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O Absalom (2)
대전쟁의 마지막 순간에도 주인의 곁을 지킨 인간들이 있었다.
아홉 명문가 중에서도 그런 충성을 얻어낸 가문은 다섯 곳에 불과했다. 다섯 가문의 요정들은 노견에게 기름진 살점을 먹이고 퇴역한 군마를 솔질하듯 그 후손을 돌보았으며 후손은 가문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동반자가 되었다.
아이에게 인간은 삶을 두 발짝 앞서나가 먼저 기다리는 친구이자 생의 길목이었다. 평생을 함께한 인간이 늙어 죽을 때 청년은 젊음의 한 자락을 잃어버리고 완연한 어른이 되었다. 시인과 화가는 인간의 덧없음을, 반석과 같은 순종을, 빠르게 피어났다 빠르게 시드는 지혜를 찬미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 대개는 카스바에서 팔려 온 것들이었다. 주문에 얽매인 채 생각할 줄 모르는 노예로 전락하거나 연회용 통구이가 되는 것이 그들의 미래였다. 가끔은 애완동물이 되는 은혜를 입기도 하지만 그 수는 아주 적었다.
* * *
"가짜 아니야? 너무 자그마한데."
"인간에 어떻게 가짜가 있어. 원래 인간들은 작아 보여도 빠르게 자란다구. 원래는 축제날 저녁거리였는데, 내가 졸라서 애완동물로 삼아 달라고 했지. 아빠는 쉽게 허락해 줬는데 엄마가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 칼린카도 다 사육장으로 돌려보냈는데 인간이라고 잘 기르겠냐면서……."
테네브로즈는 친구들의 뒤편에 서서 우리 너머를 힐끔거렸다. 새 애완동물을 들였다기에 다함께 구경하러 온 참이었다. 인간들의 땅에서 온 아이라서 아직은 말하는 법을 모른다고, 도망가거나 덤빌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에 가두어 두고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작은 인간은 처음 보는걸. 우리 집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커. 우리 아빠보다 작은 게 없다니까."
"새끼 인간을 네가 못 봐서 그래."
주인 꼬마의 핀잔에 소년이 벌컥 짜증을 냈다.
"뭐, 인간은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나우파나에서 온 주제에. 내 가문엔 원래부터 인간이 있다구! 삼촌이 그러는데 조만간 자기 인간을 결혼시킬 거래. 아이가 나오면 나한테 주기로 했어."
"얘, 계산해 봐. 넌 열여섯이라구. 오늘 당장 애가 생긴다고 해도 같이 놀 만큼 자라려면 십 년은 더 지나야 할 걸. 그러면 벌써 스물여섯이야. 신관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인간이랑 어떻게 놀겠어?"
"나는 가문 일을 돕기로 이야기가 됐어. 너야말로 그 나이 먹고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게! 남 걱정할 시간에 주문 연습이나 하지 그래?"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틈을 타 테네브로즈는 우리에 바짝 붙어 섰다. 살갗이 까무잡잡했고 몸집이 작았다. 아마도 나이는 자신과 엇비슷할 터였다. 인간이 빠르게 자라기 시작하는 건 열 살이 지난 다음부터라고 하니까.
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달은 애완용 인간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말뜻을 모두 이해하고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애완동물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고민도 걱정도 모두 들어 준다면? 칼린카도 똑똑하기야 했지만 말을 하진 못했다.
"앗."
시선이 마주치자 테네브로즈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밤색 눈이 맑고 깊었다. 요정들의 반짝이는 눈과는 완전히 달랐다. 날 선 유리조각과 잘 닦여 반들거리는 조약돌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이윽고 인간의 입술이 달싹이며 안개 같은 목소리를 불어 내쉬었다.
* * *
테네브로즈는 인간의 말을 잊지 않았고, 본가로 돌아가자마자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이가 한 말을 묻기 위해서였다.
"욕이었다는 거죠? 저리 꺼지라는 뜻이었다고요―"
"그래, 그 애도 걱정이구나. 신관들이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을 테니 직접 우리네 말을 배워야 할 텐데, 갇힌 채로는 어려울 거야. 배운다 쳐도 반항적이면 오래 살기는 어렵지."
끔찍한 미래가 눈앞에 번뜩였다. 애완동물을 들인 애는 변덕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것이다. 애지중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질렸다며 휙 버리기 일쑤였다. 손을 깨물었다면서 집에서만 자란 칼린카를 숲에 풀어버린 일도 있었다. 인간도 조만간 그 꼴이 날 게 뻔했다.
