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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63화 (164/258)

163화 O Absalom (6)

"…정원사 직분을 받는다면 청지기께 소원을 하나 빌 수 있습니다. 작은누님의 넋을 건강한 몸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울 또한 사라지겠지요."

연휴 기간이 끝나갈 즈음부터 파니스크는 부쩍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깨어나지 않는 것은 예사였고 눈을 뜨더라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테네브로즈가 이스빈드에게서 점괘를 받아낸 후, 엘드리그에게 저승의 일을 알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그녀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큰삼촌을 찾아뵈어야겠구나. 고발장 쓰는 법을 여쭤야 할 테니."

"저는 스무날을 꼬박 고민한 끝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님께서도 그만큼은 고민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고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저를 반역죄로 고발하십시오."

엘드리그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너는 정원사들을 직접 만났지만 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지 않으냐. 내가 그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지도 않아.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더 다오. 그래, 파니스크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이렇게만 있고 싶다."

*  *  *

파니스크가 억제제조차 넘기지 못하고 피만을 쏟게 된 것은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고서도 보름이 흐른 뒤였다. 테네브로즈는 당분간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것 같다는 뜻을 3교구에 전하고서는 본가에 머물렀다.

"도련님, 이만 쉬셔요. 벌써 나흘이나 눈도 붙이지 않고 여기에 앉아 계셨잖아요."

"알잖아, 이게 마지막이야. 그 전에 누님께서 눈을 뜨실지도 몰라."

테네브로즈는 수건에 물을 묻혀 파니스크의 이마를 닦아냈다. 살갗이 맞닿지도 않았는데 열기가 선명히 느껴졌다. 마력 부종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모두 피가 끓어오르면서 죽는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생이 다하기 직전에야 겨우 눈을 뜬다고.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필요한 게 생기면 다시 부를게."

그는 하인을 내보내고서는 품에서 지혜의 고리를 꺼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엘드리그가 가지고 있었다.

구슬을 옮길 때마다 줄은 복잡하게 꼬이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파니스크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얹혔다. 건강을 되찾는다면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에 그러면 좋겠지, 하는 대답을 얻어낸 게 고작이었다…….

"…줄곧 여기 있었던 거니? 그 의자에 앉아서?"

문득 가느다란 목소리가 의식의 흐름을 끊고 들려왔다. 파니스크였다. 미동 없이 감겨 있던 눈꺼풀이 올라가면서 보랏빛 눈을 드러냈다. 눈빛이 무엇도 비추지 않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무너지는 동굴 틈새로 서광이 비쳐 들어온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네, 누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큰누님처럼 사냥도 다니고 검투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방법은 묻지 않으셔도 돼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나흘이나 깨어 있었던 거야?"

"그래요, 누님. 잠들었다 깨어나시면 모두 이해하실 겁니다."

"나흘이나 깨어 있었구나.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괜찮아."

파니스크는 팔을 뻗어 테네브로즈의 손에 손을 겹쳤다. 여름을 닮은 더위가 불쑥 가까워지더니 겨울과 뒤섞였다. 그는 과월(果月) 중순 저녁을, 그날의 미지근한 공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고작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어낸 것도 아니고―"

"이제 가서 쉬렴. 나도 쉴 테니까. 죽을 사람이 산 사람을 너무 오래 괴롭혔어."

"누님, 저는 쉴 수 없습니다. 저는 조금 더 살아야만 합니다. 조금 더 살아야만……."

그 어절만을 막연히 중얼거리던 테네브로즈는 손에 맞닿던 열기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팔꿈치가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침대 가장자리에 얹힌 게 보였다. 아래팔이 나무바닥에 인 가시처럼 허공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원래 자세대로 되돌리려는데 뼈가 꼭 목각인형마냥 움직였다. 팔을 몸과 수평이 되도록 두어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데. 무엇이 안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눈물이 훅 쏟아졌다. 슬픔 때문인지 홀가분한 느낌 때문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눈가를 문질러 닦은 테네브로즈는 하인을 부르러 나가기 위해 문간에 섰다. 떡갈나무 문으로부터 한 뼘 떨어진 허공에 빛이 불완전한 고리 모양으로 모여 있었다. 하루를 주기로 삼은 환영 시계였다. 빛이 더 자라나 두 끄트머리가 서로 붙으면 원환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시작될 것이다…….

문을 열자 하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뭐가 그렇게도 놀라운지 호들갑이었다.

"세상에,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가씨는……."

"다 괜찮아. 안 괜찮을 게 어디 있겠어. 큰누님을 불러 줘.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고."

다시 의자에 앉았는데 이제는 문간에 빛이 없었다. 시계가 한 바퀴를 돈 모양이었다. 혹은 마력 결정이 모두 닳았는지도 모른다. 이미 나흘간을 기다렸으므로 거기에 잠깐이 빠지거나 더해진다 해도 큰 차이는 없다, 그러니 시간을 셀 필요도 없다 하면서 테네브로즈는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엘드리그가 들어왔다. 침묵만이 길어지더니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을 하거라. 나는 아직 저승의 사람이 아니니 네가 나를 이끌어야지 않겠느냐."

