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71화 (172/258)

171화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3)

꿈은 길었다. 로안은 알세스트의 삶을 뒤따라갔다. 그는 평생토록 죄책감에 괴로워했지만 진실을 밝히진 않았고, 존경받는 대마법사로서 생을 마감했다. 노르덴홀즈 장원의 기틀을 잡고, 대평야에 경작지를 일구고, 타일라프람에 첫 번째 대학을 세운 후에.

역사서 바깥의 시간을 톺아보는 동안, 로안은 자신의 성격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깨달았다. 알세스트는 현명한 만큼 겁이 많았고, 수줍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칠 때뿐이었다.

여든세 해의 후회가 열여덟 해의 꿈을 짓눌렀다. 알세스트는 눈을 떴다.

*  *  *

강현은 깨어난 로안에게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편집되고 축약된 판본으로. 아즈리온의 옛 동료가, 파울리스에게 큰 감사를 표하던 대마법사가 진실을 깨닫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로안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캐물을 일이 아니라고 여긴 듯했다.

"아무튼, 황무지로 갈 거야. 와그다스 요정들을 만나볼 일이 있거든. 그래서 네 의견을 물어 보려고 해."

네 의견… 이라는 어절에는 망설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질문의 내용이 마음에 걸린 것은 아니다. 서른넷밖에 안 된 놈이 여든이 넘어서 죽은 대마법사를 너, 라고 불러도 되나 싶을 뿐이다. 여기에 앉아 있는 건 기억을 주입당한 환생이라고 쳐도, 아무튼. 본질적으로는 영혼이 같으니까.

위계상으로는 자신이 위긴 하다. 신체적인 나이도 자신이 위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자아동일성은 영혼에 보존되는가, 아니면 기억의 유무에 그 관건이 있는가? 전생의 기억을 깨우쳤을 때 사회는 그를 누구로 간주해야만 하는가?

잘은 몰라도 이스트리아의 형이상학은, 특히 존재론은 한국의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럼 자신의 묵상은 큰 소용이 없는 셈이다… 존댓말 가지고 별 해괴한 고민을 다 하고 있었다. 이강현은 순간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영어로 말씀하시면 그것도 그대로 번역됩니다. 환술이랑 비슷하게, 의미 자체가 전달되는 방식이거든요.>

그냥 한국어로 반말 하고 살겠습니다.

이런 것으로 마음앓이를 하기에는 죄책감에 시달릴 일이 한참이나 더 많았다. 그래, 계약서. 셀리멘에게서 로안에게로 승계된 계약서. 지금부터 최소한 일 년쯤은 비밀에 부쳐져 있을 그 계약서. 이강현은 반사적으로 이가 갈리는 것을 느꼈고, 서둘러 표정을 바로잡았다.

"네가 지금까지 겪은 게 좀 있지 않냐. 정신적인 충격도 컸을 테고. 그러니까 당분간은 여기에 남아서 쉬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기억을 돌아보는 동안 줄곧 부끄러웠어요. 여든 해를 넘도록 살다가 죽고, 다시 태어난 뒤에도 성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많이 고생시켰고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안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 정적은 자학이나 반성처럼 느껴졌고, 강현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할 문장들이 턱 밑에서만 빙빙 돌았다.

로안이 비록 눈치가 없고 소심하기야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 아이에게는 거창한 사명감이나 중압감 따위를 짊어질 의무가 없으니까.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 세기의 천재일지라도 그렇다. 결국 이건 로안을 탓할 일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잘못이고 생쥐들의 잘못이었다…….

역시나 아즈리온의 화신이 떠들 내용은 아니었다.

무책임한 충동을 억누르려 애쓰는 동안 로안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력 갈래가 소용돌이치듯 손끝에 휘감기며 복잡한 형태의 얼음 화살촉을 만들어냈다. 끄트머리 부분이 매의 부리처럼 세공되어 있었다.

소년이 손가락을 튕기자 화살촉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히기 직전에 방향을 틀었고, 그 지점에서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러고는 각각의 파편이 다시 한 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충돌음이 귓전을 찌르고 들어오는 동시에 고운 얼음 입자가 바닥에 쌓였다. 가공할 수준의 정밀성과 제어 속도였다.

