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2)
나는 빛 속에 있다. 무수한 반짝임이 쇄도하며 혈관을 찢고 목구멍을 기어오른다. 그 덩어리는 잠깐 빛이었다가, 소리가 되더니, 순전한 색으로 변한다. 초록색이 나를 후려갈긴다―돌아와!
"약은 안 쓰고 있어. 그랬다가는 피가 오염되거든."
"상태가 너무 나쁜데."
"확인해 봐."
기억은 의식만큼이나 파편적이다. 여자가 얇은 면사포처럼 그늘을 두르고 있다. 거대한 반사경인 듯 빛나는 별불꽃 장원의 호수. 여름에는 숨이 쉽게 가빠진다. 열기가 공기를 밀어내는 까닭일 것이다. 얕은 호흡에 불쾌하리만치 강렬한 냄새가 섞여 난다. 향수? 금빛 머리카락이 황금을 빚어 만든 조각상 같더니 순식간에 찬란함을 잃는다.
나는 빛을 게워낸다. 남자가 낄낄 웃는다.
"이놈 말이야, 금발만 보면 눈에 빛이 돌아와. 취향이었나 봐."
"애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피를 대체 얼마나 뽑고 있는 거야? 식사를 하긴 해?"
"헛, 요정한테 너무 다정하시군. 대우는 최고급으로 해 주고 있어.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씻겨 주기까지 하는데 미치광이한테는 차고 넘치지. 바늘도 제일 가느다란 거로 쓰는 중이야. 상처를 크게 내면 날뛰기 시작하거든."
나를 내려다보는 것은 한 무리의 유령이다. 야스와다의 신관들이 수정 융기를 둘러싼다. 아무 장식이 없는 제례용 단검이 그 뒤편에,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꽂혀 있다. 칼날 부분이 비스듬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다른 요정이 모두 나가더니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여자만이 남는다. 여자는 융기 주위를 한동안 맴돌다가 단검을 찾아낸다.
"하기야 걸어 다니는 마력 지맥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이쪽 연금술사들이 죄다 요정 피를 한 방울이라도 얻어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그나저나 손님까지 따로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장사를 너무 시끄럽게 하는 거 아니야?"
"소 한 마리로 우유도 짜내고 밭도 가는 셈이지. 돈 많고 취향 독특한 분들은 널려 있으니까. 대기자가 열 명이 넘어. 나흘에 한 명씩만 받고 있거든."
"흐음."
"관심이라도 있으신가? 보시다시피 숙녀분을 만족시킬 상태는 아니라서, 안타깝게 됐군."
그들의 얼굴은 계속 변해가고 배경 또한 그렇다. 어둠달 장원의 작은 숲. 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길. 발걸음을 따르는 어린 사촌동생. 생각이 거기에 닿는 순간 혈족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다. 사촌들, 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다시… 다시 빛이 습격해 왔다.
"안타까워할 부분을 잘못 짚었어. 카스바의 유일한 규칙을 읊어 주지. 첫 번째, 요정과 상종하지 말 것. 상품일지라도. 만약 상종해야 한다면 최대한 조용히 할 것."
"도대체 그걸 누가 지켜?"
"우리가."
환영은 형태를 바꾸어 황폐한 도시를 비춘다. 땅은 곳곳이 갈라져 있다. 뒤틀린 도로를 따라 집들이 무너진다. 세 명의 요정이 거대한 틈을 향해 간다. 돌아온 것은 둘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가면을 씌운다. 가면 쓴 이는 순전한 빛 덩어리로 변한다.
그것이 절규한다―나를 찾아 다오!
나는 비명을 내지르지만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빛이 의식을 집어삼킨다. 아주 긴 시간이, 낮도 밤도 없는 시간이 흐른다. 몸이 뒤로 넘어가나 싶더니 고개가 홱 돌아간다. 천장의 조명이 불줄기가 되어 허공에 긴 획을 긋는다. 빛이 달아난다.
고통스러우리만치 쓴 맛이 입가를 가득 메운다. 유예되었던 소리가 한순간에 폭발한다.
"꼬마, 카스바에 온 걸 환영해. 겪었으니 알겠지만 끔찍하게 좋은 곳이지. 인간에게 팔리는 요정과 인간을 팔아넘기는 요정들이 있고, 돈과 배짱만 충분하다면 모든 게 가능해. 요정들과 상종하는 것 말고는, 정말로, 모든 게."
여자가 나를 내려다본다. 한쪽 손으로는 내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병을 쥔 채다. 쓰러져 누운 인간들이 시야 한 귀퉁이에 몸을 걸치고 있다. 나는 짙은 피 냄새 속에서 계속, 병이 텅 빌 때까지 액체를 들이킨다.
여자가 말한다.
"선택지가 있어. 하나는 여기에서 죽는 거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함께하는 거지. 후자를 고른다면 너도 나처럼 카스바에 숨어든 요정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런 질문을 하고 다니게 될 거야."
"왜?"
나는 어떤 문장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묻는다.
"우리는 카스바를 지켜. 요정들이 이곳에서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막는 게 주된 업무지. 다른 업무로는 어린 아이들을 야스와다에 팔아넘기는 것이나 신관들에게 인간 도시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어주는 것들이 있어. 최종적인 목표는 그 둘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으면서 인간 행세를 하는 거고. 어디에서 왔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삶도 괜찮아. 나름대로 즐길 구석이 있다고."
여전히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겨우겨우 소리를 더듬어간다.
"너는… 너희는 3교구 소속이야? 나를 구하러 온 거야?"
"그럴 리가. 우린 야스와다와는 척을 지고 있어. 높으신 분들과는 특히 사이가 안 좋지. 물론 필요하다면 등 뒤로 손을 잡을 때도 있지만 친한 건 아니야."
