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도시와 교환 (2)
나르시소는 거대한 지하 동굴 속에 세워진 도시다. 과거에는 지상과 지하를 잇는 통로가 몇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폐쇄되고 없다. 동공(洞空)을 밝히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황금빛 각인이다.
벽면은 정교한 각인과 간이 계단과 쪽문으로 가득 차 있다. 요정들이 쪽문으로부터 나와 중앙 동공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복잡한 미로를 헤쳐 나오는 개미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동공에 모여 논의할 상대를 찾거나, 생필품을 나누거나, 슈문의 파편에게 기도를 올린 후, 거처로 돌아간다.
그러나 쪽문 너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동굴이 아니다. 각각의 문은 공간과 공간을 잇는 대신 슈문의 영토와 현계를 잇는다. 따라서 나르시소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빛으로 새겨진 주소록이자 허구적인 공간의 목록일 뿐이다.
하지만 나르시소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닌 도시이기도 하다. 요정들에게 주어진 영토는 다양한 장소에 출구를 두고 있다. 황무지 곳곳에. 대평야 농원 한복판에. 로야페타 옷가게의 뒷문에. 타일라프람의 공방에. 그리고 야스와다의 칼린카 사육장에.
이것이 실체 없는 도시의 실체를 지탱한다. 나르시소의 학자들은 필요한 것을 손에 쥐고 어떤 값도 치르지 않은 채 영토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고대의 지혜를 되찾기 위한 연구에 매진한다… 차원 생쥐는 이러한 행태를 묵인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과거를 살아가기 위해서만 현재를 약탈하기 때문이다.
* * *
동공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별이 뜨고 이상 현상이 계속되는 걸 보면 야스와다 놈들이 또 이곳을 들쑤실 게 분명하고들 했다. 요정들은 원형으로, 겹겹이 둘러앉은 채 의견을 나누었다.
클렘은 그 둘레를 빙빙 돌며 마타치치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거처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이상한 발명품이나 만지작거리고 있겠지. 이모를 떠올리자니 머리가 또 지끈거렸다. 그녀는 일단 회의 내용을 들어 보기로 했다. 잘만 하면 마타치치를 만나지 않고도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황무지에 출구를 둔 사람들이 제일 문제라고 봅니다. 한둘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이번 기회에 모두 도시 안쪽으로 옮겨요. 대평야나."
추적자들은 보통 황무지의 쪽문을 노렸다. 인간 도시들의 쪽문은 발견하기도, 침입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숨겨진 각인을 찾아낸답시고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녔다가는 단번에 경비대가 달려올 테니까. 하지만 나르시소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말이야 쉽죠, 빈 땅에 문만 붙이면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한테 들키지 않고 각인을 새기고 숨기기까지 해야 하는데. 게다가 도시에 있는 쪽문은 쉽게 철거된다고요. 이번에 저 사람 출구가 우르게슈 7지구 재개발로 밀린 거 몰라요?"
"그거야 장소 선정을 잘못 한 탓이지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어요. 이 사태의 본질은 댁들이 취약한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황무지에도 나름대로의 이점은 있죠. 인간 눈치를 안 보고 풀을 뜯거나 괴수를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저런 면을 다 따져 보면 인간 도시가 무조건 우월하다는 겁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요? 현실적인 여건을 따지자는 거예요. 각인을 완전히 새기는 데에 이틀은 걸리는데 그게 가능하겠냐는 거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단번에 문을 옮기는 게 될 일이라고 생각해요?"
"카스바도 있지 않습니까. 사제들도 없고 남 일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는 곳이죠."
"카스바요! 그 동네 요정들이 어떤지는 그쪽도 알 텐데요. 수는 적지만 아주 귀찮고 위험하죠. 인간도 위험하긴 마찬가지고요……."
서로 언성이 커지더니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 둘 다 그만! 지엽적인 것으로 다투지 말게. 야스와다 놈들은 부차적인 거야. 나는 차라리 최근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네. 세카두에서 화신 공표식이 있었어. 별은 세 개가 잇달아 떴고. 다음 차례는 타마기스거나 우리일 걸세."
"그거야 다들 알죠. 하지만 화신이 우리를 먼저 만나러 올까요? 우리를 죽이러 오진 않겠지만……."
클렘은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나섰다. 소녀가 특별 연사처럼 원의 중앙에 나타나자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격론이 단번에 잦아들더니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린데, 누구지?"
"마타치치의 조카잖아!"
질색하는 듯한 외침에 클렘은 미간을 좁혔다. 누군 그 사람 조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태어나고 보니까 이모가 마타치치였을 뿐인데. 그녀는 언짢은 기분을 잠시 밀어 두고는 준비해둔 말을 쏟아냈다.
"궁전에서 야스와다 요정을 만났어. 우리랑 할 얘기가 있대. 자기가 누군지 알려주면 다들 기억할 거라던데. 할아버지인데 눈도 없고 발도 없고 손도 없어. 자기 형한테 잘렸대. 평소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고. 혹시 아는 사람?"
본 적이 있다는 혼잣말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더니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본 적만 있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요정들은 따로 아는 게 있냐는 투로 서로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이윽고 누군가가 다시 외쳤다. 백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었다.
"마타치치!"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클렘은 벌컥 짜증을 냈다.
"이모는 또 왜! 이모가 그런 사람이라 나도 못 믿겠다는 거야?"
"그놈이야! 마타치치가 만났던 놈! 그놈 때문에 마타치치가 맛이 갔다고!"
