 설명이 훨씬 명료하죠."
"하지만 그런 속셈이었더라면 예전에 이미 했겠지. 궁전에 야스와다 소년이 처음으로 나타난 건 수십 년 전의 일이란 말일세. 그렇지 않나?"
요정들은 중앙 공동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자면서, 그리고 서로를 깨워 가면서 언쟁에 참여했다. 누군가는 티끌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기억의 궁전에 발을 들였고 누군가는 실수인 척 그를 깨웠다(육신에 타격을 입으면 정신 집중이 흐트러지면서 궁전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음모와 배신이 계속되었고 의견차는 영영 좁혀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클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중앙 동공을 맴돌고만 있었다. 마타치치에게 말을 걸 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토론을 듣다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들여보내야 한다는 쪽의 말을 듣자니 그게 맞는 것 같고, 막아야 한다는 쪽의 말을 들으니 그것도 맞는 듯했다.
반대파의 주장대로,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해서 야스와다 첩자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었다. 버려진 지성소에서 숭배 서약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슈문의 신도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의심만 하다가 진실을 놓치는 게 아니냔 의견에도 일리가 있긴 마찬가지였다.
가서 손님맞이를 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 하고 있을까? 질문을 거듭하던 클렘은 문득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문을 열어주지 않더라도 바깥사람들이 들어오는 건 정해진 미래였다. 쪽문에 걸린 수수께끼를 푸느라 시간을 쓰느냐, 아니면 반나절쯤을 절약하느냐 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건 안 됐다. 어른들은 항상 회의가 끝나야 움직였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먼저 들어오는 건 나르시소의 규칙과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규칙은 중요했다. 찬성파도, 반대파도 여기에는 동의할 터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클렘퍼러는 기막힌 묘안을 찾아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침입자를 막으면 되는 것이다.
* * *
카스바를 이끄는 것은 마법 명가도, 선출직 시장도, 도시 연합의 결정도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의 욕망이 맞부딪혀서 서로 합쳐지거나 정반대로 튕겨나간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궤적은 도시를 덮을 만큼 빼곡하지만 여백을 남길 정도로는 성기다.
화려한 검투장 바로 옆에는 창문이 온통 깨진 폐가가 있고, 그 곁에서는 다시 도박장이 폭죽을 터뜨린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같은 길을 걷고 솜씨 좋은 연금술사와 비렁뱅이가 벽 하나를 맞댄 채 잠들지만 위에서 아래로 행운이 흐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건물도 그렇다. 폐가는 영원히 폐가다. 그게 서부에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먼 옛날, 역사에도 남지 못한 부랑자 무리가 카스바를 처음 세웠을 때, 그들은 서부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했다. 황량한 들판에 포석이 깔리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위로, 옆으로, 아래로 뻗어나갔을 뿐이지 도시의 첫 번째 길은 어쨌거나 서부에 깔렸다는 것이다.
서부는 한동안 카스바의 중심지였다. 인간이 모이는 만큼 쓰레기도 모였다. 한 종류는 인간처럼 걸어다니고 인간처럼 말하는 쓰레기였고 다른 종류는 뜯어 고치거나 분해해서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종류의 쓰레기였다. 둘 다 구린 냄새가 나고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사람들은 진저리를 내며 남부로, 동부로, 북부로 떠났다.
이제 카스바 서부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흉가와 온갖 종류의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그곳에 발을 들인다. 이유는 다양하다. 골치 아픈 것들을 내버리기 위해. 버려진 물건을 주워 팔기 위해. 약쟁이와 밀수업자와 빚쟁이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똑같은 이유로 돈 없는 요정들은 서부 쓰레기장 근처 폐가에 살았다. 그중에는 미친 늙은이도 하나 있었다. 어쩌다가 카스바까지 흘러왔는지, 뭘 겪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나우파나에 갔다가 정신을 놓았다는 가설과 어느 가문 별채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다는 가설이 대립했다.
후자가 조금 더 유력했다. 손목 힘줄만 절묘하게 끊겨 있는 건 높으신 분들 솜씨라고들 했다. 횡설수설하는 내용을 잘 들어 보면 가족이랑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거였다. 과거가 어쨌건 간에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카스바 요정 향우회(타향에서는 이런 게 필요한 법이다)가 그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추악한 아들아,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아니, 참. 난 할아버지 아들도 아니고 추악하지도 않으니까 입 다물고 식사나 해요. 팔다리를 다 잘라서 연금술사한테 팔아버리기 전에."
멀끔하게 생긴 청년은 주먹 크기의 밀떡을 노인에게 들이밀었다. 노인은 두꺼비마냥 눈을 깜박이다가 밀떡을 받아들었다. 청년은 조용해진 틈을 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랍장은 안 돼!"
서랍장 쪽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노인이 밀떡에서 입을 떼더니 발작적으로 외쳤다. 또 시작이군. 노인은 다른 사람이 서랍장에 손을 대려 하면 미친 것처럼 날뛰곤 했다. 거기에 무슨 보물을 숨겨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청년은 몸을 돌리고는 보란 듯이 먼지떨이를 휘둘렀다.
"예, 안 열어요. 그냥 겉에 먼지만 닦는 거예요. 어차피 안에도 종이더미만 잔뜩 있잖아요. 할아버지 글씨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들아, 안 된다! 안 돼!"
"아니, 먹던 거나 마저 드시라니까 그러네. 가만히 좀 있어요. 계속 그러면 서랍장을 확 갖다 버릴 테니까."
"내 추악한 아들아, 무슨 짓을 저지른 게냐?"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무슨 소리가 들리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청소를 마친 뒤 밀떡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하루에 한 개씩만 먹어요. 저번처럼 이틀 만에 다 먹고는 손가락만 빨지 말고."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이런 젠장, 말한 내가 잘못이지. 난 갈 테니까 어머니든 아들이든 간에 알아서 해요."
두 달 뒤에는 향우회에서 당번을 새로 뽑는다. 그만큼만 버티면 늙은이 수발도 끝난단 소리였다. 청년의 마음속에서 노인을 죽여서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싶다는 선의와 다른 요정들도 이 짓을 해 봐야 한다는 심술이 교차했다. 아마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겠지. 그래서 저 양반이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거고.
청년은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거리가 여러모로 쓰레기 같았다. 직육면체 형태의 다세대 주택이 폭이 좁은 길 양옆에 늘어섰고, 대부분은 창문이 산산이 깨진 채 방치되어 있다. 그래도 불을 지르면 꽤 많은 사람이 튀어나올 터였다. 마치 짚단에 숨어든 벌레들처럼. 꽤 볼만하겠군.
오른편으로 조금 걷자 길이 툭 끊기면서 계단이 나타났다. 난간의 일부가 톱으로 잘려나간 상태였다. 다른 건물의 부속 시설인 동시에 이 골목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두 도시 설계를 쓰레기같이 해 놓은 덕분이었다.
그는 카스바 서부를 통째로 불태우는 상상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계단 바로 아래에 수레를 세워 놓았으니 곧바로 중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무리 걸음을 옮겨도 계단이 끝나지 않았다. 마법일까? 이런 마법을 쓸 놈들은 황무지에나 틀어박혀 있을 텐데?
청년은 불안감 속에서 몸을 틀었다. 옥상 위에 선 소녀가 그를 향해 기묘하게 생긴 물체를 겨누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동시에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온몸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