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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69화 (170/258)

169화 The Best Minds of My Generation (1)

테네브로즈는 야스와다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읊었고, 란드와르는 과거사를 들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충격에 사로잡혔다. 마치 끓는 기름솥에서 사출당해 냉동고에 던져진 기분이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모두 달아나더니 가히 세속적인 물음 하나가 남았다.

"그런데 너희 둘 다 이래도 돼?"

"뭐가 이렇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벤트레스가 귀부인처럼 우아한 자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아니면 정신이 나가서 이러는 거야?

"아니, 일가친척이 죽었는데 그래도 되냐고."

말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반문이 따라붙었다. 안 될 이유가 뭐지? 란드와르는 두 요정이 늙은 친족의 죽음에 진심 어린 조의를 표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그래야 할 의무도 없어 보였다. 최소한 벤트레스는 그랬다.

그는 세계의 본상과 규범에 대한 철학적 묵상을 집어치우고 한국인의 뇌를 일깨웠다. 서른네 살의 한국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막장 드라마는 기껏해야 재벌집 서민 며느리가 사실 다른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었다더라,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벤트레스에게 있는 것은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 의처증 도진 아버지와 불륜을 하는 삼촌이었다. 이 장대한 가정폭력 이야기는 가문 전체가 불타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하고 배드엔딩이라 부를 수도 없는 찝찝함만을 남긴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새삼 끔찍했다.

란드와르는 재빨리 정정했다.

"아니다, 그냥 그러고 살아라. 내가 미안하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햇살만큼이나 밝고 가벼운 것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벤트레스는 술이 어디 있느냐 물었고 란드와르는 들어가면 찾아 주겠다고 답했다. 테네브로즈가 기다렸다는 양 술을 끊으라고, 그러다가 사고를 친 게 몇 번이냐고 쏘아붙였다.

"아니, 아우님이 오해를 하는군. 나는 잔뜩 취해서 사고를 친 적이 없어.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것이지. 그렇게 따지자면 내가 제정신으로 벌인 사고가 몇 개인가?"

그 말을 시작으로 얼굴이 똑같은 것들이 미친 소리를 늘어놓았다. 비극의 희생자를 이런 식으로 칭하는 게 다분히 비도덕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달리 설명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둘도 그런 취급에 별 유감이 없어 보였다. 애당초 당사자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에 자부심까지 느끼는 중이다.

그러면 된 건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강현의 판단이었다. 최소한 폐허에서 솔로틀과 삼자대면을 했을 때처럼, 멀쩡해지는 게 옳은 것이라 강변할 마음은 없었다. 애당초 그런 일을 겪고서도 이전과 같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뭐라고나 할까, 끓는 물에 던진 고기가 생고기인 상태로 남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열을 가하면 고기가 익듯 정신도 생의 질곡을 건너온 뒤에는 어떤 식으로든 바뀌기 마련이다. 그건 비극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적응의 일환일 것이다. 벤트레스의 자아도취도, 테네브로즈의 무감각도, 모든 종류의 망각까지도.

그렇다면 거기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야말로 무례가 될 터였다. 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테네브로즈도 동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못 박아 놓았으니까,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까, 지금까지 대했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적당히 놀다가 들어와라. 난 연초 태우러 간다."

"술 찾아 주는 거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으리가 보기에는 제가 이거랑 노는 것 같으십니까?"

테네브로즈가 질색했다. 란드와르는 툭 대꾸하고는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너도 들어오든가. 알아서 해."

품에 손을 밀어 넣자 시가 목함이 잡혔다. 감촉이 아직은 낯설었다. 몇 달간 쓰면서 손길이 든 건 폐허에서 박살이 났다. 란드와르는 문 앞에 서서 한 대를 빼어 물었다. 쓴 맛이 입 가득 퍼지면서 정신도 함께 명료해졌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두고, 이제 뭘 해야 하지?

일단은 헤이딘이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황무지의 학자들과 접선할 방법을 찾고 있다. 대화가 성립하는 즉시 황무지로 떠날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할 일이 많다. 일단 로안이 정신을 차리면 상황을 대강이나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전생과 현생에 대한 것도. 벨레다에게는 세카두로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무엇보다도 공표식이 남아 있었다. 몰려든 인간들 앞에서 신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열렬히 아즈리온을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당사자는 천계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모두 협잡꾼에 낙오자들이지만요… 벌써부터 두통이 일었다.

그래도 알톤의 반응을 상상했더니 기분이 나아지는 효과는 있었다. 란드와르는 시가를 마저 태운 다음 저택으로 들어갔다.

