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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78화 (179/258)

178화 짧은 휴식 (3)

"대장군님, 저 요정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아니라네."

"이런 데에 둬도 되는 건가요?"

"나도 그게 의문일세."

*  *  *

공표식을 끝마치자마자 란드와르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테네브로즈에게 용건이 있었다. 세카두 사람들에게 화신의 얼굴을 까발린 이상 예전처럼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평범한 얼굴로 바꿔 봐라.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인간이랑 술을 자시겠다고 요정한테 환술을 명령하시는 겁니까?"

"오냐."

"공표식이 끝난 직후에요?"

"그래서 불만이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십시오."

"나도 알아. 근데 넌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나으리보다는 상식적인 것 같은데요."

란드와르는 대답에 앞서 옆을 힐끔 보았다. 벤트레스가 계속 기웃거리고 있었다(입은 신앙의 힘으로 봉인당한 상태였다). 세카두 시내에 나가 볼 기회를 노리는 모양새였다. 줄곧 저택에만 갇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뿐만 아니라 란드와르 일행이 출발하면 당분간은 수도원에 완전히 격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트레스를 술집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건 마력 구속구나 맹약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머리가 문제였다.

이왕 저택에 갇힐 신세끼리 친해지라고 펠로시랑 붙여 뒀더니 밑장을 뺀 놈이었다. 손모가지가 걸리지도 않았고 돈이 몇 억씩 오가지도 않는데 첫 판부터 장난질을 친 것이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거지?

"내가 상식이 아예 없는 새끼였으면 너 형님 데리고 갔다. 먹고 싶은 안주 다 시켜줄 테니까 일단 가자고."

테네브로즈는 벤트레스를 술집에 데려갈 수 없으리라는 데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무제한 안주 시식권이 탐이 났는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겉모습을 적당히 바꾼 다음 함께 용병 사무소로 향했다. 시간이 늦은 탓에 사무소에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다. 공표식의 여파도 있을 듯했다. 바로 이 도시에 아즈리온이 내려왔는데도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휑하게까지 느껴지는 대기실에는 남자 하나만이 앉아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투였다.

"환술 풀어 봐라."

"여기서 말입니까?"

"보는 사람도 없지 않냐."

"제가 보고 저 사람이 볼 텐데요."

"그러니까 하라고."

충격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옆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원래의 얼굴로 되돌아온 뒤 알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선이 맞닿자 놈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엿이나 먹어."

"기억하고 있네? 이거 신성모독인 거 알지?"

"몰라. 그때 안 죽였으니까 지금도 안 죽이겠지."

아즈리온의 화신을 앞에 두고서도 태도가 그대로인 걸 보면 과연 기개가 있는 새끼였다. 씩 웃은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시켜 다시 환술을 썼다.

"한 잔 하러 가자. 뭐든 시켜줄 테니까. 마력 결정도 넉넉하게 챙겨 왔어."

"형씨 돈이면… 교단 돈 아니야? 교단 돈으로 술을 마신다고?"

"저번에도 교단 돈이었는데. 안 될 거 있어?"

"젠장, 아무래도 꿈인 모양이군. 일단 가자고. 꿈에서라도 교단 재정 좀 축내 봐야지."

셋은 일단 술집으로 향했다. 저번에 들렀던 곳과 같은, 각실이 있는 고급 주점이었다. 안주를 고르도록 테네브로즈에게 메뉴판을 넘겨주자마자 맞은편에서 질문이 넘어왔다.

"그런데 꼬마는 뭐야? 천사쯤 되시나?"

"요정인데. 환술 때문에 데려왔어. 공표식도 한 판에 원래 얼굴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요정이라고?"

알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테네브로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은 평범한 인간 소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요정 놈은 잠시 환술을 풀었다가 되돌리더니 치즈 플래터와 과일을 골랐다.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서야 알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자, 정리해 보자. 형씨는 사실 아즈리온이고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은 요정이시다 이거지."

"평범한 요정은 아니고, 반신 비슷한 거야."

알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술잔을 들이켰다. 위스키를 맥주처럼 마셔대는 건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충격이 커서? 기껏 비싼 걸 시켜 줬는데 좋은 기회를 땅에 버리는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서는 천천히 향을 즐겼다. 쌉싸름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화사한 꽃향기가 콧등을 울리면…….