테네브로즈는 다시 문을 열고 하인에게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을 당부한 뒤 침대 앞으로 되돌아왔다. 오래된 주문을 읊기 시작하자 스산한 녹색 불꽃이 그들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화로의 불티가 거센 바람을 타고 치솟는 순간을 거꾸로 되감는 듯했다.

"…이로써 평안의 인도자께 우리의 혼을 바칩니다."

허공에서 엉겨 붙던 불길이 일시에 사라졌다.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짙은 어둠이 사방을 메우더니, 다시 녹색 불꽃이 일었고, 그 뒤편으로는 해골의 윤곽이 차츰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엘드리그와 테네브로즈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어 예를 표했다.

개의 머리를 한 남자는 엘드리그에게 먼저 눈길을 주었다.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기 전에 소원을 하나 들어 주려 한다. 말해 보아라."

"제 동생의 영혼을 저의 그릇에 함께 담아 주십시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넋이 흩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락한다."

솔로틀은 손으로 샘물을 떠내듯 파니스크의 가슴팍에서 일렁이는 빛을 꺼내들었다. 덩어리를 받아든 엘드리그는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고, 그것을 삼켰다. 거센 화염이 솟구치며 그녀의 몸을 불살랐다. 낮고 깊은 목소리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해가 두 차례 뜨고 진 후에 깨어날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 쓰러져 누운 엘드리그의 몸이 나타났다. 외양은 이전과 같았지만 테네브로즈는 그녀가 땅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죽음을 마주하듯 경건한 태도로 솔로틀을 올려다보았다. 개의 해골이 다시 움직였다.

"네게서도 복잡한 마음을 덜어내려 한다. 대신 그 자리에 충성과 수긍을, 그리고 끝없는 평안을 넣어 주마. 정원사로서의 일에 도움이 될 게다."

"그 전에 저 또한 하나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말해 보아라."

개 머리를 한 신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텅 빈 눈구멍 속에서 초록색 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저승으로 모여드는 영혼을 상상했고, 구원이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사실을 떠올린 다음, 자신이 겪은 죽음들을 곱씹으면서… 청원했다.

"동족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불가능하다."

테네브로즈는 이어 말했다.

"제 혈족만이라도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 또한 장담하기 어렵다."

그는 마지막 간청을 올렸다.

"그렇다면 다만 어린 아이의 피를 보지 않게끔 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  *  *

그 직후에 아버지께서 소식을 듣고는 달려오셨습니다. 문이 열릴 때 하인 하나가 청지기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쓰러진 큰누님까지도요. 아버지께 사실을 그대로 밝히고 하인은 함구시켰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몇 달이 흐른 후에, 하인은 원로들에게 가서 자신이 본 것을 말했습니다. 가문 회의가 열렸지요. 저는 작은누님을 되살리기 위해 큰누님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하지만 실패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제가 죄인인 것은 명백하니 누님 두 분만큼은 무고한 상태로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간청 덕분에 별채에 갇히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만 가문의 이름은 잃고 말았지요. 큰누님은 본가에 남았고, 저는 나트람의 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으리를 만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3교구의 동료들을 학살하고 혈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말입니다.

한때 저는 조금 더 살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모두가 원수로 변했으며 직접 목숨을 빼앗게 된 이도 족히 수백이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평온 그 자체가 두려움이 되곤 합니다. 어느 하나 지켜낸 게 없는데도, 친우와 동료를 적으로 돌렸고 혈족마저 모두 잃게 되었는데도 아무런 비애를 느끼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편리한 마음을 기껍게 여깁니다. 제가 정원사로서의 소임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런 심성 덕분일 것입니다.

물론 청지기님과 나으리 두 분은 제가 망가졌다고 여기십니다: 나으리는 제게 복잡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옳은 것이라고요. 반면 청지기님의 후회는 슬픔을 떼어낼 때 염치와 분별력마저도 함께 도려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음을 잘못 고쳤다는 것입니다. 나으리께서도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때가 많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일입니까? 저승에 남겨둔 나머지를 다시 이어 붙여서, 자책과 고뇌에 쫓기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슬픔은 저 멀리에 남겨두고 염치만을 더해, 누님들처럼 순종적인 종으로 변해야만 합니까?

어째서요?

제 대답이 간혹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것은 압니다. 짜증도 나시겠지요. 하지만 그건 기분의 문제일 뿐이지 과오가 아닙니다. 저는 값진 영혼을 가디스로 모아들였으며 가장 큰 꿈 조각을 회수할 기회까지 붙잡았습니다. 나으리의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살생을 즐기거나 아이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러우며 스스로에게 떳떳합니다. 살아 있을 이유는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니 제 평생이 나으리의 의문에 충분한 대답이 되었길 바랍니다.

(그리고 벤트레스가 말했다.

"잠깐만, 아우님. 남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아자라스 삼촌이 우리 영감쟁이를 죽인 것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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