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짧은 휴식 (1)
란드와르는 벨레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헤이딘의 반지를 챙겨서 수도원으로 달려갔다(그때 요정 둘은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꼬마가 저택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일러둘 게 있었다. 늑대에 대한 건 헤이딘에게 설명을 맡긴다 쳐도… 로안은 기억을 되찾은 후로 성격이 완전히 변했던 것이다.
"세상에 별일이 다 있네요. 잠깐만,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는 건가요? 명색이 대마법사신데. 그쪽 가문 사람들은 이 소식 들었고요?"
"그러고 싶으면 그래라. 난 모르겠다. 아직 말도 안 전했어."
"그냥 살래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대마법사한테 반말을 해 보겠어요?"
"너도 보통 애는 아닌 거 알지."
"보통 애가 이러고 있을 리가요. 기껏해야 공방에서 월급이나 받고 살겠죠."
"미쳤다는 소리야. 칭찬이 아니라."
딱히 놀란 기색도 없이 이러는 걸 보면 신경줄이 강철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란드와르의 정체를 처음 알았을 때도 화신에게 목숨을 잃는 건 엄청난 영예가 아니겠냐며 농담을 던졌다고 했다. 벨레다도 상식인은 아닌 거지.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실감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그게 얄궂게도 안심이 됐다. 무슨 일을 겪든 간에 벨레다는 앞으로도 계속 벨레다일 것만 같아서… 잠깐만, 그래도 좀 바뀌는 게 낫지 않나? 나이가 들어서까지 저 성격이면 주위 사람들이 곤란할 텐데?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벤트레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요정이 하나 추가됐어. 명문가 놈이야."
"재수 없는 성격은 아니죠?"
"맞아."
"괜찮아요, 귀하신 분이 인간 따위에게 먼저 말을 걸진 않을 테니까요."
"아마 그럴 걸."
* * *
란드와르는 반지를 돌려주고서는 파르타를 만나러 갔다. 벨레다는 곧바로 차원문에 발을 들이기보다는 헤이딘과 마저 이야기하는 편을 택했다.
그녀는 나우파나 폐허에서의 일을 꽤 즐겁게 들었고, 세계의 진실에 대해서도 경쾌한 태도를 유지했다. 시답잖은 잡지를 보면서 세상에, 를 연발하다가 책장을 덮으면 그대로 잊어버리는 소시민처럼. 물론 헤이딘이 말하고 있는 건 누가 누구와 바람이 났다더라 하는 사연이 아니라 신들이 얽힌 이야기였지만 벨레다는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 일만 잘 하면 됐지.
<조금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는 게냐?>
"당연히 없죠. 스승님은 그렇게 똑똑하시면서 이런 건 왜 모르시는 거예요?"
뻔뻔스레 대꾸하자 헤이딘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포기했다는 투였다. 긴 한숨이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더니 할 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슈문은 이면 세계에 갇힌 채 이시 타브의 공세를 막아내는 중이었다. 황무지에 가서 와그다스의 신을 구해 낸 다음 늑대의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이면 세계를 현계에 불러내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수정 덩어리가 나우파나를 휩쓸고 타마기스 요정들이 역병 저주에 갇힌 것처럼, 황금빛 미궁이 나르시소를 뒤덮게끔 하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균열을 통해서 이시 타브의 수하들도 기어 나올 테지만, 아무튼 그럴 수밖에 없다. 갇힌 사람을 빼내오려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려면 일단 카스바로 가야 한다.
"여기 사제들도 데려가야 해요? 소식도 없이 떼로 몰려가면 차원문 주인이 싫어할 텐데. 그쪽 요정들도 낯선 사람은 안 좋아한다면서요."
<그럴 리가. 정보사 도움을 받을 일은 없을 게다.>
"왜 안 데려가요? 여럿이면 더 좋잖아요. 교단 사제들이면 잘 싸울 테고요."
<사정이 복잡하다더구나.>
슈문의 미궁을 이루는 것은 실로 다양한 공간 마법이었다.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오염지대에서는 이시 타브의 영향력까지 강해졌다. 그런 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려면 슈문의 가호가 필요했다. 가호를 받은 사람은 단절된 장소나 함정까지도 무시하면서, 모든 곳을 누빌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가호를 받지 못한 사람은 큰 쓸모가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그분께서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야.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한 번에 가호를 내릴 순 없다는 게다. 기껏해야 열 명 남짓이라고 했어.>
헤이딘의 설명은 조금 더 이어졌다.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오염지대에 진입해서 이시 타브의 수하를 물리치고 슈문을 구하는 것. 혹은 외부 미궁을 돌아다니며 균열을 막고 추적자들을 죽이는 것. 미궁이 올라오면 카스바 사람들도 그걸 볼 테고, 바로 야스와다로도 소식이 들어갈 테니까.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는 아직 몰랐다. 외부조에 배정되면 좋겠지만(나트람을 죽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오염지대에 발을 들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 되리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뭐, 그거야 란드와르가 알아서 정할 문제였다…….
"그건 그렇고 새로 온 요정 있잖아요. 성격이 별로라던데 어때요?"
<귀찮은 놈이야.>
"귀찮은 요정이면 거기서 거기죠. 명문가라면서 뻗대나 봐요. 으스대고요."
<아니, 그건… 그런 건 아니야. 만나보면 알 게다. 설명할 방법이 없구나.>
"뭐, 그래요. 화신님이 데려왔으니까 아주 나쁜 놈은 아니겠죠."