"맞다. 이왕 왔는데 너도 한 잔 해야지."

"건강에 나쁜 건 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되살아나면 되잖아. 술 때문에 몸 망가지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알톤과 테네브로즈가 똑같은 표정으로 란드와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런 시선도 익숙해져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는 남은 잔에 술을 가득 따른 다음 요정을 향해 밀었다. 떨떠름한 질문이 돌아왔다.

"꼭 마셔야 합니까?"

"나쁜 기억이라도 있냐."

"그건 아닙니다만."

테네브로즈는 눈을 질끈 감고서는 사약이라도 들이키듯 한 호흡에 잔을 비웠다. 잔이 탁자와 부딪히며 깡 소리가 난 건 그 직후였다. 머리만 탁자에 얹고 팔은 아래로 늘어진 모습이 해동된 쭈꾸미를 널어놓은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이던 알톤이 촌평했다.

"술이 약한가본데."

"그런가봐. 나도 처음 먹이는 거야."

"왜?"

"지금까진 입에도 안 대려고 했거든. 앞으로는 안 먹이려고."

"아니, 그러니까, 왜?"

"뭐가 왜냐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죄다 말이 안 되잖아."

란드와르는 말이 안 되는 것, 의 목록을 나열해 보았다. 아즈리온의 화신이 용병의 어깻죽지를 부러뜨려 놓았다는 것. 그 다음에는 술친구가 되었고, 이제는 요정 정원사까지 술자리에 끼었다는 것. 그런데 그 정원사는 술이 아주 약해서 위스키 한 잔에 엎어진다는 것…….

말이 안 되긴 했다. 그 뒤편에 얽힌 사정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란드와르는 장대한 부조리극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꿈이라서 그래."

이쯤 되자 알톤도 완전히 포기했는지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동네 용병이 조금 시건방질 수도 있지, 그걸 두고 어깻죽지를 부러뜨리는 건 치졸한 일이 아니냐는 거였다. 란드와르도 동의했다.

"내가 그때 막 내려왔다고. 몸 좀 풀려는데 마침 누가 시비를 걸잖아."

"그래서 날 상대로 연습을 하셨다 이거구만. 사제들이랑 대련할 생각은 못 했어?"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나온 거였는데."

알톤은 신이 신도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란드와르 때문에 한 달은 일을 못 나갔으니 손실을 보전해 주어야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이것까지도 옳은 말이었다. 란드와르는 품에서 마력 막대 뭉치를 꺼내서 휙 던졌다. 수백은 족히 될 돈이 허공을 가로질러 알톤 앞에 도착했다. 녀석은 누가 뺏을세라 막대를 챙기고서는 중얼거렸다.

"이게 꿈이길 빌어야 할지, 꿈이 아니길 빌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치자. 눈 뜨면 결론이 나지 않겠냐."

그러고는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다. 인간관계에서 돈만큼 보편적이고 범용성 있는 윤활제는 없는 법이다.

"그나저나 내가 파문당한 거 있잖아, 알지. 내가 원래 교단 사제였던 거."

"왜, 다시 받아 줄까? 외곽 수도원에 자리 나는데."

"됐수다. 예전부터 장본인한테 묻고 싶었던 게 있어서 그래. 사소한 거긴 한데―"

"말해 봐."

"마법을 싫어하는 거야, 아니면 마법사를 싫어하는 거야? 싫어하는 이유는 또 뭐고? 어차피 마법사들이랑도 잘 돌아다녔잖아."

그러게, 왜지? 아즈리온 신앙은 시뮬레이터에서나 실전에서나 마법사들에게 페널티를 주고 있었다. 로안에게 정체를 밝힌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신앙을 유지한 채로 페널티를 제거하려면 성흔을 찍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유를 묻자면 이상한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쏟아진 나머지 지엽적인 부분은 따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티아에게 정확한 사정을 물으려던 찰나 테네브로즈의 입이 열렸다.

