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O Absalom (5)
열월(熱月)도 지나 과월(果月) 중순이었다. 여름 열기는 끝나가고 열매가 과일을 맺을 무렵이다. 과월이 끝나면 다음 달로 접어들기 전에 5일간의 연휴가 있다. 그동안에는 거창한 축제도, 기념식 만찬도 없다. 도시 전체가 깊은 잠과도 같은 평안에 잠길 뿐이다. 모두의 안식을 위해서는 그 전에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의회의 판단이었다.
공기가 미지근하니 습했다. 타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온기를 잃은 하늘에서는 여름이 저무는 시기 특유의 부조화가 느껴졌다. 테네브로즈는 수레에서 내려 숲의 입구로 갔다. 폭풍부름 장원과 평민 거주구 사이의 공백을 메운 작은 숲이었다.
하인 두 명이 열의 없어 보이는 태도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폭풍부름을 섬기는 요정들이었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후로 담력을 시험하려는 꼬마들부터 삶을 비관한 이까지 온갖 사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인근 장원의 주인으로서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관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길을 내 주었다. 숲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둠이 한층 짙어졌다. 잎사귀 틈새로 드러나는 밤하늘은 엎지른 먹물을 조금 닦아낸 자국 같았다. 테네브로즈는 등불을 밝히지 않은 채, 윤곽이 어렴풋하게만 보이는 길을 따라 가만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나에게는 삶이 딱히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모두에게서 잊혀 사라진다는 소문이 정말이라면 참 좋겠구나 하고.
그러면 죽음을 애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며 다른 추적자에게로 임무가 넘어갈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 그래도 3교구 신관들은 다들 더 살길 원하는 듯하니 문제는 없지 않을까,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계속 앞으로 향했다. 잔가지가 밟혔는데 구부러지기만 하고 부러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나무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아리고 떫고 청명한 향기였다. 그날은 달빛이 유독 밝았는데 오늘은 등불을 켜지 않아서인지 발끝과 땅이 구분되지 않았다. 어둠으로부터 나와 어둠으로 돌아가는 그림자처럼. 그림자. 불꽃인 듯 너울거리다가 이만 가라앉고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그것. 광대가 빛이 드는 상자를 앞에 세우고 그림자 인형 놀이를 하면 아이들은 그게 정말인 양 빠져들곤 한다.
조금 더 걷자 머리 위 잎사귀들이 너무 빼곡해진 탓에 공기를 호흡하는지 그림자를 들이마시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등불은 켜지 않았다. 소문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상대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마치 기적처럼. 그래 세상에 슬픔을 더하지 않고 죽기란 일종의 기적이지 증명도 재현도 불가능하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가정해야만 겨우 말이 되는 건 기적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지 그때 빛이 가까워졌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등불을 가슴께에 들고는 오고 있었다. 평민들이 드나드는 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싸구려였다. 칼린카 고기 한 덩어리 가격밖에는 안 됐다.
"입구는 하인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어디로 온 겁니까? 이 길만 따라가면 되니 어서 나가요. 들어왔으니까 나가는 길도 알겠지만."
테네브로즈는 하인에게 낮잠을 방해받은 노신사처럼 퉁명스러운 정중함을 발휘했다. 요정은 더 나아가지도 대꾸하지도 않고 그저 신관을 내려다보았다. 그늘이 짙은 탓인지 이목구비가 잘 분간되지 않았다. 늙은 남자로 보려면 그렇게 보였지만 다시 살피면 막 성년식을 치른 여자 같기도 했다.
"너는 삶이 즐거우냐?"
목소리는 얼굴만큼이나 모호했다. 테네브로즈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는 값싼 등불과 함께 오는 구원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소문을 들었나보죠, 헛수작을 부리진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그쪽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유는 당신이 폭풍부름의 혈족일 가능성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니까요."
요정의 등불이 기울어졌다. 옷매무새를 살피려는 듯했다.
"요즘 오는 것들은 이렇게만 물으면 금방 도망가는데 배짱이 있군. 그래, 장난을 치려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이시 타브의 종이 내게는 무슨 볼 일이 있어 왔느냐?"
"죽은 신이라도 섬기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수정 심장을 가져왔나요? 그렇다면 잘 된 일입니다, 내 소관은 아니지만. 나는 가을 연휴가 오기 전에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해요. 원인을 색출한 다음 평민들을 안심시키고 교구에는 보고서를 써 올려야 한다는 겁니다."
굵고 거친 웃음이 들렸지만 요정의 얼굴에는 미동이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그 소리가 무릎께에서 올라왔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적갈색 개가, 털이 없고 가죽만이 황동 조각상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개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늑대인간일까? 늑대인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개가 돌진하듯 덤벼들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등잔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요정이 꾸짖듯 외쳤다.
"이봐, 너무 일찍 나타났어!"
"오면서 중얼거리는 걸 들었어. 죽고 싶나본데. 신관이니까 쓸모도 많을 거야. 최소한 가문도 없는 떠돌이보다는 유용하겠지."
개는 앞발로 테네브로즈의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고서는 물었다.
"자, 말해 보아라.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 삶이 괴로운 일로만 가득차 있어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맡게 되어서? 나약한 놈은 필요하지 않아……."
엘드리그와 수없이 나눈 주제였으므로 묵상할 필요는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수상쩍고 낯선 상대에게, 하나는 요정이고 하나는 짐승인 누군가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게 현명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저 말했다.