로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현을 응시했다.

"더 이상은 그런 식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는 지금껏 감사했다고 전해 주세요. 이제는 저 혼자서도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부담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능력이 닿는 일을 피해 가면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 황무지에 따라오겠다는 거지? 일단 시나리오 공략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강현은 이 사태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나열해 보았다.

좋은 소식: 로안은 이제 알세스트만큼 강력한 마법사다.

나쁜 소식: 활발하고 명랑한 소년은 사라졌다. 로안의 마음은 영원히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계속, 이번 생에 없었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기억들로 괴로워할 것이다…….

강현은 염세적인 사람이었지만, 그 스스로는 삶을 결코 달갑게 보지 않았지만 미성년자만큼은 예외여야 한다고 여겼다―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어린애들에게는 일종의 순진함이 필요했다. 앞날이 순전한 공백이라고, 그 미답의 영역을 채워나가는 주체가 자신이라고 믿을 권리가.

마음 같아서는 원래의 로안을 앉혀 놓고 이게 마음에 드냐고, 이런 결과가 달갑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면 씨발, 솔로틀이라도 다시 불러서 영혼을 고쳐 줄 수 있겠지. 메기도한테 했던 것처럼. 그놈도 삼촌이 갇힌 일로 괴로워하다가 기억을 지우게 되었다고 하니까.

"정말로 괜찮냐."

"이렇게 말하더라도 믿기 어려우시겠죠. 제가 못미더운 사람이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대답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셀리멘이 원했고 솔로틀이 불어넣은, 알세스트의 진심이었다…….

"그러면 마저 쉬고 있어라. 당분간은 고생할 테니까."

"괜찮습니다. 조금 어지러울 뿐이지 몸이 피곤한 건 아니에요. 예전과 같은 감각을 되찾으려면 많이 연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했던 대로의 미래를 맞이하는 이는 많지 않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손에 쥔 게 무엇이든 간에 그게 바로 자신의 욕망이었다고 믿어 버리는 순진함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대부분이 그렇다.

상상하지 않았던, 혹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도리어 기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시절을 부끄럽게 여기는 회사원들처럼. 그런 결말은 당사자의 선택 바깥에 있다. 부정과 반항이 필요한 시점에 부정과 반항은 이미 과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걸 돌이킬 수 있다면, 그 선택권은 누구에게 가야 하는 걸까? 이전의 로안에게? 지금의 로안에게? 어려운 문제였다. 자신과 차원 생쥐들이 파렴치한 개새끼인 것과는 별개로, 그냥 어려웠다. 단순히 눈물을 흘리고 끝내진 못할 일이라 그런지 헛웃음이 계속 가슴팍에 쌓였다.

*  *  *

모든 대화를 마친 후 강현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근원이 사라졌을지라도, 혹은 사라졌기 때문에 되돌리지 못하는 변화가 있다. 그 내역이 좋거나 나쁘거나는 논할 바가 아니다. 영영 복원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잊히거나 왜곡되거나 다른 변화 아래 파묻힐 뿐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는 광인이라 불리기도 하고 정상으로서의 직함을 되찾기도 한다.

정상성이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순수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무엇이다. 처음부터 그랬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듯 믿어지는 무엇. 너무나도 견고한 믿음이기 때문에 의심하는 순간 그 당연함을 잃어버리는 무엇. 따라서 정상에 대한 맹목은 부당하다.

그러나 누가 결정권자가 되어야만 하느냐, 하는 질문은 필요할 것이다. 기억과 영혼이 120mv의 막전위가 아니라 덩어리진 녹색 불꽃인 세계에서는. 강현은 벤트레스와 테네브로즈와 헤이딘과 메기도의 정신이 얹힌 좌표계를 눈앞에 그렸고, 자문했다. 로안의 이름은 그중 어디에 제일 가까이 놓이게 될까? 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내 위치는?