"우리가 데려올 수는 없나요? 잘 돌볼 수 있어요."
"인간은 칼린카보다도 약하고 섬세한 생물이란다. 칼린카는 내버려두어도 혼자서 덤불을 드나들고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놀지만 인간은 쉽게 외로움을 타. 게다가 잘못 다뤘다가는 멍청하고 무례한 성격으로 변하고 말지. 물론 좋은 인간은 요정 친구들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되지만, 벌써 바깥 세상에서 열 해나 자란 아이를 그렇게 길러내는 건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한참은 어려운 일일 거야."
"하지만 친구가 돌려보낸 칼린카가 다섯 마리가 넘는걸요. 칼린카야 사육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죽을 거예요."
"인간을 살리고 싶으냐? 네게 욕을 퍼부었는데도?"
"전 그 인간이 좋아요. 그 애 눈동자가 구슬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걔가 절 안 좋아해도 돼요. 걔 주인이 누구인지도 사실 별로 안 중요해요. 그냥 걔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자라스는 아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신중한 대답이 침묵을 뚫고는 훅 가까워졌다.
"그 아이가 새로 들인 애완동물을 넘겨주진 않을 거야. 만약 그런다 쳐도 네게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네 나이쯤 되는 애들은 말도 안 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곤 하니까. 그러니까, 대신… 네가 인간 말을 배워서 말을 걸어 보는 건 어떠냐? 어차피 너도 신관이 될 테니 미리 익혀 두는 것도 좋겠지."
* * *
여기에서 잠깐, 한 가지 사실을 일러두고자 합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인간 말을 배우게끔 한 것은, 그리고 제가 그 인간에게 요정 말을 가르친 것은 저희가 자비롭거나 선량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그 인간을 사랑했으며 아버지는 저를 사랑했으므로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일찍이 말씀드렸다시피, 요정을 이룬 것은 강렬한 애정입니다. 늑대인간과 인간이 양심과 도덕이라는 것에 시달리는 동안 우리는 사랑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아끼는 것들을 삶에 남겨두기 위해 애쓰며, 동시에 모든 삶을 거기에 바칩니다. 헌신을 돌려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무런 보답이 없이도, 크나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인연이 요정을 한데 엮어 놓습니다. 싫어하는 이를 함부로 해쳤다가는 아끼는 이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가 도시를 촘촘히 옭아매고 있기 때문에, 결국엔 그물에 엮인 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둘뿐입니다. 하나는 남을 해하고서는 증거를 감추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움받을 용기를, 그리고 마땅한 계기를 딛고 발돋움하는 것이지요. 전자도, 후자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울쿠스가 스카르파와 흰둥이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망설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닿지 않는 것은 짚으로 만든 개와 다름없습니다. 잠시 가지고 놀거나 친근하게 대할 수는 있으나 내버리기도 주저함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늑대인간들에게 사악하고 기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으니 요정 아이들이 끔찍한 짓을 쉽게 저지르는 이유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어린 것들의 세상은 지극히 좁으며 사랑의 깊이 역시 그만큼 얕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울쿠스가 카위르를 꼬드겼을 때, 카위르와 친구들이 이스빈드를 죽이러 갔을 때, 그 애들은 고작 열두어 살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도 그 언저리였습니다.
* * *
엘드리그는 성년식을 치른 지 오래되었지만 신관 서임은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일을 돕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고전적인 낭만가였고, 괴수 사냥을 나서거나 소설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경쾌한 즐거움으로 채워 나갔다.
요정들은 엘드리그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경멸했지만 그녀는 뒤에서 오가는 말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량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흠결마저도 훈장처럼 내걸 수 있는 유쾌함이 필요한 법이다.
나이 차이는 한참일지라도 테네브로즈는 엘드리그를 좋아했다. 인간 말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는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그녀가 모은 책 중에는 바깥세상에서 온 것도 몇몇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갖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좋아할 애가 어디 있겠니?"
"그래도요. 걔는 자기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단 말예요. 벌써 질린 것 같던데요. 우리에 내버려둘 거면 그냥 저한테 넘겨줘도 될 텐데. 그래서 해 본 이야기예요."
테네브로즈는 인간과 빠르게 친해졌고, 매일같이 그 주인의 거처에 드나들었다. 하지만 주인 꼬마는 친구가 인간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데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새였다. 인간이 자신에게는 항상 퉁명스럽다는 것까지도.
불만이 터져 나온 계기는 사소하다면 사소했고 중요하다면 중요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간이 테네브로즈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춘 것이다. 그걸 본 꼬마는 그를 홱 밀치고는 따지기 시작했다.
