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도시와 교환 (3)
헤이딘은 클렘퍼러를 보낸 뒤 소년 모습으로 돌아왔고, 서가에 기대 앉아 오래된 설계도면 묶음을 뒤적이며 시간을 죽였다. 절반이 지나가기도 전에 오류 세 개가 나왔다. 필기구가 있었더라면 글줄을 덧붙여 놓았으리라 생각하면서 종이 끄트머리를 약간 접어 두었다. 이 근처에 다시 들를 일이 생길지는 의문이지만.
두 명의 그림자가 진입로에 드리운 것은 네 번째 오류를 막 발견한 직후였다. 일전의 소녀가 주황 머리를 한 갈래로 땋은 여자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안경이 낯이 익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헤이딘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받은 각인 도면은 잘 썼어요."
여자는 성큼 다가와 헤이딘의 겉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주근깨가 알알이 박힌 얼굴에 유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식이 없길래 형님한테 아예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요. 일단 살아 있는 건 확실하고―그간 잘 지냈어요?"
"죽긴 죽었습니다. 몸을 아예 버렸거든요. 이제는 완전히 각인 속에서만 삽니다. 그나저나 실례지만, 성함이……."
"마타치치예요. 그쪽은 별불꽃의 헤이딘이셨던가?"
"가문 이름은 떼고 불러 주십시오. 이젠 명문가 요정도 무엇도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통성명을 마친 헤이딘은 클렘을 힐끔 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만남이 못마땅한 듯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애는 심부름꾼입니까?"
"조카에요. 심부름꾼일 때도 있었는데 이젠 아니게 됐죠. 좀 컸다고 말을 안 듣기 시작했거든요."
"오냐오냐 하는 것도 좋지만 버릇을 좀 들여야겠는데요. 아까는 날 서가에 밀치지 뭡니까. 내 제자도 워낙 말을 안 듣긴 하는데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러진 않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소녀는 혀를 쭉 빼물더니 그만 사라졌다. 현계로 돌아간 것이다. 야생 칼린카만큼이나 천방지축인 애였다. 헤이딘은 벨레다와 저 소녀가 붙어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하다가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그쪽도 잘 지낸 모양입니다."
"마냥 즐거운 일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즐겁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안 그래도 누구한테 이걸 얘기해야 하나 항상 골치가 아팠는데 딱 적임자가 온 거죠. 당신이 저번에 설명했던 걸 개량했어요."
"저번에요?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났던 적이 있던가?"
긴 대화가 오간 후에야 헤이딘은 상황을 깨달았다. 수십 해 전에, 영혼 각인 도면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둘은 늑대의 이름 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른 것, 이란 그가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만들던 것을 포함했다.
"내가 만들던 게 마력 포탑이었다고요? 그쪽이 완성한 건 들고 다닐 수 있는 포탑이고?"
"그럼요. 남이 했던 말은 다 기억하면서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는 까맣게 잊다니 신기한데요. 그러고 보니 당신도 조카를 제자로 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게 조카인가요?"
수십 해 전에, 고작 한 번 만나고 만 상대에게 잃어버린 과거를 전해 듣는 것만큼이나 느낌이 묘한 일은 많지 않으리라고 헤이딘은 생각했다. 산산이 부서진 채, 자신을 짜 맞춰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자기 병이 된 기분이다. 도자기가 복구되면 거기엔 무엇이 담길 수 있을까? 으스러진 삶에 대한 원망? 그런 건 사양하고 싶군.
"머리가 망가졌어요. 앞도 안 보이는 상태로 하루종일 혼자 지내는데 제정신으로 남아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죠. 제자는 인간 꼬마고요. 철이 없긴 한데 머리 자체는 백 살 먹은 요정들보다도 잘 돌아가는 앱니다."
"아, 그래요. 이게 요점이었는데. 인간 하니까 이제 생각이 나네요. 화신이랑 같이 다닌다면서요? 정리해 보자. 손발이 날아갔고, 화신의 동료가 됐고, 제자는 인간이라고요―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까? 너무 길어지면 실례일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요. 이런 건 대충 듣고 넘어가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거든요."
마타치치는 바닥에 쏟아진 책을 쌓아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헤이딘은 그 옆에 주저앉은 뒤 벨레다를 만났던 날로 되돌아갔다. 만찬 재료로 팔려온 고아와 감금당한 부가주는 십 년이 지나 카스바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전사 하나와 요정 시종이 그들의 세계에 나타났다…….
장소는 카스바에서 말루카로, 로야페타로, 나우파나 폐허로 옮겨갔다. 기나긴 이야기의 종착지는 저승이었다. 헤이딘은 늑대의 이름에 대한 것까지 설명하고서는 마타치치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웃음만큼이나 밝고 활달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의 공간을 메웠다.