*  *  *

란드와르가 충분히 멀리 떨어지자마자 벤트레스는 저승의 일을 캐어묻기 시작했다. 얼굴을 찌푸린 채로 이방인과 늑대와 청지기가 얽힌 과거를 이야기해주던 테네브로즈는 갑자기 설명을 끊고는 반문했다.

"그나저나 이걸 이제야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폐허에서는 아무 말도 않았지 않습니까."

"그거야 평판을 관리하느라 입을 닫고 있었던 것이지. 화신 되시는 분은 내가 세기의 천재고 뭐든 다 추리한 줄로 알고 계시거든. 그렇게 잘나신 현자께서 모르는 걸 시시콜콜 물어서야 멋이 안 살지 않나."

"그 화신님이 형님더러 병신이라던데요."

"원래 우자는 현자의 깊은 마음을 이해치 못하는 법이지."

테네브로즈는 서로가 천사에게 감청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네가 란드와르에게 이 말을 전하더라도 자신의 탓은 아닌 것이다. 어차피 벤트레스부터가 망치에 다진 고기가 되어도 정신을 못 차릴 사람이었다.

"형님은 정말 병신입니다."

"어디 아우님만 할까."

그러고는 대화의 주제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집안 사정과 엘드리그의 거처가 화두에 오르더니 벤트레스가 밝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까 좋은데. 폐허에서는 정체를 숨긴답시고 계속 말을 돌렸잖아. 결국엔 들킬 걸 두고. 야스와다 일도 그래. 나 때문에 가문이 망했다고만 하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제대로 설명을 해야지."

"알아서 추측하면 될 일을 캐묻는 것도 악취미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두 계산대로 됐어요. 확언이 필요한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미 한 번 벙어리가 돼 놓고서 또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벙어리가 안 될 테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지. 아우님은 당연한 걸 묻는 습관이 있군 그래."

테네브로즈는 사촌의 초점 없는 시선을 맞받아쳤다. 벤트레스를 죽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답한 게 벌써부터 후회스러웠다. 결정을 번복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저승에 던져 넣은 다음 영영 잊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말이 신도고 맹약이지 꼼짝없이 노예가 됐는데 주인님이 하시자는 대로 따라야지. 요정의 긍지를 지키겠답시고 인간들에게 돌진했다가는… 자폭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반신불수가 되겠군."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한 번 시도해 보시지요."

벤트레스는 높다란 웃음을 터뜨리고는 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바람이라기에는 묘한 기운이 모이나 싶더니 잎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머리에 묻은 잎사귀를 털어낸 테네브로즈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사촌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을 괴롭히는 건 다행히도 맹약에 걸리지 않는 모양이야. 인간을 끌어안고 자폭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우님을 상대로는 될 것 같은데, 그건 어때?"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되살아나면 그만이니까."

테네브로즈는 투덜대고서는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야스와다가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륙 남쪽 끄트머리에만 갇혀 있을 수도 있고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미래가 어떤 모양이든 간에 형님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테고요. 그러면 인간들의 도시에서 뭘 하겠느냔 겁니다."

"글쎄, 벌써부터 고민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아우님이야 아예 저승 사람이 되었다지만 나 같은 필멸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부터 따져야 한단 말이야. 자, 생각해 보자. 황무지에 간다고 했지? 와그다스 놈들에게 몰매 맞을 걱정이나 해야겠군. 그쪽도 우리네를 싫어하긴 피차일반이니까."

"만약 몰매를 맞는다면 형님이 혀를 잘못 놀려서일 겁니다. 가면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어요. 우리네 말로 떠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아, 그거야 내가 아우님보다 더 잘 알지. 자중할 생각이야."

슈문이 베푸는 은혜 중에는 의미의 축복도 있었다. 어느 시대의 문헌을 보더라도 그 뜻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주는 것이었다. 황무지에 고립된 채 천 년을 지냈는데도 서로 소통이 가능한 것 역시 이 덕분이었다…….

"그나저나 거기까지는 어떻게 간다는 거야? 우리네 차원문은 이제 또 암호가 변했을 테니―늪지대를 건너야 하나?"

"카스바 차원문을 탈 겁니다. 그쪽에 발이 넓은 꼬마가 있어요."

순간 벤트레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난 여기 남아야겠는데. 카스바엔 다시 가지 않기로 서약했거든."

*  *  *

란드와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고민에 잠기려면 탁자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던 와중 테네브로즈가 불쑥 들어왔다.

"벤트레스를 데리고 가는 것 말입니다, 이야기를 해 봤습니다."