"그 애가 이렇게 투덜거렸다고 했지? 자기랑은 안 놀고 인간만 보고 있을 거면 여긴 왜 왔냐고. 거기에 대고 알았으니까 인간을 줘라, 하고 대답하면 안 되는 거지."
"왜 안 돼요? 그러면 걔네 집에 안 가고서도 인간을 볼 수 있을 텐데요!"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야. 이번에는 그 애 기분도 생각하면서 얘기해 보렴. 혹시 아니, 선물로 줄 수도 있잖아. 이렇게 식사 초대도 한 걸 보면 화도 풀린 것 같고."
주인 꼬마와 대판 싸우고서는 보름이 지난 날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할 테니 꼭 오라는 거였다. 화해하고 싶다고. 그저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아무튼, 나갈 준비부터 하렴. 그렇게 입고 친구를 볼 수는 없잖니."
부모님은 따로 일이 있는 탓에 엘드리그가 테네브로즈를 데리고 나갈 예정이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하인이 수레를 이끌고 왔다. 주인 꼬마의 거처는 차원문을 쓸 만큼 멀지는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뒷좌석에 앉은 채 창가에 팔을 얹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저녁 하늘은 갓 불이 들어온 아궁이 같았다. 한낮의 여열이 공기중에 떠돌았다. 그는 눈을 감고 냄새로 풍경을 느꼈다.
한동안 풀 냄새와 개울물 냄새가 흥건하더니 메마른 흙먼지가 일었다. 어둠달 본가를 벗어나 시내로 접어든 것이다. 눈을 뜨면 평민들이 어둠달의 휘장을 향해 경례를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얄팍한 자부심에 취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바퀴가 고르지 못한 포석을 지나며 덜걱거릴 때마다 질문도 함께 튀어 올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인간 얘기부터 꺼내면 싫어할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잘 지냈냐고 묻고, 사과한 다음, 저녁을 함께 먹고서는…….
어느덧 목향이 짙어졌다. 다른 가문의 본가였다. 테네브로즈는 그제야 눈을 떴다. 넓고 판판한 돌길에서는 시내의 도로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새하얀 장미덤불이 길 양쪽에 자랐고 그 너머로는 다시 나무들이 빼곡했다. 저 멀리에 나뭇잎 사이로 치솟은 종탑이 파란 호수 위에 둥둥 떠가는 부표 같았다.
하인이 먼저 손님을 맞았고, 꼬마의 부모님이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꼬마는 식탁 앞에 앉아 걱정과 우울이 뒤섞인 표정으로 빈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네브로즈가 이름을 부르자 고개가 홱 돌아가더니 눈이 열렬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왔구나!"
"초대장을 받았는데 당연하지. 잘 지냈어?"
두 아이는 싸웠던 일은 금방 기억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어쨌거나 그들은 친구였고 말다툼은 늘상 있는 일에 불과했다. 꼬마는 인간 때문에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인간이랑은 고작 세 달을 함께 지냈을 뿐이니까 테네브로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인간은 별로 재미도 없는데, 그런 거 때문에 싸우긴 싫어. 계속 너랑 같이 놀고 싶어. 그래 줄 거지?"
꼬마의 말에 테네브로즈는 활짝 웃었다. 어쩌면, 말을 잘 해 보기만 하면 엘드리그의 말처럼 인간을 본가로 데려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친구를 꼭 안아준 다음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전채는 단정하면서도 풍요로웠다. 장작불에 겉을 그을린 빵. 풋콩깍지와 이름 모를 허브를 향유에 버무린 것. 구운 뼈를 삶아 낸 국물… 잘 익은 순무와 양배추가 입 안에서 살캉거리며 씹힌다. 기름진 감자 요리… 감자 반죽을 둥근 떡 형태로 빚어 칼린카 육수로 만든 양념을 끼얹었고, 곱게 간 치즈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요리사가 구운 고기 요리를 들고 왔다. 브랜디 버터 소스가 곁들여져 있었다. 입 가득 퍼지는 육향이 어쩐지 낯설었다. 테네브로즈는 고기조각을 우물거리면서, 자신이 아는 동물과 괴수의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이거 무슨 고기야?"
질문을 입 밖에 내자마자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걔야!"
"걔?"
"계속 데리고 있으면 나랑 너랑 싸울 테니까, 그냥 없애 버리기로 했어. 원래 만찬에 올리려고 사 온 거기도 하고―나도 인간은 처음 먹어 봐. 맛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