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카스바의 요정들 (1)
란드와르는 서부 회당 차원문을 경유해 저택으로 향했다. 차원문을 빠져나오자 지하실의 흐릿한 윤곽이 시야에 들어왔다. 특유의 침침한 공기가 집에 왔다는 느낌을 줬다.
"야, 사제야. 안 자고 있지."
"깨어 있습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란드와르는 이어 물었다.
"너 숙취는 있어?"
"심하지요."
"그런데 왜 마셨어?"
"나으리께서 마시라고 하셔서 마신 건데요."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새끼가 원소학 배우라고 할 때는 왜 개겼어?"
"도대체 언제까지 원소학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
"아니, 새끼야, 숙취가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냐. 당장 내일 갈 건데 내가 술을 먹였겠냐고."
"먹였을 거 아닙니까."
"넌 씨발, 나를 대체 뭐로 보길래 그딴 소리를 하냐."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술 때문에 혀 움직이기도 힘든 모양이구나, 하고 걸음을 옮기자니 갑자기 기나긴 장광설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으리께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절 괴롭히고 싶을 때에는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으시는 분 아닙니까. 제가 술을 못 마신다고 했으면 기어코 먹였을 분이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란드와르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테네브로즈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도 느꼈다. 분류를 해 보자면 자신은 술 권하는 쓰레기였고 테네브로즈는 아무 거리낌 없이 동료를 죽이는 쓰레기였다. 그 둘을 저울에 올려 놓자니 어쩐지 무게추가 자신 쪽으로 기울었다.
<3교구 학살은 동료를 죽인 게 아니라 통상 업무로 간주해야죠. 반면 술을 강권하는 것은 엄연한 사내 부조리―>
좋아요, 그건 인정하는데, 댁네가 제일 쓰레기인 거 알죠?
<죄송합니다.>
티아와 적당히 우호적이고 적당히 적대적인 농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미운 정이 들어서인가 딱히 싫지는 않았다) 테네브로즈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술기운 섞인 푸념을 들어 주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요정 놈의 방이었다. 란드와르는 이 소원수리 시간을 끝낼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미안해. 내일 이야기하자."
"미안하면 술이 깹니까?"
"안 미안하면 술이 깨냐?"
괜히 짜증을 터뜨린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침대에 던져 놓았다. 내일 당장 카스바에 가야 할 텐데 그 전까지 멀쩡해지려나 싶었다. 그래도 걸을 수만 있다면 예정대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당장 미궁을 뚫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나르시소에서는 학자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쓸 테니까 마법사 하나가 헤롱거린다고 해도 방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미안하고, 일단 자라."
방으로 돌아온 란드와르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황무지의 학자들> 시나리오의 전개를 짚어갔다. 일단 마타치치의 존재는 그에게도 익숙했다. 얼마 안 되는, 개방적인 학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기야 그런 성격이니 수십 해 전에, 헤이딘에게 선뜻 말을 걸었을 터였다.
문제는 나머지였다. 카스바를 경유해서 나르시소에 도착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요정들이 란드와르 일행을 기꺼이 맞이할 가능성은 없었다. 발을 들이자마자 미궁을 가동하면 모를까.
설득에 성공한다 쳐도 변수는 한참이나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면 세계를 현계에 불러낸다면 보통 사람들까지도 그걸 보게 된다. 갑자기, 거대한 황금빛 구조물이 황무지의 1/4쯤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늪지대 전체가 썩어 문드러지고 나우파나 일대의 땅이 수정에 뒤덮인 것처럼.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지는 시기가 관건이었다. 황무지 요정들이 행동에 나섰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야스와다에서 추적자들이 떼로 보내질 터였다. 혹은 그 반대로, 추적자들이 가장 먼저 이상 현상을 발견할 가능성도 있었다. 2교구 분석실은 자미와 거문의 움직임을 통해 란드와르의 행보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가 전해준 소식을 상기했다. 아직 분석실에서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만 황무지 쪽으로 결과가 좁혀지는 모양새라고 했다. 추적자들이 파견된다면 나트람이 통솔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도.
이르든 늦든 간에 요정 놈의 옛 상사에게 사직서를 정식으로 건네야 할 모양이었다. 그걸 전달하는 건 자신의 몫은 아닐 테지만.
미궁 내부를 수월하게 돌아다니려면 슈문의 가호가 필요하다. 가호가 적용되는 대상은 열 명 남짓. 지금까지 모은 동료는 자신까지 포함해서 일곱. 란드와르, 볼로디아, 헤이딘, 벨레다, 로안, 테네브로즈, 벤트레스.
그리고 거기에 나르시소 학자 몇몇이 더해질 예정이다. 대부분은 도망술과 미궁 설계 말고는 젬병이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다. 마타치치도 그들 중 하나다. 사격술이 훌륭한데다가 헤이딘이 쓰는 보조 마법에도 능하니까 큰 도움이 된다. 그밖에도 쿠벨릭이나 첼리비다케처럼, 전투 경험이 있는 요정 동료를 임시로 영입하는 게 가능하다.