"나는 두 번째 가문의 사람이야. 돌아가야 해."
"그렇다면 죽여야겠군."
"돌아가야 해!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어! 나를 기다리는 반려가 있어!"
여자의 시선이 나를 훑는다. 빛으로 흐려진 표정에는 슬픔과 조소가 뒤섞여 있다.
"그 몸으로? 그 꼴로?"
"나는 돌아가야 해!"
울부짖음이 맹수처럼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이, 조각으로 남은 어절이 텅 빈 자리에 모여든다. 기억이 한데 뒤엉키는 가운데 눈부신 금색 머리카락만이 잃어버린 좋은 시절처럼 멀찍이 물러나 있다. 누구지?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던진다.
"맹세해."
"맹세?"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네 혈족이 앙갚음을 대신하게끔 하지도 않겠다고. 그러면 차원문에 던져 줄게."
단검으로 엄지에 상처를 낸 다음 미간을 짚는다. 피로 이루어진 획이 남도록 콧등을 따라 아래로 긋는다. 의식을 마치자 여자의 손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오랜만에 신입을 받으려나 했는데 아쉽군. 바로 가자."
걸음을 내딛자마자 외침이 또 한 차례 폭발한다. 돌아와! 여기로 돌아와! 그 목소리는 온갖 곳으로부터 온다. 수정으로 뒤덮인 옛 도시로부터, 아홉 명문가의 땅으로부터, 숫자를 붙일 수도 없을 만큼 오래된 과거로부터.
아득한 옛날은 다시 미래가 된다. 나는 폐허의 복판에 있다. 모든 시간이 거기에 모인다. 지성소의 언약궤가 보인다. 금발의 인간 쌍둥이가 보인다. 두 명의 요정 검사가 보인다. 붉은 머리의 존재가 보인다. 늑대인간 왕이 보인다. 개의 머리를 한 남자와 쓰러져 누운 소년이 보인다. 그리고…….
"같은 처지로서 충고 하나 해 주지. 품에 단검을 가지고 다녀. 미칠 지경이 되면 어디든 피를 내라고. 고통은 환각을 떨쳐내는 데에 도움이 되거든."
팔뚝에서 피가 흐른다. 나는 현재로 되돌아왔다.
* * *
"맙소사."
눈을 뜬 벤트레스는 팔만을 움직여 협탁을 더듬었다. 손에 위스키 병이 잡히자마자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두근거리던 심장이 겨우 제 속도를 되찾았다. 식은땀이 등줄기에 흥건했다.
반쯤 닫힌 뚜껑을 비틀어 열면서,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카스바를 경유한다는 말에 못 가겠다는 대답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제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를 전하나 싶더니 그게 끝이었다. 화신 나으리께서는 사정을 묻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어본다면 대답이야 해 줄 수는 있겠지만.
악몽이 시작된 것은 야스와다에 돌아오고서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부터였다. 정신이 뚜렷해지면서,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함께 형체를 갖췄던 것이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이것만큼은 그대로일 모양이었다.
"아니, 갈 땐 가더라도 이것도 같이 가져갔어야지. 상도덕이 없는 놈들이구만 그래."
허탈한 듯 중얼거리고는 위스키를 한 모금 넘기자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는 열기 속에 몸을 뉘인 채 생각을 가다듬었다.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악몽에 몸부림치며 깨어났다가 술을 들이키는 나날이 반복될 것이다. 지금까지 줄곧 그랬던 것처럼.
그 사실에 유별난 비애는 느끼지 않기로 했다. 벤트레스에게 카스바 이후의 삶은 부록 같은 것이었다. 야스와다로 돌아온 것. 질 낮은 무리와 어울려 다니다가 별채에 갇힌 것. 풀려난 뒤 1교구로 적을 옮긴 것. 환영과 오래된 역사서들을 짜 맞추며 시간을 보낸 것. 그래서 폐허로 다시 돌아온 것.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모든 성취와 고통과 상실이.
죽을 때를 놓친 바람에 살게 되었고, 살아 있으므로 주어진 과제들을 해낼 뿐이었다. 폐허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목표는 이제 동족을 등지고 더욱 큰 뜻을 따라야 한다는 명령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벤트레스는 환각 속에서 보던 것들을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잘려나간 단검을 움켜쥐는 여자와, 영원 속에 갇힌 도시와, 쓰러지는 소년과, 보랏빛 소용돌이를 밟고 선 남자.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거대한 덩어리. 그리고 자신의 외침…
"일드얀을 죽여! 돌아가면 그 작자부터 죽이란 말이야!"
몇몇은 오래전에 끝났고 다른 몇몇은 바로 며칠 전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남은 장면은 한없이 많았다. 이미 지나갔거나 앞으로 지나갈 무엇. 그러면서도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만 발견되는 무엇.
환영을 헤집는 동안 벤트레스는 부스러기 같은 시간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오지 않은 미래의 한 조각일 때도 있었고 아득한 옛날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의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순간적인 소음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혼란스러운 상을 일일이 분리하고 그 명세를 순서에 맞추어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리어 거기에 만족하고 책장을 닫는 것은 사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된다. 구슬이 끈으로 엮여 목걸이가 되기 전까지는 어떤 구슬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므로.
그는 아주 가느다랗고 견고한 실이 구슬들의 중심을 관통하며 모든 순간을 하나로 묶는 장면을 상상했고, 저승에서부터 시작되어 저승에서 끝날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 자신에게는 끈이 있었다.
"자, 정인도 대자(代子)도 저승에서 쉬고 있으니 잘 된 일이라 치고……."
술병을 마저 비우자 기분 좋은 나른함이 복잡한 생각을 몰아냈다. 그는 눈을 감았고, 벽을 넘어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로안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흐려지는 의식 저편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두런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