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But Woe to that Man (2)
비명을 내지른 사촌형제는 소년의 품에서 칼린카를 빼앗아 들었다. 살덩어리가 물이 많은 반죽처럼 맥없이 흘렀다. 그는 칼린카를 제대로 안으려 애쓰다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인이 주인마님을 불렀다. 이야기가 길어졌고 소년의 부모도 왔다. 그들은 사과의 뜻을 전한 뒤 소년을 본가로 데려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물었다. 당혹도 공포도 없이, 그저 걱정스럽게. 둘에게 첫째 아들은 기한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회수될 채권, 당장 차환 요구가 들어오더라도 놀랍지 않을 채권이었다.
"잘못이라는 걸 알아요."
"우린 지금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너를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널 걱정하고 있을 뿐이란다."
"무슨 걱정을 하셨어요?"
그들은 해묵은 불안을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고 소년은 침묵을 지켰다. 긴 대화 끝에 남은 것은 부모가 칼린카를 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대답뿐이었다. 때때로 사람은 진실을 내버려두고 텅 빈 변명을 선택한다. 그 안에 자신의 상상을, 해롭지 않을 만큼만 불온한 상상을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은 질투심 때문에 칼린카를 죽인 아이가 되었다. 그는 모두가 그런 것처럼 사촌형제에게 사과했고, 용서받았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일상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요람에 누운 아기가 부모의 반응을 보며 웃음과 눈물의 용도를 배워 나가듯 주위의 태도를 시험했다. 그러면서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맞추어 나갔다. 분노는 쉽게 배웠지만 기쁨은 어려웠다… 하인들은 그를 진실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격노가 아니라 유쾌함이라 이르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년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불의의 사고였는지 고의였는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방식이었다. 부모는 사려 깊이 타이르기도 했고 추궁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일은 계속되었다.
사촌형제도 대화를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생은 정원에 나오는 대신 서고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모두와 거리가 멀어진 다음부터 소년은 다른 말상대를 구했다. 그는 신관과 사교계의 명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눈에 담았고, 독대를 부탁하다가, 대화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묻곤 했다.
가문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혈족이 무엇이기에 혈족을 우선으로 사랑하는가? 반려는 다른 가문의 핏줄인데도 혈족보다 더욱 소중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군가는 그걸 이상한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누군가는 성심껏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두 부류가 하나같이 공유하는 감각은 있었다. 소년이 각각의 반응과 대답을 모두 외우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순간 질문하기를 멈춘 소년은 또래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우연히 다치는 일도, 위험한 마법을 시도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장으로 빚어내기에는 흐릿한 의심이 소년을 따라다녔다.
어딘가 잘못되었음이 명백할지라도 그 명세를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소년은 난폭했지만 이유 없는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는 없었고, 가끔은 무한한 너그러움마저 보여주었다.
불길함으로만 이루어진 의혹은 세파와 더불어 과거로 물러났다. 소년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신관 서약을 마쳤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추적자가 되었다. 가주가 된 다음에는 별불꽃을 의회의 한 자리에 올렸으며 3교구 제사장 직분을 얻어냈다.
이제 노인의 마음에서 일그러진 부분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야심에 찬 신관들은 자신의 삶이 그처럼 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가 동생과 자식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해 흉흉한 소문이 떠돌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금방 잊어버렸다. 그것은 가문의 일이었고 외부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 * *
쉭겐은 은빛매 장원으로 돌아왔고, 옷을 대강 갈아입고 지혈을 마친 후 일드얀을 찾았다. 그녀는 보고를 전해 듣고서도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트람이 위협을 가하는 건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나트람을 안다. 우리를 대적하려거든 놈은 고발장을 쓰지 않을 거야. 그럴 생각이었더라면 이미 네 목이 서재에 구르고 있었겠지. 만약 마음이 바뀌더라도 스스로 이곳으로 걸어와 피를 볼 놈이다."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이미 저 또한 수없이 겪은 일이거니와 죽일 기회를 남에게 넘길 작자는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중대한 사안입니다. 광인에게 맡기기에는 위험이 큰 역할이지요."
일드얀은 나트람의 과거를 기억하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별불꽃의 가주가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를 지켜보았다.
그 자신은 유명세를 즐기지 않을지라도 나트람은 언제나 이목을 끌었다. 기묘한 행동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소년의 재능은 요정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추적자와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둔 데다가 몇 가지 주문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헤이딘의 부정을 발견하기 전에도 일드얀은 그를 수집품으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것이 길들일 수 있는 맹수인지를 확인해야만 했을 뿐이다. 그녀는 조련사들이 거대한 칼린카를 옆에 두듯 나트람을 앞세웠고, 그것은 다시 은빛매의 이름을 드높여 주었다.
