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65화 (166/258)

165화 O Absalom (8)

아하, 그게 그렇게 된 일이로군요. 이번에도 내가 옳았고요. 삼촌이 영감쟁이를 죽였다는 것까지는 짐작을 했는데, 그 이유까지도 대강 추리를 마쳤는데 확언을 들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분께서 날 줄곧 피해 다니셨거든요.

일단 삼촌의 이야기에 덧붙이자면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요지는 내가 혼자 아버지 둘(여기에서 벤트레스는 스티그미르와 아자라스를 구분하지 않고 아버지 둘이라고만 말했다)의 죄를 대속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 봅시다. 이렇게만 들으면 아자라스 삼촌이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진실을 밝히고 불쌍한 조카를 구해낸 이야기가 돼요. 그런데 사람은 원래 자기한테 불리한 면은 감추려는 습성이 있죠. 사실을 털어놓을 기회는 그게 처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죠, 시간이 수십 해인데.

정리를 하자면, 삼촌은 내 어머니랑 간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감쟁이는 그걸 눈감아주면서 나한테 화를 풀었어요. 기껏 치른 혼례를 깨고 싶지 않으니 만만한 아들 탓만 한 겁니다. 삼촌은 삼촌대로 말리는 척은 했지만 사실을 말하진 않았죠, 그랬다가는 뭐가 어떻든 엉망이 될 테니까.

그러면 이게 뭡니까. 말만 안 오갔다 뿐이지 둘이 합의를 하고 공모를 한 겁니다. 한쪽은 애를 괴롭히고 다른 쪽은 말릴 테니 진짜 문제는 건드리지 말자, 하고. 아들 되는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죠, 죄라고는 이런 집안에서 이런 얼굴로 태어난 것뿐인데 삶은 감자처럼 으깨졌고 정신병까지 걸렸으니.

폐허로 가기 전에는 아우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원래는 저랬어야 했다고요. 아우님의 삶이 내 진짜 삶이고 이건 기형이나 악몽 같은 거라고요. 그래서 잘 해 줬습니다. 잘 해 줘야죠, 내 앞날을 내 손으로 망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돌아와 보니 우리 아우님 신세도 반쯤은 악몽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괴롭힌 겁니까? 완전히 악몽으로 만들어 놓으려고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난 변명은 안 좋아해. 영감쟁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화풀이를 한 거지. 우리 아우님이 눈치도 없이 날 졸졸 따라다니니 말이야. 미안해, 아우님, 안 그랬다가는 영감쟁이랑 삼촌을 둘 다 때려죽이게 될 것 같았거든. 그래도 조실부모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내가 참 착했지?

(테네브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씩 웃은 벤트레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강현을 바라보았다.)

뭐, 아무튼, 다 죽었어요. 모두 지난 이야기예요. 이 문제로 더 고민하고 싶지 않습니다.

*  *  *

그리고 강현은 생각했다. 스티그미르가 벤트레스를 죽게 했고, 벤트레스가 테네브로즈를 죽게 했으며, 파니스크가 자신의 두 형제자매를 죽게 했고, 아자라스의 세 자식이 아자라스를 죽게 했고, 아자라스가 스티그미르를 죽게 했단 말이군. 죽음은 원환을 이뤘지만 그 거래장부는 청산되지 않은 채 (대륙의 남단을 관통해서) 강현의 곁을 걷고 있었다. 그는 망령에게 물었다.

"그러면 너는 삶을 증오하는 거냐."

"저는 삶을 증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네브로즈는 느리게, 문장을 이루는 각 어절을 나누어 발음하면서, 그 질문과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말했다.

"저는 삶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세카두의 봄은 밝고 따뜻했다. 테네브로즈는 부드러운 숨을 삼키고서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우리는 죽음을 섬기게끔 빚어진 존재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므로 특별합니다. 모든 이의 생에는 끝이 있으며 삶에서의 영광과 기쁨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 과하게 몰입하는 것은, 연극을 처음 본 어린아이가, 무대에 오른 배우들이 정말로 왕이거나 장군이라고 믿어 버리는 순진함과 똑같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는 소임을 다하고 저승으로 돌아가겠지요. 가디스에 남지 않는다면 기억은 씻기고 깨끗해진 영혼만이 땅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황무지의 학자가 될 수도 있으며 야스와다의 평민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대장군이었던 배우가 내일은 노예 검투사 역할을 맡는 것처럼요.

그러니 여기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어둠달의 테네브로즈가 아니라 그 이름을 연기하는 영혼 한 조각일 것입니다. 그 영혼은 한때 삶을 증오했지만 이제는 거기에 별다른 감상을 지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다른 걸 물어 보자. 너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냐."

"아주 먼 옛날에, 수정 심장이 깨지기 전에는 기억을 씻는 이가 없었으므로 모든 요정은 다시 태어나더라도 지나간 시간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망각은, 땅의 사람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주인님께서 베푼 선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익숙한 윤회론에, 예컨대 힌두나 불교 같은 종교에 업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은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일 것이다. 윤회가 이전 생과는 무관하게 반복된다면, 선업이 쌓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행할 필연 또한 없을 것이므로. 다시 여기에 태어날 테니 미래의 자신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멀고 모호하다. 사람은 백 년 후의 황금 더미보다도 바로 이 순간의 동전 한 닢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습성이 있으니까.

