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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75화 (176/258)

175화 도시와 교환 (4)

"본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절차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는군요. 차원문은 준비되어 있으니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편지 확인하시고."

라나지트가 한 손에 편지를 쥐고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각인사들에게 와그다스 방식을 가르치는 동안 조교 역할을 맡은 사제였다. 벨레다는 편지를 확인하고서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를 띤 채였다.

그걸 본 라나지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일었다. 표정이 꼭 물고기 떼를 발견한 갈색곰 같았다.

"기밀 도장이 찍혀 있어서 걱정했는데, 별일은 아닌가 봅니다."

"그럼요, 지금까지 여기서 하던 거랑 똑같아요. 황무지 요정들한테 용건이 있다네요. 가서 각인이나 또 만지작거리겠죠. 걱정을 하긴 왜 해요?"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말실수를 했다는 듯 라나지트의 입이 꾹 다물렸다. 벨레다는 생각했다. 뭐, 자기 동생 생각이 난다고 그러겠지. 아직 어린데 그렇게 위험한 곳에 다니는 게 염려스럽다고.

정신 차리세요, 사제 아저씨! 난 카스바 출신이고 어린 시절은 야스와다에서 보냈다고요. 성격 나쁜 가주한테 시달린 데다가 도망쳐 나올 때에는 열흘 밤낮을 괴수 피만 먹으면서 살았죠. 화신 아저씨 말대로, 그래서 내가 쓸데없이 강한 척을 하고 다니게 됐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겪은 사람이 황무지 요정들을 무서워하겠어요?

애초에 내가 왜 야스와다에 갔는지는 알아요?

*  *  *

누구든 속일 준비가 된 협잡꾼과 글러먹은 도박 중독자. 서류 위조범과 모조 보석 전문가와 밀수업자. 도시 연합이 금지한 조합식을 찾아 헤매는 연금술사. 인류에 공헌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거나 사악한 마법사. 총체적인 사회 부적응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는 숭고한 면을 하나씩 숨겨둔 사람들.

사실을 인간 군상을 나열할 필요조차 없다. 한 단어로도 충분하다―카스바. 이곳은 세카두보다 구식이지만 타일라프람만큼 복잡하고 로야페타 이상으로 돈에 굶주려 있다. 언제나 그렇다. 아이조차 예외는 아니다.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심술궂은 질문이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곱씹고 있군 그래. 이젠 뭘 또 떠올려 보실 작정이신가? 해는 뜨겁고 물은 축축하다고? 종달새는 고개를 흔들어 잡상을 떨쳐냈다. 구질구질한 골목과 구질구질한 사람들이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참, 종달새는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건 가명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처지가 변하고 겉모습이 바뀌더라도 영원할 가명 말이다. 그러면 본명은 뭐냐고? 없다.

오십 년 전에 그녀는 딤플이라 불렸고 이시그롤 상단의 중역을 맡았다. 괴수 부산물이나 세탁해 팔던 구멍가게를 상단으로 키워 놓은 것이다. 덕분에 딤플의 장례식은 꽤나 호화로웠다. 이제는 매일같이 술집 앞 테라스에서 차나 홀짝이는 삶을 살고 있지만(술은 마시지 않는다. 취했다가 무슨 소리를 하게 될지 모르니까.).

이게 인간의 제일 큰 문제다.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죽는다. 그러고서도 요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십 년 전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한단 말이다. 번번이 새로운 이름과 얼굴을 만들어내야 한다니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그래도 방법이 없다, 여기에서 살아가려면 적응할 수밖에. 카스바에 머무르는 요정은 모두 그러고 지낸다. 야스와다랑 소식을 주고받는 놈이 있고 남쪽으로는 침조차 뱉지 않는 놈이 있지만, 심지어는 와그다스 출신도 있지만 어느 부류든 요정이라는 걸 떳떳하게 드러내진 않는 것이다.