"이야,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도면을 줘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거네요. 가르칠 제자를 찾고, 도망쳐서 카스바로 가고, 늑대인간 왕을 구해내고, 다시 나한테 왔다고요. 재미있는걸요."
"내가 이 일에 지분이 많은 것 같진 않지만―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죠.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일찍 오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나도 인류의 영웅쯤은 될 수 있었을 텐데. 인정도 못 받는 발명가가 아니라요. 여기 사람들은 너무 고지식해요. 새롭고 낯선 걸 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친 사람 취급을 하죠. 난 그냥 예전부터 있었던 걸 조금 개량했을 뿐인데. 당신이 도면을 고쳐서 반지를 만든 것처럼요."
푸념과는 반대로 마타치치의 표정은 여전히 유쾌했다. 헤이딘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한 채로 답을 망설였다. 미묘한 침묵이 흐르더니 높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늦게 왔다고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농담이에요. 내 영토는 카스바에 이어져 있으니까, 언제든 오기만 해요. 대신 우리 쪽 사람들이 불친절해도 그건 이해를 해야 돼요.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는 걸 무서워하거든요."
"그래도 이런 소식을 들고 온 사람들을 박대할 리는 없잖습니까."
"여기 사람들을 너무 얕보는걸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학자들이 당신네를 환영하면, 글쎄, 뭘 판돈으로 걸어야 할까요? 어쨌건 환영할 리는 없어요. 물론 예외는 있죠. 혀만 잘 움직여대는 녀석이 하나 있거든요……."
* * *
그때 란드와르는 헤이딘의 반지를 낀 채 요정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공표식 준비야 정보사가 알아서 하는 중이고, 로안은 마법 연습에 매진하고 있으며, 볼로디아는 여전히 묵상에 빠진 관계로… 딱히 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헤이딘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 둘이 얼마나 더럽게 놀았는지 알 사람은 알죠. 물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만 일단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전적이 있으니까요."
그 둘은 쉭겐과 토텐부르그를 의미했다. 그쪽 집안도 어둠달만큼 꼬인 게 많아 보였다. 란드와르는 모티스 배신 사건의 전말이 꽤 흥미진진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들은 내용을 세 문장으로 정리했다.
"자, 그러니까… 토텐부르그가 모티스랑 위장결혼을 했다 이거지. 쉭겐이 뒤에서 조종을 한 거고. 정확히는 일드얀이."
"그렇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길래 그 반려가 어떤 놈인지 알려 주려고 했습니다. 입을 열기도 전에 따귀가 날아오더군요. 자기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대화가 필요가 없죠, 상대는 이미 결론을 내린 판인데."
"그래도 좀 데리고 오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냐."
"아깝다고 생각했으니 함께 도망치자고 했지요. 인간 도시든 어디든 좋으니 떠나자고요. 그런데 살기가 싫다는 사람을 어쩌겠습니까."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는 모티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꿈을 쫓는 대신 스스로를 평생토록 야스와다에 가둬 온 요정의 삶에는 애처롭고도 숭고한 면이 있었다. 파르타를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토텐부르그를 사랑한다고 믿어야 했을 것이다. 그 다짐에서 토텐부르그의 진의는 딱히 중요한 항목이 아니었으리라.
어쨌거나 입맛이 쓴 일이었다… 란드와르는 솔로틀의 말을 되새겼다. 수정 심장에 있던 혼은 모두 회수했지만 모티스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폭발에 휘말렸을 때 완전히 으스러진 모양이라고. 파르타와 해후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던 셈이었다.
죽어서야 만난 것과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깊은 비극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는 아쉬움을 일깨울 바에야 이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몫은 아닌 감정을 떠나보내자 얄궂은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잠깐만. 궁금한 게 생겼다. 모티스가 따라온 이유는 어떻게 알아낸 거냐. 원래는 너 죽이려고 따라온 거라면서. 그것도 추리를 한 거야?"
"직접 들었지요."
"모티스한테서?"
"쉭겐이 말해준 겁니다. 대모님께서 명령을 내리셨는데, 자기는 모티스가 죽고 내가 살아 돌아오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더군요. 내가 없어지면 하소연할 상대가 사라져서 그랬을 겁니다. 그 놈도 나트람 영감 성질머리를 받아 주느라 고생이거든요."
란드와르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벤트레스를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이마를 짚은 채 치명적인 인기에 도취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평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평판을 제 손으로 망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냐."
"이러나저러나 앞으로는 못 볼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고 했죠. 모티스한테는 그런 명령을 내려 놓고 나한테는 이러는 꼴이 조금 같잖긴 했습니다만, 뭐, 너그럽게 넘겼습니다. 그 집안은 원체 문제가 많거든요. 현명한 사람이 이해해야지요."