"물론 대모님께서 그 자의 성품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은 압니다. 맹수를 조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보람찬 일이지요. 하지만 짐승이 우리에서 벗어난다면……."
"그만, 그만! 결국엔 우리의 뜻대로 될 것이다. 네가 그리 염려하니 내가 따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마. 다룰 방법을 알고 있어."
"수고롭게 발걸음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실로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다. 나트람만한 재목도 달리 없지. 체면을 세우느라 이런 기회를 망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거의 두 세기 전에 일드얀은 조사단장으로서 나우파나에 발을 내디뎠다. 나머지 조사단원은 모두 죽었고 수정 심장 또한 회수하지 못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그녀는 고대의 지혜와 함께 돌아왔고, 이시 타브를 깨우도록 의회를 설득했다. 은빛매가 아홉 번째 가문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일드얀의 가문은 의회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했고 소생 의식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은빛매의 요정들은 대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존경과 공포, 사랑. 신에게 봉헌되기에는 모자라지만 요정 한 명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열망의 덩어리. 그들에게 대모는 작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쉭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별점술의 괘를 믿는 만큼 대모의 판단을 믿었다.
* * *
피송곳니 장원에는 숲을 등진 작은 들판이 있었다. 출렁이는 들풀 위로 붉은 꽃이 거품처럼 흐르는 곳이었다. 딤 나겔은 거기에 안락의자를 두고는 휴식을 즐기곤 했다.
마른 몸이 유연한 인상을 주는 개 한 마리가 딤 나겔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은빛 가죽이 햇볕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하늘은 구름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연한 청색이었다. 산들바람이 나뭇잎을 쓸어 넘기는 소리, 종이가 서로 스치는 소리, 숲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순서 없이 이어지며 고요를 이뤘다.
개가 먼저 손님의 방문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몸을 일으키고는 재빨리 숲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딤 나겔은 개가 달아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사람 그림자가 종이의 반절을 덮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인이었다.
"별불꽃의 주인께서 오셨습니다."
"알았으니 가 보게나."
딤 나겔은 가만히 멈춘 채 그렇게만 말했다. 발걸음이 점차로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림자가 곁에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소리의 성분이 균질해질 무렵 또 다른 목소리가 거기에 끼어들었다.
"희곡이군."
"인간이 쓴 거야. 오래된 복수극이지."
"그런 데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딸이 죽었을 때부터 읽고 있었어."
"개를 기른 건 언제부터였나?"
"원망하기를 멈췄을 때부터."
"그러면 날 놓아줘."
긴 침묵 속에서 종잇장만이 차례로 넘어갔다. 어느덧 책의 말미였다. 손끝이 마지막 쪽으로 옮겨갔지만 눈은 글줄을 읽고 있지 않았다. 문장이 텅 빈 눈구멍을 통과해 그대로 머리 안쪽에 쌓였다. 5막 3장의 마지막 대사.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자의 마음은 굶주린 야수와 같으니 장례식과 상복과 조종(弔鐘)이 없을 것이며 평생에 연민의 정이 없었으므로 그 최후 또한.
"너는 아직 아니야."
"아직도―여전히? 언제까지 그래야 하지?"
"네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수십 해 전, 딤 나겔에게는 나트람을 죽일 기회가 있었다. 그는 끝까지 목을 조르는 대신 서약을 요구했다. 서약의 조건은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라는 것.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말라는 것.
"나는 황무지로 보내질 거야. 막내아들은 아직 어리고 방계 아이들은 쓸 만한 녀석이 없어. 별불꽃은 조만간 의회 바깥으로 밀려나겠지―그래, 나는 영광의 끄트머리를 보았고 몰락했어. 이게 네가 원한 결말이 아니었나? 내가 최대한 높이 올라갔다가 나가떨어지는 순간을 비웃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
딤 나겔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목소리가 오는 곳을 보았다. 완고하도록 무망한 얼굴이 태양을 등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짙은 그늘 속에서도 검은 눈은 매서우리만치 번뜩였다. 그는 노인의 머리카락이 눈동자와 같은 색이던 시절을 기억했다… 그 눈빛은 수십 해가, 백 해가 넘도록 여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무지로 간다고."
"은빛매의 대모께서 사냥개가 더는 필요하지 않으시다는군."
"거기에서 죽을 마음인가?"
"네가 나를 풀어 준다면, 그 전에라도."
"이유를 말해 봐."
"무덤으로 보낼 놈이 둘 있어. 목숨을 거두면 나도 죽게 될 거야."
그는 말없이 나트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절규가 길고 무거운 정적을 찢고 나왔다.
"안 돼! 서약을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