벨레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일어섰다. 차원문만 넘으면 신입을 마주할 수 있을 터였다. 마력 소용돌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란드와르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름은 벤트레스고, 테네브로즈의 사촌형님인데, 자화자찬이 심하고, 병신인데,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성격이 안 맞으면 골치가 아플 거라고.
대체 어떤 사람이라 저러지? 질문을 안고는 거실에 발을 들이자 요정 둘이 탁자에 마주앉아 차투랑가를 두고 있는 게 보였다. 격자판 위에서 기물을 움직여 상대의 기물을 차지하는 놀이였다. 둘 중 하나가 테네브로즈고 다른 하나가 벤트레스라는 건 확실한데 얼굴이 똑같은 탓에 누가 이기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와, 진짜 똑같이 생겼네."
진심으로 감탄하는 순간 지고 있던 쪽이 양손으로 차투랑가 판을 들더니 놀라운 속도로 뒤집어엎었다.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낯선 인간 때문에 너무 놀라서 손이 미끄러졌군. 아우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된 김에 처음부터 승부하는 게 어때?"
태도를 보아하건대 이게 벤트레스인 듯했다. 그렇다면 테네브로즈는… 그는 나뒹구는 기물을 손바닥 가득 움켜쥐고는 상대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러고는 일어나 자신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래서 내가 설명이 어렵다고 한 게다.>
벤트레스는 사촌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벨레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해맑은 미소 위에 초점 없는 눈동자가 오염된 마력핵처럼 박혀 있었다. 이렇게 마주보니 동생 쪽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너, 그 애구나! 헤이딘의 애완동물 말이야. 항상 궁금했는데 여기서 만나니 좋은걸. 이야기 많이 들었어."
활기찬 목소리가 언짢은 내용을 담고 날아왔다. 벨레다는 첫인상이 확 나빠지는 것을 느끼고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귀하신 명문가 분들이 인간 따위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 줄은 몰랐네요."
"그럼, 내 친구가 너 때문에 골머리를 잔뜩 앓았는데."
"나트람이랑 친했어요?"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인다니 실망인걸. 머리가 하얘질 나이가 얼마 안 남긴 했지만. 아무튼 친구가 누구냐면―네가 알지 모르겠는데. 쉭겐이라고 본 적 있어?"
"들은 적은 있죠."
나트람은 동생을 불구로 만든 후에도 종종 별채를 찾아오곤 했다. 말을 걸면 대답이 나오는데다가 별채 바깥으로는 나가지도 못하는 혈육만큼 훌륭한 말상대는 없으니까. 덕분에 벨레다도 요정들 이름을 옆에서 주워들었다.
"그래, 그 녀석이 언제는 지하서고에 먼저 찾아오더니 나트람 욕을 실컷 하는 거야.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나 뭐라나. 아, 그래. 이것부터 물어봐야겠다. 네가 도망가기 몇 달쯤 전에 재단사가 드레스를 만들어 줬다면서? 그건 누가 부탁한 거야?"
"아무도 안 했는데요. 옷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드레스를 입히지 뭐예요. 도망칠 때 입을 옷이 필요했던 건데. 이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냥 그거 입고 갔죠. 사람들이 부잣집 딸이 유괴 당했다가 도망친 줄 알더라구요."
기억을 이끌어내다 보니 달갑지 않은 순간까지 함께 떠올랐다. 반지를 완성한 날이었다. 별채에 찾아온 나트람은 반지를 보고는 괴상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더니 이상한 일이었다.
― 드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누가 네게 이걸 끼워 주었느냐? 저 병신 놈이? 아니면 본관의 하인이?
― 아녜요, 큰 어르신. 제가 직접 깎은 거예요.
― 반지를 만든답시고 대장장이를 부르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그랬다가는 타마기스의 시체들마저도 우릴 비웃었을 테니.
그 말을 듣자마자 카스바에서 배운 갖가지 욕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트람은 별채에서는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 둘이 스스로 재단사를 불러서 고급 드레스를 맞출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가주님, 하도 늙어서 노망이 났는가본데 재단사를 부른 건 우리가 아니에요. 드레스를 만들라고 시킨 것도 우리가 아니고요. 다 댁이 한 일이라고요!
속마음을 그대로 쏟아내지 못한 건 아직까지도 큰 후회로 남아 있었다. 과거로 되돌아간다 쳐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을 입밖에 냈더라면 손가락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목이 달아났을 게 뻔했다.
"역시나. 동생이 기르는 애완동물한테 드레스를 맞춰줬다가 웃음거리가 됐다고 한 달 내내 짜증을 냈다던데, 잘 생각하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벨레다는 나트람을 미친 늙은이로 기억했다. 그건 쉭겐도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벤트레스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요정에게 종족과 연령대와 신분을 뛰어넘은 공감을 느꼈다.
"봐라, 네 스승님이 갇혀 있다는 건 알 놈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고. 갇힌 사람이 어떻게 재단사를 부르겠어? 별불꽃 영감쟁이가 직접 부른 거잖아? 그런데 자기가 해 놓고 그걸 가지고 성질을 부려 댄다는 거지. 하여간 쉭겐도 좋은 놈은 아니지만 그 늙은이는 성격이 독보적으로 꼬여서……."
벨레다는 벤트레스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이 요정과는 열흘 밤낮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