"당연히 마법을 싫어하는 건데요. 생각해 보십시오, 마법은 그분 입장에서는 기생충이 자기 머릿속을 멋대로 바꿔 놓는 일이란 말입니다. 어느 정도는 눈감아주고야 있지만……."

코를 탁자에 박고 있어서 완전히 뻗은 줄 알았는데 귀는 다 열어놓았던 모양이다. 란드와르는 갈등했다. 인간 용병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입이라도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테네브로즈의 혀는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허락을 받은 건 따로 있어요. 환술 같은 거죠. 제가 되살아나는 거도 그런 거고요. 허락을 받은 일이라면 마력의 흐름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땡볕이 웅덩이를 바짝 말리고 추위에 호수가 어는 것과 똑같은 법칙이란 겁니다."

요정이 입을 다물고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알톤도 취할 만큼 취해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적당히 걸러 들어. 아즈리온님은 마법을 싫어하신다, 마법을 보면 머리가 아파서 그렇다, 이렇게."

정리를 해 놓자마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고 보면 이거, 권능이랑 연관이 있나? 아즈리온의 권능이 어떻게 보면 마법 무효화에 가깝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결국엔 마력의 근원을 끊어내는 거니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즈리온의 신격은 꿈 조각의 융합체에 칠살성을 연결시킨 결과물인 관계로… 각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몇 가지 축복은 별으로부터 온 것이고, 권능은 꿈 조각의 고유한 효과입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니죠?

<아닙니다.>

란드와르는 추궁을 거듭하다가 그만 생각을 멈췄다. 전적이 수도 없이 많기야 하지만, 일단은 계약서도 고쳐 써 놨거니와 이런 데에서 뒤통수를 맞을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안일함이 뒤통수를 부른다는 지적은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너무 의심하다 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분위기는 괜찮았다. 나우파나 폐허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던 란드와르는 문득 테네브로즈가 완전히 뻗은 걸 발견했다. 슬슬 가서 침대에 눕혀야 할 듯싶었다. 어차피 이야기도 거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있었다.

이어지는 문답까지 마친 란드와르는 요정 놈을 등에 업고는 일어섰다. 알톤이 아쉬움과 얼떨떨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벌써 들어가시게?"

"이놈도 뻗었고. 내일 바로 일 나가야 하거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논 거야."

"말씀을 꼭 임무 나가는 용병처럼 하시는구만. 하긴 꿈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안 겪어본 건 상상을 못 한다더라고. 아무리 꿈이라도……."

알톤도 그게 한계였는지 고개가 툭 떨어졌다. 란드와르는 곯아떨어진 인간 전사를 내려다보다가 술값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각실을 떠났다. 일어난 알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최소한 아무렇게나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술집이 있는 번화가를 벗어나 서부 회당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회당에도 야간 당직자를 빼면 깨어 있는 사제가 없을 터였다. 앞마당에 들어설 무렵에야 요정 놈이 부스스 움직였다.

"깼냐."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꿈지럭거리는 걸 보면 듣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그 자리에 멈췄다.

"다 도착했으니까 내려와라. 다 큰 놈 업고 다니려니 귀찮다."

"못 걷는데요."

"몸 새로 만들면 되잖아. 자살하기 힘들면 내가 직접 죽여 줄게. 이번엔 칼도 가져왔어."

뱉고 보니 제정신으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이런 작자를 화신으로 모시고 있는 정보사 사제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기도문이라도 덧붙여 주는 게 예의겠지만 역시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생각이나 하는 동안 테네브로즈가 다시 웅얼거렸다.

"술은 영혼을 흐려 놓는단 말입니다. 나으리가 마시라 시켰으니 나으리가 책임지십시오……."

그러고는 테네브로즈의 고개가 다시 고꾸라졌다. 내가 안 취하는 건 신이라서가 아니라 지구인이라서였군… 란드와르는 별 쓸모도 없는 깨달음을 마음에 하나 추가한 채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림자 속을 지나가자니 들뜬 기분이 차츰 잦아들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쉴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었다. 최후의 도달점까지 남은 단계는 둘. 황무지에서 슈문을 구출하는 것과 타마기스의 황제에게 완벽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두 항목은 최대한 빠르게, 최소한의 간격으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그는 셋이서 다시 대작할 기회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길 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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