"괴로운 일은 예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끝났습니다. 아마도 끝났겠지요, 죽거나 사라진 걸 어찌 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둘째 누님이 아프시고, 저 또한 그 사실이 괴롭긴 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죽고 싶다면 거짓일 겁니다. 병자를 가족으로 둔 슬픔이 몸져누운 사람의 슬픔만큼 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요,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누워 있느냐? 개 한 마리를 떨쳐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딱히 살고 싶지도 않아서 그렇습니다. 떠맡을 게 너무 많아서 겨우 살아 있는 것이거든요. 소문이 사실이기만을 빌고 있습니다. 당신네가 우울한 신관을 속여먹으려는 불한당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테네브로즈는 그렇게 답하며 무색 마력을 터뜨렸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면서, 개의 몸은 멀찍이 날려 보내도록 정확히 조율된 폭발이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났다. 기적을 이끌고 오는 사람이라면 이런 무례쯤은 눈감아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윽고 쓰러진 개의 몸이 뒤틀리며 요정으로 변하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갈색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실력이 썩 괜찮군. 속도도 빠르고 섬세해."
처음부터 있었던 요정이 촌평했다. 이제야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였는데 외관상으로는 남자와 동년배인 듯했다.
"좋아, 젊은 친구. 대화를 해 보자고."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듯 팔을 쑥 내밀었다. 테네브로즈는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로 되물었다.
"소문은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던 겁니까?"
"저 아래에 사는 꼬마들이 열매를 따러 왔기에 간식거리를 조금 주고 소문을 내라 시켰을 뿐이야.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것처럼 기억을 지워주지도 못해."
"그러면요?"
"너와 같은 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슬픔을 가져갈 테니 네 삶을 우리에게 다오. 기쁨은 그대로 남겨 주겠다."
"그런 걸 가져가서 무얼 하려는지는 몰라도 당신네가 떳떳한 족속은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나는 3교구의 신관이에요. 도시를 지키고 배반자를 처단하기로 서약했죠. 만약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된다면……."
거기까지 말한 순간 억센 손아귀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선득한 초록색 불꽃이 눈동자 바로 뒤편에서 이글거리더니 몸과 정신이 단절된 듯 감각은 사라지고 의식만이 뚜렷해졌다. 의지가, 순전한 뜻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밀려들어왔다.
<충고 하나 해 주마. 우리에게 거래라거나 약속 같은 절차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야. 지금 당장 네 몸을 빼앗고 혼을 바꿀 수도 있지. 그러면 나는 본가로 되돌아가서 기억을 잃어버린 척 연기를 할 거야. 저 이에게는 네 큰누님의 몸을 주고. 다만 그러기에는 우리로서도 귀찮은 점이 많고 너희도 억울할 테니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하잔 말이다.>
* * *
정원사로서 알아야 하는 것들이, 수많은 지식이 쏟아졌습니다. 두 분은 제 전임자인데, 가장 큰 꿈 조각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인간 세상을 떠돌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청지기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하셨지요. 이시 타브를 깨운 뒤 화신이 나타나게끔 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말은 제가 그 일의 주범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생 계획은 헤이딘이 별채에 갇히기 전부터 논의에 오르던 것이었으니까요. 시기가 절묘했던 셈입니다. 그런 식의 우연과 필연이 겹친 끝에 모든 게 우리의 뜻대로 되었지요.
어쨌거나 두 분은 저승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몸을 되찾았을 때에는 지혜의 고리 두 개만 땅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지요. 주워든 다음 날이 샐 때까지 숲에 머무르다가 교구로 돌아왔습니다. 보고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이 계속 다른 쪽으로 움직이더군요.
분명히 도시를 반역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던 게 바로 어젯밤의 일인데, 새로 알게 된 사실을 곱씹을수록 이건 엄청난 기회가 아닌가,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커지며 염려를 모두 밀어낸 것입니다. 그 제안이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해서였는지, 아니면 마법의 작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전자였을 겁니다.
당시의 저는 둘째 누님께서 묘지에 묻히거든 목숨을 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분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픔 속에서도 조금 더 살기를 원하는 분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 멀쩡한 사람이 선수를 친다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저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살아 있을 이유를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목숨을 내던지기에는 짊어질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둠달의 가주가 될 사람이었고 저를 걱정하는 친우들 역시 여럿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조금 더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정원사들의 기억을 곱씹으면서 계속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내가 이 일을 맡으면 큰누님의 우울도 내 허무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땅에 머무를 것이며 작은누님은 다른 이들처럼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병마에 빼앗긴 시간을 돌려받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내버릴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도시를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을, 인간들의 신을 불러낸 것은 결국 저승의 존재이며 가장 큰 꿈 조각 또한 이방인들의 손에 있었으니까요. 제가 잠든 분을 저버리고 주인님을 섬긴다면 언젠가는 동족의 피를 손에 묻혀야만 했습니다―결국엔 그렇게 되었습니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와 선택의 결과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압니다. 울쿠스가 흰둥이들을 모두 죽이려 한 것과 진배없는 일이지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작은누님을, 그 외의 모든 사람을 변명으로만 삼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을 부지하도록, 그러고는 청지기 직분을 받들도록 말입니다…….
그때의 고민을 모두 읊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선택했고 돌이킬 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