뭐, 이모가 언제는 멀쩡했던 적이 있단 말이야? 클렘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노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요새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반세기쯤 전부터 야스와다 요정 하나가 궁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모두가 꺼리는 와중에 마타치치가 놈을 만나러 갔다고.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때부터 발명을 시작했다고.
"이모가 걔한테 세뇌당한 거야? 야스와다 마법 때문에?"
클렘의 반문에 노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이상한 걸 배운 게다. 그놈도 뭔가 따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어. 마타치치가 그때 설명하기를 백 년쯤 전에 버려진 통로를 보고 지혜에 눈을 떴다던데……."
"그래서 어떡할 거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일단 물어보고 대답해 주기로 했어."
다들 눈치만 보는 사이에 침묵이 길어졌다. 클렘은 짜증스레, 모여든 학자들을 돌아보다가 이상한 요정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아, 맞다. 저번에 우리 사람들 야스와다에 갔다가 잡혔잖아. 그때 키 작은 요정이 풀어줬다면서. 부제사장인지 뭔지 하는 거. 그 요정도 같이 있대. 궁전에서 만나본 건 아니고 이야기만 들었어."
재차 언쟁이 시작되었다. 화신이 뒤에 있다니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한다는 쪽과 믿기 어렵다는 쪽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때 풀어준 건 미끼일 뿐이고, 이런 만남은 나르시소 학자들을 한 번에 소탕하려는 수작인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결국엔 마타치치에게 사절 역할을 맡기자는 결론이 나왔다. 한 번 만난 사람이니까 말도 잘 통할 거라는 게 모두의 입장이었다. 이모의 쪽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클렘은 마음속으로 불평했다. 정말? 정말로 그 이유 때문에 그러는 거야?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라?
* * *
마타치치는 나르시소에서 첫 번째, 혹은 세 번째로 개방적인 사람이다(순위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출구를 카스바와 연결했고, 그쪽 요정들과 안면을 튼 다음, 갖가지 고물을 마구잡이로 긁어모았다. 물약 찌꺼기 한 병, 나사 하나조차도 쓸 데가 있다나 뭐라나. 눈앞의 광경이 그 결과물이었다.
클렘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주황색 머리카락은 하나로 땋아 묶었고,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다. 옷은 정해진 것 중에서 몇 개를 돌려 입는데 오늘은 세카두에서 십 년 전에 유행하던 걸 입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다른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방의 잡동사니를 보면 곧바로 판단을 바꾸게 된다.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지능 상승기나 은폐기처럼, 정체가 수상쩍고 위험해 보이는 발명품들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항상 막대기다. 팔 길이에, 손잡이가 두 개 달려 있고, 투명한 유리관과 줄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막대기.
"마타치치, 그건 또 뭐야?"
"새로 만든 거란다. 보렴, 아주 정교한 공간 기술을 썼어. 이걸 당기면 2번 공간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면서 저 부품을 건드리고, 다시 3번이 8번과 치환되고, 속도가 높아지면 분리되어 있던 무색 마력이 결합하면서… 빵!"
마타치치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각각 붙잡은 채 윗쪽을 향해 막대기 끄트머리를 쳐올렸다. 단추를 누르는 순간 굉음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클렘은 실금조차 나지 않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여기가 영토가 아니라 현계였으면 폭삭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이런 막대기는 왜 계속 만드는 걸까?
"저번에 만든 거랑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똑같은 걸 왜 계속 만드는 거야?"
"여럿 있으면 좋잖니."
"쓸 데가 없잖아."
"어릴 때 일이라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마법도 못 쓰는 애가 괴수를 세 마리나 잡았으면서. 그것도 머리만 맞춰서. 그런 거지. 기계보다 강력하고 마법보다 쉬운데다가 한 번 만들어두면 각인보다 재료가 덜 들어가는 걸."
"이젠 마법 쓸 수 있거든! 게다가 그때 잡은 것도 죄다 작은 거였잖아! 먹을 것도 없었다고!"
이건 반항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막대기를 써서, 귀찮고 힘들게 괴수를 잡은 다음, 애써 가죽을 벗기고 피를 빼는 것보다는… 뵘한테 가는 게 낫다. 뵘의 출구는 세카두 정육점에 있다. 보통은 잡뼈나 내버리는 짜투리만 가지고 오는 수준이지만 잘 뜯어보면 항상 먹을 게 있다.
하지만 마타치치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고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면 뭐가 중요한 거야?
"그게 대단한 거지. 그렇게 작은 걸 정확히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 보는 건 어떻니? 너도 알겠지만, 네가 마법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니까……."
클렘은 반박할 의지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채로 얼굴을 붉혔다. 어릴 땐 마타치치를 열심히 도왔고 막대기도 잘 다뤘지만 모두가 지난 일이었다. 놀림을 듣는 것도 지겨운데다가 이모가 마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라서,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이 돌아섰던 것이다.
이제 클렘은 다른 어른을 스승으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꼬마 대접을 받기엔 갈 길이 멀었다. 사람들은 클렘의 머리가 유독 느리다고들 했다. 난제를 파고들기엔 영리함이 부족하고 미궁을 설계하기에는 마법 실력이 시원찮다고. 마법을 늦게 배운 게 문제가 아니라, 천성적인 한계인 것 같다고.
그녀는 불쾌한 별명이 기분을 망치기 전에 가까스로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려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입을 넘어왔다.
"됐어! 나 그거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먹을거리가 떨어져서 그러니? 같이 카스바 다녀올까?"
"궁전에 야스와다 놈이 나왔어. 우리한테 할 말이 있대. 저기 밑에, 말 많은 어른들한테 물어봤더니 마타치치가 제일 잘 알 거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