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짧은 휴식 (2)
벨레다가 도착한 다음날에는 공표식이 있었다. 끔찍하게도 엄숙한 분위기였다. 사람 머리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도 교단 측 인원을 제외하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맨땅에 서 있는 십자가를 보고도 경건해질 수 있는 게 인간인데 신이 실제로 눈앞을 걸어 다닌다면 이런 반응이 당연할 터였다.
속으로 불평을 쏟아내던 란드와르는 문득 눈에 띄는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모두들 디스크가 터지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딱 한 명만 목이 빳빳했다. 화신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쓰는 투였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알톤.
― 그러니까, 만약, 화신이랑 단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어떤 말을 하겠냐는 거야. 예전엔 교단 소속이었다면서.
― 엿이나 먹어라?
― 진지하게 그럴 거야? 화신한테 욕해도 돼?
― 어차피 파문됐는데 무슨 상관이야.
술자리에서 했던 대화를 정산할 시간이었다. 란드와르는 팬서비스 삼아 알톤과 시선을 맞추고는 활짝 웃어 주었다. 녀석은 자습시간에 졸다가 들킨 고등학생처럼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음이 저절로 훈훈해졌다.
* * *
란드와르가 알톤에게 눈치를 주는 동안 볼로디아는 벨레다와 면면을 트고 있었다. 서로 알게 된 지는 꽤 되었지만 정작 얼굴을 맞댄 기간은 손에 꼽을 만큼 짧은 탓이었다. 말루카와 나우파나에서는 벨레다가 없었고, 로야페타와 타일라프람에서는 볼로디아가 없었으니까.
대화 주제는 세계 자체에 대한 것에서부터 사소한 일상에 대한 것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벨레다의 태도가 화두에 올라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드는 비결을, 심각한 일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을 궁금해 했다.
"예전 이야기를 해야겠는걸요. 도박판을 기웃거리다 보면 가끔,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사람이 갑자기 남은 돈을 모두 걸어 버리는 모습을 보게 돼요. 자기가 쥔 패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지기도 지겨우니 손을 털겠다는 거죠."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군. 모든 게 지긋지긋해질 때가 있지."
"꼭 도박이 아니라도 다들 그런 경험이 있죠. 난 일곱 살이 되기도 전에 벌써 그 기분을 느꼈어요. 그렇게, 항상 지기만 하는 판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구요. 타일라프람에서 태어났으면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을 텐데 전 아무것도 아닌 카스바 고아였다구요. 그래서 남은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어요."
벨레다의 키는 열두어 살로 착각할 만큼 작았다. 겉모습에서 원래의 나이를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정신만 따로 떼어놓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볼로디아는 스스로 야스와다로 팔려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하나도 자라지 못한 아이의 삶을 상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삶은 덤 같은 거예요. 홧김에 전재산을 건 게 대박이 터진 거죠. 난 벼락부자처럼 남은 인생을 막 쓰는 중이고. 이러다가 죽어도 불평은 안 할래요. 어차피 덤으로 받은 인생인데 없어져 봤자 본전이잖아요."
"하지만 자네는 다른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가 되었지 않나. 지금 하려는 일도 자네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충분히 현명하니만큼 사안의 중대는 구분을 할 줄로 아네."
볼로디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반론했다. 비록 야스와다로 팔려간 이후의 삶이 덤에 불과할지라도, 어쨌거나 그 덤은 다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물론 이게 가볍게 대할 사안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일단 슈문을 못 꺼내 오면 나우파나 폐허 같은 게 황무지에 새로 생기게 되겠죠. 자칫하면 대전쟁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고요."
벨레다는 방긋 웃으며 볼로디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도 이왕이면 마음은 편하게 먹는 게 좋잖아요? 괜히 심각해진다고 해서 남들이 사정을 봐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거로 된 거지 일부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자네는 참 신기하군."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요. 스승님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구요."
"걱정을 멈추고 싶어서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네. 보통은 그래."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아까 전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어요. 다 덤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는 것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아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죠. 들어 보실래요?"
"궁금하군. 말해 주겠나?"
벨레다는 목을 가다듬고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운을 뗐다.
"자, 죽은 사람의 혼은 달을 타고 저승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청지기가 그걸 씻어서 다시 올려 보낸다고요. 그런데 늑대 이름을 못 찾으면 일을 멈출 거라고요. 아무도 안 태어날 거라고요."
"그렇다네."
"그러면 둘 중 하나잖아요. 우리가 늑대 이름을 찾아내면 잘 된 거고, 못 찾아내면… 혼들이 기억이 씻긴 채로, 모두 저승에만 머무르게 되겠죠! 그것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고통을 느낄 수는 없으니까요."
"잠깐, 자네 요지가―우리 모두가, 굳이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
볼로디아는 그렇게 물으면서 나무와 풀들이 도시를 뒤덮으며 자라나는 장면을 눈앞에 그렸다. 잃어버린 것들에 비애를 느낄 사람조차 없을 미래였다. 이윽고 땅에서의 삶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그 바깥의 존재가 긍정할 수 없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가 닿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할, 다른 세계의 미덕이 볼로디아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다들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이왕 태어났으니까 최대한 즐기다가 가는 게 좋겠죠. 하지만 아무도 안 태어나는 게 딱히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죽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사라지는 걸 슬퍼할 수 있지만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은 걸 슬퍼하지 못하는걸요."
"하지만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도 애석한 일이 아닌가?"