자신은 구원자거나 방관자거나 가해자였다. 서로 합일할 수 없을 듯한 낱말 셋이 원래부터 하나였던 듯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난해한 삼위일체의 교리처럼. 민혁이 말하길 먼 옛날 로마에서는 성부와 성자가 하나인지 별개인지를 두고 다투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세계의 진리를 논하게끔 했다. 아타나시우스파의 주교들이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우스는 파문되었다. 이단으로 단죄된 사제들은 더 있었다.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 아폴리나리스, 그리고 마르키온.

어떤 진리는 한때 토의의 대상이었다. 지배자가 얻어낸 해석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승리.

투명한 대기는 그런 승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호흡한 것은 곧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고 다시 볼로디아의 말.

이방인 무리는 요정 신을 몰아내고 이스트리아를 바꾸어 놓았다. 이시 타브마저 죽으면 그들의 질서는 공고한 진리가 될 것이다. 만일 깨어난 늑대가 이방인들을 내쫓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상태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스트리아가 거대한 놀이터였던 시대는 끝났다. 지구의 문명이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던 것처럼. 생쥐들은 늑대의 꿈을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류는 사방에서 휘도는 숫자를 따라 전진할 것이며 그 뒤편에는 수많은 이름이 버려질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옳음과 그름을 나누는 것은 효율의 본성이므로.

로야페타의 노동자들. 사업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학자들. 운 나쁘게 변경에서 태어난 사람들. 빈털터리가 되어 경기장에서 쫓겨난 사업가들.

그들의 고통에도, 혹은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더 좋은 기술이 살아남고 부유함의 총합은 증가한다. 그렇게 진보를 거듭하다 보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두의 완전무결한 평안? 혹은 반대로,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요정과 갖가지 패배자들?

지구의 앞날을 예단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현은 이스트리아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 종착지에 있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일지라도, 목표로 향하는 동안 누군가는 처참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이곳이 반신과 괴수와 마법사들이 노니는 땅일지라도 그렇다.

더욱 온당한 대안이 있었을 것이다. 요정의 성품이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형상이라면, 이 세계가 철없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면, 그저 놀이터일 뿐이라면. 잔혹하고 끔찍하면서도 너그러운 아이들이 그곳에 먼저 있었다면.

제국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존속했다. 모든 요정은 마법사였지만 반역을 일으키거나 삿된 마음을 품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평민을 죽이고 다니는 일도, 새로운 도시가 세워지는 일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신들 사이에 우열이 가려지고 황제가 왕홀을 쥔 후로 그들은 잔인하면서도 평화로운 삶을 즐겼다. 골목대장을 정한 아이들이 싸우기를 멈추고 한 마음으로 어울리는 것처럼.

대안을 발견할 기회가 있었다. 기회를 놓쳤다. 이방인 무리가 늑대의 이름을 지웠을 때, 그들이 신을 죽이고 요정을 대륙의 남단으로 몰아냈을 때, 늑대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방인을 불러냈을 때, 황제가 늑대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인류를 종으로 삼았을 때.

사람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약 이방인일지라도, 혹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파국은 원죄와 함께 생겨났다. 외관도 힘도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하는 세계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꿈을 한 차례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의 기억을 한순간에 씻는 게 아니라면.

인류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싶더니 누구를 위한 공평인가, 공평이란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와 닿았다. 고통 위에 쌓인 세계에서, 제국이 존속한 만큼 긴 시간동안 요정을 짓밟는 것? 그래서 세 종족이 동등한 크기의 아픔을 겪게끔 하는 것?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하지만 화해가 가능할까?

분명한 건 하나뿐이다. 지금의 꿈이 잊힌 뒤에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이스트리아가 있게 되리란 점이다. 그 땅에는 생쥐의 자리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질서만이 있을 것이다.

단절이 누구에게 좋은 일인지는 모른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거나 누구에게도 좋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전기전자공학부를 나온 한국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계약서 바깥의 신학을 논할 자격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무엇일까? 구원자? 방관자? 가해자? 여전히 그 셋은 분리되지 않았다. 끝끝내 해명하지 못할 암흑이 강현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외면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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