자길 죽이니 마니 하는 일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성품에 무슨 꼬리표를 달아야 할까? 관대함? 인자함? 떠오르는 단어는 많았지만 그 무엇도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소한 인간의 말에는 그런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지 싶었다. 란드와르가 머릿속의 사전을 뒤적이는 동안 벤트레스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은빛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맛이 가 있습니다. 겉보기로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깊이 들어가면 속이 아예 썩어 있죠."
"그런 놈들이랑은 왜 어울려 다닌 거냐. 불효 하려고 그랬어?"
"영감쟁이 속을 썩이려고 밤놀이를 하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뭐, 그건 옛날 일이에요. 별채에서 풀려난 다음부터는 목적이 따로 있었죠. 알아야 할 게 있었어요. 저승이랑은 관련이 없습니다만, 뭔가가 있었습니다. 결국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끝났지만요."
"환각이랑 관련된 거야?"
벤트레스의 환각들은 단순한 헛것이라 치부하기에는 의미심장했다. 별채에 갇힌 채로, 까마득한 옛날에 일어난 사건을 모두 본 놈이었다. 그 각각을 연결하느라 서고에 한참을 박혀 있어야 했다지만 어쨌건 들어볼 가치가 있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확실한 건 없습니다. 내가 직접 일드얀을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미래를 봤을 뿐이죠. 그래서 내가 일드얀을 미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가 궁금했는데, 쉭겐한테서는 나트람 이야기만 실컷 듣고 끝났습니다. 물론 은빛매의 대모님이 그 늙은이한테 관심이 많은 건 다들 아는 사실이고―"
순간 벤트레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맞아, 이건 아우님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줄곧 그 영감 밑에 있었잖아. 쉭겐도 자주 봤을 테고. 기억나는 거 있어?"
"저야 모르지요. 그래도 한 해에 두세 번씩은 옷이 피범벅이 돼서 나온 건 기억이 납니다. 언제는 평민 거주구를 지나는데 쉭겐이 절 골목으로 끌고 가더군요. 갑자기 늙은이 욕을 쏟아내기에 가만히 들어 줬는데, 갑자기 난처한 얼굴로 제 이름을 묻지 뭡니까. 댁 때문이었나 봅니다."
"나 때문이라니, 키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헷갈린 놈이 어리석은 거지. 잠깐만, 일드얀 대모님 이야기보다는 이게 더 재미있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나트람한테는 말해 줬고?"
"보낸 다음 그냥 잊었지요. 그랬다가는 쉭겐 목이 서재에 굴러다녔을 텐데요."
"그래도 아우님 목이 달아나는 건 아니잖아."
"자기 손자를 죽이면 일드얀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나도 궁금해지는걸. 가설을 검증하려면 실천이 필요한 법인데……."
대화를 듣다 보니 진지해졌던 기분이 한순간에 식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걸 둘씩이나 동료로 받았는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헤이딘이 돌아왔다. 간만에 머리가 멀쩡한 사람을 보니 반가웠다.
* * *
헤이딘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란드와르는 일단 안심했다. 나르시소 쪽 일은 잘 풀린 셈이었다. 구태여 황무지까지 수레를 몰고 갈 필요도 없이, 그냥 카스바에 가서 마타치치의 쪽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벤트레스의 의견은 조금 다른 듯했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내 몫이 아닌가 봅니다. 여기서 온종일 기도라도 해야겠군요."
"무슨 소리냐. 너도 어쨌든 같이 다녀야지. 안 데려간다고 한 적 없어."
"아우님한테도 이야기했지만, 나쁜 기억이 있습니다. 카스바에는 가지 않기로 서약했어요."
그렇게 말한 벤트레스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란드와르는 이 요정의 과거사를 존중했지만 함부로 동정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할 때에는 특히 그랬다.
"너 똑똑하잖아."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러면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을 해 봐라. 쪽문이 다 카스바에 연결된 건 아니잖아. 로야페타나 세카두랑 이어지는 것도 있다고."
학자들과 안면을 트면 쪽문을 통해 세카두는 물론이고 온갖 인간 도시를 오갈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카스바에 들르지 않더라도 나르시소에 발을 들이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벤트레스는 여전히 얼굴에서 연약한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그래도 난 지하서고에서 책만 보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아우님처럼 사람을 죽이진 못해요. 따라가 봤자 발목만 잡을 겁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책만 읽을 줄 아는 놈에게 부대장 자리를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테네브로즈가 곧바로 간언을 올렸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애당초 마법 실력은 폐허에서, 수정 거수를 잡을 때 확인을 마쳤던 것이다.
"너 놀고 싶어서 그러지."
란드와르의 지적에 벤트레스는 말없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죽일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