만약 신입이 눈치도 없이 내가 요정이요, 하고 광고를 하고 다니면? 둘 중 하나다. 설득을 하거나, 죽여 버리거나. 카스바는 모든 게 엉망진창인 곳이지만 그런 얼간이들이 망치기에는 너무 훌륭한 도피처이기도 하다.

종달새는 푸념을 마치고는 키가 땅바닥에 붙은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근처를 귀찮게 맴도는 녀석이었다. 동전을 던져 줘도 갈 기미가 없었다.

"왜, 동전보다는 종이돈이 더 좋으냐? 하여간 이 동네에는 제대로 되어먹은 게 없어. 어린 것들은 뱃속에서부터 남 주머니 터는 법을 배우고 나오는 것 같단 말이야. 불한당은 소매치기를 하고 신사적으로 교육받은 녀석들은 구걸을 하고 다니지. 보아하니 넌 꽤나 제대로 배운 모양이구나,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걸 보면."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할 이야기가 있다구요!"

새된 외침이 돌아왔다. 전형적인 카스바 꼬마였다. 곱실거리는 검정 머리카락에 검정 눈. 먼지와 반항심으로 뒤덮인 얼굴까지. 골목 어딘가에 이런 애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숨어 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옷은 봐줄만하게 입었군. 좀 더러워졌긴 해도 거적때기를 걸치진 않았으니 말이야.

"뭐, 신흥종교라도 홍보하는 중이야? 아니면 도박장이 새로 열렸어? 이왕이면 도박장인 쪽이 좋겠는데. 심심해 죽을 지경이거든."

"모두 아니에요! 여기에서는 못 할 이야기라니까요!"

"아하, 내가 놓친 투자 기회가 있는 거구나. 로야페타에 비공개 합자회사가 새로 생긴 모양이지. 이제 막 발견된 마력 지맥을 개발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테고. 그런데 이걸 어쩌냐, 나도 거지 신세인데. 가서 다른 손님 찾아 봐."

"이런 말은 안 하려 했는데, 딤플이 번 돈을 벌써 다 쓰셨어요?"

"뭐라고?"

종달새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인간 목록이 머릿속에 늘어졌다. 목록이라고 해 봐야 많진 않다. 대부분 늙어서 죽었으니까. 그러면 이건 누구지? 손녀딸? 손녀딸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꼬마가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제 직업은 치매 걸린 할아버지 말상대 겸 심부름 하는 거고요, 이름은 아무렇게나 부르시면 돼요. 정신이 얼마나 오락가락하는지 한 시간마다 이름이 바뀐다니까요. 글쎄, 이제는 제가 딤플인 줄 알고 온갖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들딸이 유산에만 눈이 벌게져 있는 게 천만다행이죠, 자기 아빠가 하는 이야기를 잘만 들었으면 여기 있는 건 제가 아니라 그 작자들이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녀는 다급히 꼬마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오가는 사람들은 여자애가 다 큰 여자를 앞에 두고 떠들어대는 광경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어린 사기꾼이 호구를 물었구나 하고 있겠지.

"좋아, 여기에서 이야기를 못 할 이유가 뭔진 알겠어. 어디 조용한 데로 가자."

"바로 죽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아까 말했지 않냐,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굴러 들어온 장난감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장난감이 별로 재미가 없으면요?"

"부숴서 버릴 거야."

아무 여관에나 들어서자 주인이 그녀와 꼬마를 번갈아 보더니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종달새는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렸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짜증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사람을 정신 나간 변태처럼 보고 있어."

"어쩔 수 없잖아요? 조만간 일곱 살이 될 여자애랑 여관에 올 여자는 정신 나간 변태밖에 없으니까."

"너 정말 말을 재미있게 하는구나."

종달새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반쯤은 진담이었다.

"당연한 일이죠, 전 똑똑하고 재치도 있으니까요. 길거리 고아가 부자 할아버지 말상대가 된 비결이 뭐겠어요?"

"그 부자 할아버지라는 게 도대체 누구냐?"

"이시그롤 상단주시죠. 조만간 전 상단주가 되시겠지만."