"오냐."

"카스바는 가기 싫다는데요."

뭐, 카스바는 싫다고? 하는 짓만 봐서는 거기에서 십 년쯤 살다가 왔다고 해도 믿을 놈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낯설었다. 란드와르는 팔꿈치로 침대 바닥을 짚고서는 윗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 진술이었다.

"그럼 폐허에는 지금까지 어떻게 온 거야. 카스바 차원문 말고 다른 거 탔어?"

"저희가 카스바에 들르는 이유는 출입국 수속 때문인데요. 출입국 수속 없이 인간 도시들에 들어갈 방법이 필요하니까요."

"무슨 소리냐."

"폐허에 갈 때에는 굳이 거길 경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차원문이야 재료와 시간만 있고 기술자만 있으면 맨땅에도 세울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폐허 인근에는 오가는 사람도 없으니 들킬 걱정도 없지 않겠습니까. 보안 문제야 차원문 자체에 암호를 걸어 두면 해결이 되고요."

란드와르는 새로 알게 된 정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나우파나 바로 옆에 야스와다랑 이어지는 차원문이 있다는 거지?"

"나우파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외딴 곳이라면 어디에든 만들어 뒀지요. 정보사 분들이 부지런하게도 돌아다니면서 깨부순 덕분에 멀쩡한 건 많지 않습니다만, 그런 만큼 계속 세우고는 있습니다. 때때로 카스바를 경유하는 이유는 출입국 수속을 밟지 않고 인간 도시들에 들어갈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고요. 인간 도시에 그런 걸 만들면 정보사 놈들이 바로 달려오거든요."

"정보사 분, 이 왜 갑자기 정보사 놈, 이 되는 거냐."

"제 진심입니다."

"진심을 좀 감추고 살아라."

핀잔을 준 란드와르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 보았다. 후반부에, 추적자들이 온갖 곳에서 나타나는 비결이 궁금했는데 이게 원인이었던 듯했다. 황무지나 늪지대라면 정보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이 어디에든 차원문을 설치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에 추론이 닿은 순간 두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첫째는 게임에 그런 차원문이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이런 젠장, 암호가 걸려 있다 쳐도 구현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둘째는…….

"그걸 왜 말을 안 했어?"

"이걸 알았으면 뭔가 달라졌으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닌데."

"그러면 아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옳은 말이었지만 뭔가가 거슬렸다. 란드와르는 목 끝까지 치민 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괜히 과거사를 듣는 바람에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벤트레스가 직접 싫다고 그랬어? 이유가 뭐야?"

"다시 가지 않기로 서약했다는 말밖에는 못 들었습니다. 뭔가 더 물어보려고 했더니 도망치던데요."

란드와르는 벤트레스가 비밀로 부친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폐허 조사단원으로 갔다가 실종되었는데, 몇 해 후에 뜬금없이 교구 차원문에 나타났다고 했다. 꼴이 말도 아니었는데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고. 그래서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그 반대편의 차원문이 카스바에 있었으리라는 추론은 쉬웠다. 정신 나간 요정이 거기에서 좋은 일을 겪었을 리가 없다는 것까지도. 악몽의 내역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지만 그 출구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돌아왔을까? 서약을 한 상대는 또 누구고?

"카스바에도 요정들이 있긴 있잖아. 야스와다랑은 사이가 어떻냐."

"마냥 우호적이진 않습니다. 대부분은 사고를 치고 도망친 놈들이고, 당연히 야스와다보다는 자기네 근거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니까요. 하지만 인간 노예를 들일 필요가 있거나 하면 그쪽을 찾게 됩니다. 특정한 종류의 소식도 그쪽이 제일 빠르고요. 거래 상대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벤트레스가 차원문으로 넘어온 거 말이다, 걔네들이 보내준 것 같은데. 아니야?"

"아마 그렇겠지요."

테네브로즈는 선뜻 수긍했다.

"그게 왜 아마, 인지가 궁금하거든. 나도 한 생각을 너희 집안 어르신들이 못 했을 리는 없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 뭘 했는지 다 알 수 있었지 않냐. 그런데 왜 지금까지는 아무도 몰랐던 거야."

"그럴 마음을 먹어야 말이지요. 기운을 되찾자마자 사촌동생을 연못에 던져 놓고, 그 다음에는 소문난 망나니가 되어 버렸는데 노친네들로서도 뒷사정을 궁금해 할 여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별채에 가두고는 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연을 알게 되었다 쳐도, 인간들에게 앙갚음을 하러 갈 수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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