강현은 죽음도 업보도 없는 세계를 머릿속에 그렸다. 영혼이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되살아나던 세계를. 하지만 거기에 의무가 실리진 않는 세계를. 그런 곳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일조차 큰 죄가 아닐 것이다. 몸의 죽음은 새로운 배역을 얻은 채 유년기를 되풀이하는 일일 뿐이므로.

따라서 요정의 심성은 세계의 형상과 맞물린다고 할 수 있겠다. 원한을 더디 가지며, 죽음에 무심하고, 좋아하는 것에 매달리는… 마치 놀이터에서 소꿉장난을 벌이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런 놀이는 때때로 어른의 상상을 뛰어넘도록 잔인해진다…….

그는 조금 더 생각을 이어가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너는 기억이 남아 있잖아. 가디스 사람들도."

"죽음이란 낱말은 여러 뜻을 지닐 수 있습니다. 땅의 사람들은 혼이 그릇을 떠나는 일을 죽음이라 이릅니다. 반면 우리에게 죽음은 생의 기억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일 뿐입니다."

"너희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거구나."

"땅의 주민이 주인님의 꿈을 삶의 무대로 삼듯, 우리는 저승에서 살아갑니다. 유일한 차이는, 그 사람들은 즐거움과 슬픔을 모두 누리는 반면 저승의 사람은 둘 모두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네가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

"성공한 만큼 실패했고 실패한 만큼 성공한 것이지요."

"그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는 거야."

테네브로즈는 강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저는 지난 삶이 고통이었음을 압니다… 하지만 과거를 연민한다면 그건 지금의 저를 연민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으니 나으리께서도 저를 안타깝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대답과 함께 강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세카두로, 그가 다룰 수 있고 다뤄야만 하는 땅으로 되돌아왔다. 봄볕이 느닷없이 불어나더니 거기에서부터 다시 생각이 시작되었다.

*  *  *

강현은 지금껏 그랬던 것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환한 침묵 속을 걸으면서 성공이나 실패 따위를 곱씹었다. 그것은 최종적인 상태라기보다는 직소 퍼즐의 각 조각과 같아서 어떤 면은 움푹 파이면서 찔려 들어오기도 하고 도리어 그 반대면으로는 아직 놓이지 않은 조각을 침범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의 평생은 그런 조각이 수없이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퍼즐의 거대한 상이며 세상은 다시 그 총합이다. 따라서 그 각각을 따로 떼어내 현미경 아래 놓으려는 시도는 현명하게도 무의미하다. 너는 어리석었다, 잘못되었다 하는 단평. 책임 없이 현명하고 책임 없이 홀가분한 말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을 직시할 만큼은 똑똑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지적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말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강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영영 미결로만 남겨둘 수 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물음은 끊임없이 닥쳐오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조차 선택이다 하고. 그는 도덕이나 연민 따위가 아니라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테네브로즈가 친우와 동료들을 모두 죽이고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도 요정들의 삶을 애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마지막 신마저 잃게 된다면. 그래서 나우파나와 바단이 그런 것처럼 야스와다도 신화의 한 장으로 전락하고 만다면.

그 가정문에 당연한 사실 몇 가지가 달라붙었다. 요정이 인간의 오랜 적수라는 것. 그들 역시 인간에게 미안함을 느끼진 않으리라는 것. 그러니 자신에게도 괴로워할 의무가 없다는 것. 나트람 같은 악인보다 딤 나겔이나 모티스처럼 도덕 없이 선량한 이들이 더 많을지라도.

볼로디아가 지적했듯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추모할 수 있는 마음은 결함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것이다. 강현은 사랑으로 평형을 이룬 세계와 거기에 침입한 이방인 무리를 떠올렸다. 그들이 망가뜨리거나 고친 것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사연을 거슬러 오르자 황제와 두 친우가 남았다.

"이런 생각을 해. 인간이 처음부터 요정들이랑 섞여 살았더라면, 하다못해 황제가 인간을 일꾼으로 쓰지 않았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 거라고. 그렇지 않냐."

"그랬을 겁니다."

말을 받은 건 벤트레스였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외웠겠지요. 요정이 인간을 가축처럼 다뤘던 것과는 반대로, 인간이 요정을 이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욕망은 요정의 것보다 깊으며 요정의 사랑은 인간의 것보다 깊으니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몇 걸음만큼의 침묵이 있었다.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떳떳할 건 없을 텐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네가 수도승처럼 지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적어도 평범한 귀족처럼은 살았겠지. 애완동물을 들이진 않았더라도 인간 노예는 뒀을 거야. 만찬에서 통구이를 먹은 적도 있을 테고. 그런 놈이 다른 세상이었더라면 제가 피해자였을 겁니다, 하고 주절거리는 건 뻔뻔한 일이 아니냔 말이야."

"하기야 요정이 직접 말하기에는 염치가 없는 내용이죠. 하지만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에 생겨난 원죄를 내가 어쩌겠습니까, 난 그저 남들처럼만 살아왔는데요. 정신이 나간데다가 심하게 방탕하긴 했어도, 아무튼. 사실 당한 것으로 치면 나도 불평할 거리가 조금 있고요. 그러니 그건 어쩔 수 없는 과오다 치고 상상을 해 보는 겁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벤트레스는 날씨라도 읊듯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 그래요. 이젠 명문가가 아니에요. 멸문을 당했거든요."

"뭐?"

"나도 자세히는 모르니 아우님께 물어봐요. 아까 아침에, 심심해서 얼굴을 보러 갔더니 그 말만 듣고 쫓겨났거든요. 뭐라던가, 나 덕분에 가문이 깡그리 망했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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