"일단 저는 살아 있는 게 재미있어요. 끔찍한 기억도 산더미지만 비교를 해 보면 좋은 쪽이 더 많다는 느낌이죠. 이왕이면 오래오래 재밌게 살고 싶고, 남들도 저만큼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모두한테 행복한 곳이길 바라고요. 그건 분명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할 테고요."
그 말과 이어지는 말 사이에 아주 짧은 간격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그냥 나쁜 일은 다 지나갔으니까, 별채에 갇혀 있지 않으니까 하는 생각인 거예요. 당장 십 년 전에는 하루하루가 끔찍했다구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태어나서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평생을 불행하게만 살다 가는 경우도 많구요. 확실한 건 고통뿐이죠. 사람은 결국 늙어서 아프다가 죽기 마련이니까……."
"좋아, 자네 의견을 정리해 보겠네. 고통과 기쁨은 균형이 맞질 않는다는 거지. 태어난 사람이 얼마만큼의 행복을 누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반대로 몇 가지의 고통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고. 내가 똑바로 이해한 게 맞나?"
"그렇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행복이 태어날 이유가 되어야 한다면, 글쎄, 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걸요. 이번은 운이 좋았다지만, 그 짓을 또 해야 한다면… 어휴!"
* * *
펠로시와 벤트레스는 의무적으로 차투랑가를 두고 있었다. 친해지지 않으면 둘 중 하나를 수도원으로 보낼 예정이라는 게 란드와르의 입장이었다. 다행히도 며칠뿐이긴 했다… 다행인가?
며칠 뒤에는 벤트레스도 나르시소로 떠나겠지만, 잠깐만 참으면 된다지만, 벌써부터 고역이었다. 펠로시는 생각했다. 요정 유령한테 각인을 배우라더니 이젠 맛 간 요정 놀이 상대를 하라는 거예요?
"이거 원, 너무 시시해서 졸음이 다 나오는데 그래."
"어쩔 수 없잖아요. 그쪽은 백 살도 더 살았는데."
차투랑가 대결은 펠로시의 5연패로 끝났다. 둘은 협상 끝에 종목을 별 놀이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마흔다섯 장의 종이 놀이패를 써서, 제일 점수가 높은 별자리 조합을 만들어내는 놀이였다. 원래는 요정의 전통이었지만 말루카에서도 그 맥이 이어졌고, 인간 도박장에서까지 인기가 많았다.
"고향에서 하던 거랑은 점수 계산이 약간 다른데. 조합도 빠진 게 있고."
"우리 방식대로 해요."
"전통을 존중해야지."
치열한 논쟁 끝에 말루카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펠로시는 방 서랍에서 놀이패를 가져왔다. 사제들과 놀 때 쓰던 것이었다. 벤트레스는 패를 자신이 섞겠다며 우겼고,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벤트레스는 손에 쥔 패를 빤히 노려보았다. 첫째 판부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곱 장 중에서 바꿀 수 있는 패는 두 장뿐. 운 좋게 청람색 별이 손패에 들어오면 단번에 승기를 굳힐 수 있지만 정상적인 확률은 1/17에 불과했다. 그는 가능성의 수를 빠르게 계산했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나저나 그쪽 반려자랑 꼬맹이가 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오고 있는데."
"그래서요?"
"간통을 의심해 보라는 거지.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 같거든."
"정신 나간 소리 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반려도 아니고 간통도 아니거든요!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있어서!"
펠로시는 그렇게 외치고서는 몸을 돌려 닫힌 문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칼린카가 날아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알아도 하늘을 보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벤트레스는 재빨리 옷소매 안에 숨겨 둔 청람색 별 패를 보라색 별과 바꿨다.
펠로시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모든 게 끝나… 잠깐만. 항상 웃듯이 휘어져 있던 늑대인간의 눈매가 갑자기 예리해졌다.
"냄새가 달라졌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차가운 종이 냄새가 섞여 나요. 살갗에 안 닿은 종이 냄새요."
새로 알게 된 사실―늑대인간들은 인간 형상일 때에도 개만큼이나 후각이 좋다. 벤트레스는 머릿속의 잡학 사전에 한 줄을 추가하고서는 미끄러운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패배는 여유를 잃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백 살도 더 먹은 노인을 의심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노인공경이라는 말을 모르나?"
"내가 이래봬도 도박장 경력이 거의 십 년인데요! 패 바꾸는 걸 한두 번 본 줄 알아요?"
"아하, 어릴 적부터 도박장에 드나들어서 예절을 못 배운 거로군. 그러면 명문가 출신인 이 몸이 너그럽게 이해해 줘야지."
"추잡스럽게 놀다가 별채에 갇혔다던 분이 남 예절 걱정도 해 주시고 참 고맙네요."
펠로시는 벤트레스의 넓은 옷소매를 빤히 노려보았다. 저기에 패가 최소한 한두 장은 들어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달리 감출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일어나 봐요. 소매 한 번 올려 보게. 숨긴 게 있나 봐야겠어요."
"그렇게 의심을 하니 슬프군 그래. 내가 협잡질이나 하려고 긴팔 옷만 입는 게 아닌데 말이야."
벤트레스는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지난 수십 년간 팔뚝의 흉터는 그의 든든한 전략적 동반자이자 도구가 되어 주었다. 애정이 필요할 때에는 애정을, 충격이 필요할 때에는 충격을, 염려가 필요할 때에는 염려를.
쓰라린 과거를 쓰라린 채로만 남기는 건 아무래도 낭비였다. 그는 놀이패를 숨기지 않은 쪽의 소매를 끌어올려 흉터를 보여주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자 펠로시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이나 싶더니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지금 반대편 소매에서 놀이패 떨어진 거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