딤플은 이시그롤의 핵심이었고, 당연히 상단주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상단주의 아들 역시. 딤플이 듀어스로 이름을 바꾸고 술집 테라스에 죽치고 앉아 있게 된 후에도 아들 녀석은 곧잘 그녀를 찾아와 선물거리를 안겨주곤 했다. 아버지가 유언장에 써 놓기를,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다나 뭐라나.

고마운 일이었다. 치매가 걸린 건 애석한 일이고.

"어쩐지 요새는 찾아오질 않더라니. 못 보게 된 지 두 해는 됐어. 그러면 내가 거기 있다는 것까지도 그 녀석이 말해 준 거냐?"

"제가 알아냈다고 해 줘요. 필요한 대답을 모으느라 고생이었거든요.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도 쉽진 않았고요."

"몇 살이라고 했지? 일곱? 그 나이치고는 굉장히 유능한 것 같긴 한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가서 불효막심한 아들딸들이라도 혼내 주랴?"

"그건 아니구요, 이직 기회를 알아보는 중이에요. 할아버지가 숨이 꼴깍거리시거든요."

헛웃음을 지은 종달새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호장을 쳤다. 이런 싸구려 여관에는 언제나 듣는 귀가 있다.

"그래서, 말상대 노릇은 그만두고 요정의 조수라도 되어 보겠다는 거냐?"

"쓸모는 고용주님이 정해 주셔야죠. 경리든 가정부든 시켜만 주세요. 배우면 되는 일이니까요."

"아니, 나는 널 고용할 마음이 전혀 없어. 여기서 널 죽이고 갈 작정이란 말이야. 똑똑한 것들은 뒤통수도 잘 치거든. 이거 봐라, 노망난 늙은이 심부름을 하라고 붙여 놨더니 뒷구멍으로 수작질이나 하고 있지 않냐. 십 년쯤 지나면 다른 놈한테 가서 이러고 있겠지."

"그러면 협상 결렬이네요!"

꼬마는 빽 외치고는 침대에 가서 드러누웠다. 동정심이라도 이끌어내려는 수작일까?

"그래, 이건 좀 궁금해지는데. 그 잘 돌아가는 머리로 이런 미래는 상상을 안 한 거냐?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아뇨, 이것까지도 예상했는데요."

"예상했다고?"

"그냥 목숨이 판돈이다 치고 가능성 낮은 도박을 건 거죠. 인생을 단번에 바꿀 도박이요. 당연하잖아요, 전 이렇게 살다 죽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타일라프람에서 태어났으면 지금쯤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했을 테고 로야페타에서는 경영 교육을 받고 있었을 거라고요.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카스바의 고아 꼬마가 되어 버린 거죠. 신세를 못 바꿀 바에는 그냥 지금 죽는 게 더 낫다구요."

유쾌하게까지 느껴지는 자조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겁 없이 당돌한 젊은이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이런 꼬마는 처음이다. 영리하고, 야망으로 타오르는데다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단성까지 있다. 게다가 아직 일곱 살밖에는 안 됐다!

종달새는 야심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래, 이번 판은 네가 졌어. 네 목숨은 이제 내 거고."

"죽이겠다는 거죠?"

"아니, 나도 도박을 한 번 해 보련다. 너 같은 꼬마를 이런 여관방에서 죽이고 싶지는 않거든……."

꼬마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종달새는 씩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내 동료 중에는 야스와다 놈들이랑 소식을 주고받는 녀석도 있어. 통구이용 인간을 보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더군. 가서 어떻게든 애완동물이 되도록 노력해 봐. 성공만 한다면 기막힌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이야, 이건 성공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이는데요. 그냥 조용히 한 끼 식사가 될 인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 그러세요?"

"나도 나름대로 진심이야. 자물쇠를 안쪽에서 열리도록 달아 주지. 도착하면 바로 도망쳐서… 적당히 성격 좋아 보이는 늙은이를 찾아. 누가 봐도 귀족이겠다 싶은 노친네 말이야. 높으신 분들은 인간 말도 할 줄 알거든. 지금처럼만 떠들어 대면 확률이 절반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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