가호를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남은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제어실에 남아서, 관찰자 역할을 맡게 된다. 어디에 균열이 새로 생겼고 침입자들이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미궁을 조정해 침입자를 분산시키는 것 역시 그들의 몫이다…….
학자들의 능력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꽉 막힌 괴짜들이고, 전투원으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지만, 미궁 제어에 있어서만큼은 엄청난 전문성을 발휘한다.
반면 가호 대상자는, 변수가 많았다. 내부조가 오염지대로 들어가 이시 타브의 영향을 정화하는 동안 외부조는 미궁의 외곽을 돌면서 야스와다 놈들을 잡아야 한다. 오염 균열을 닫는 건 덤이다.
결국엔 인원 배분이 관건이었다. 내부조가 약하면 슈문을 구출하는 데에 실패하고, 외부조가 약하면 추적자들이 미궁을 뚫고 들어오거나 오염 균열을 놓치고 만다.
정리를 마친 란드와르는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을 두 덩어리로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은 자신부터였다. 오염지대를 정화하려면 아즈리온의 화신이 있어야 하니까 포지션이 겹치는 볼로디아는 외부 미궁으로 가야 할 것이다. 여기까진 쉬웠다.
테네브로즈는 어디로 보내는 게 제일 효율적일까? 벤트레스는? 나르시소의 임시 동료들은? 헤이딘과 벨레다는 떼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같이 다니게끔 해야 할까? 재정렬 목걸이는 누구한테 걸어 주지?
여건만 따지자면 게임보다 훨씬 좋았다. 볼로디아에게는 마력 부종 후유증이 없었고 테네브로즈에게서는 불사 특성을 발견했다. 로안은 알세스트 그 자체가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부딪혀 보기 전에는 답이 나오지 않을 고민이, 결과를 본 다음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을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란드와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는 적당히 찜찜하고 적당히 산뜻한 기분 속에서 목욕을 마치고서는 거실로 나왔다. 융단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 요정이 보였다. 테네브로즈가 벌써 일어났나 싶었는데 잘 보자 벤트레스였다. 누가 친척 아니랄까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내일 우리 출발할 때 사제들이 너 수도원으로 데려갈 거거든. 거기 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사제들 괴롭히지도 말고."
"얌전히 방에 갇혀 있는 거야 내가 전문이죠, 이래봬도 몇십 년을 별채에서 살았는데."
"그래서 밑장을 뺐어? 감금당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습관이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매 안에 청람색 별 패가 있지 뭡니까. 있는데 안 쓸 이유가 없으니까 썼어요."
정신을 영 못 차린 모양새였다. 하기야 서른 중반만 되어도 사고방식을 바꾸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벤트레스의 나이는 백 살이 넘으니까, 충격적인 사건도 실컷 겪었으니까, 앞으로도 저러고 살 게 자명했다. 이게 다 의처증 걸린 남편 때문에 벌어진 참사라는 거지…….
"아무튼 사제들 건드리지 마라. 바쁜 사람들이야."
"책만 넉넉하게 넣어 주면 됩니다. 종이랑 필기구도요."
"그거로 충분해?"
"야스와다에서도 서고에만 박혀 살았는데 똑같지 않겠습니까. 사실 노예 된 입장에서 불평할 것도 없고요."
"노예라니."
란드와르는 퉁명스레 내뱉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목숨을 빌미로 삼아서 맹약을 시킨 다음 끌고 다니는 건 어떻게 따져 보더라도 노예 계약이 맞았다. 벤트레스가 이런 관계에 큰 불만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카스바에는 안 들를 건데, 내가 나중에 널 따로 데리러 올 거야. 그게 모레일지 그 다음 날일진 모르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 둬. 다시 한 번 말해 두겠는데 수도원에 가 있는 동안에는 사제들 괴롭히지 말고."
* * *
정오 무렵, 벨레다는 지하실 차원문에 카스바로 향하는 좌표를 입력했다. 일곱 개의 좌표가 불통으로 나왔다. 반대편 차원문이 재충전 중이거나, 모종의 이유로 철거됐거나, 또 다른 차원문과 연결된 상태라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여덟 번째 좌표는 멀쩡했다. 제일 먼저 벨레다가 떠났고, 그 다음에는 볼로디아가, 로안이 차례대로 마력 소용돌이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제 지하실에 남은 것은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뿐이었다.
"전 나중에 형님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요."
"왜. 너 없으면 내가 곤란하다고."
"어차피 가서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터질지 알고 널 두고 가냐."
"머리가 아픕니다. 나으리께서 술을 먹여서요."
"그건 미안한데."
"미안해 하셔야지요."
"미안하긴 한데 머리가 아프면 차원문을 못 타는 거냐."
"토할 것 같단 말입니다."
"가서 토해."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한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옷깃을 붙잡고서는 차원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농구였으면 3점짜리 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