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58화 (159/258)

158화 O Absalom (1)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호명하는 모든 사람이 오래전에 죽어 없어졌다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들이 등장하는 사건 중에는 직접 겪은 것이 있고 단순히 전해 듣기만 한 것이 있는데 그 각각이 제게 무슨 의미였는지 돌이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문장과 인물의 잔영이 유리로 만든 서까래처럼 어렴풋한 인상을 떠받치고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기억은 열 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벤트레스가 딤 나겔의 거처에 드나들던 시절로요. 그러니 일단은 딤 나겔에 대한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부모는 아들이 세 살이 되기도 전에 갈라섰습니다. 둘은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갔지만 아이에게는 선택권을 남겼지요. 따라서 딤 나겔은 성년식을 치르기 전까지 한 해의 절반은 어머니의 곁에서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 곁에 머물렀습니다. 성년식을 치른 후에는 별불꽃의 이름 아래 별점술을 배웠지만 가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원 호수 옆에 작은 주택을 얻어 살 뿐이었지요.

가족으로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혼외자였습니다. 성년식을 치른 직후에, 본가의 하인과 정을 통했다가 부모의 반대로 혼례는 올리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 그는 거처를 따로 받자마자 아이의 어머니를 데려왔고, 평민의 피가 섞인 자식에게는 사르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저는 당시의 딤 나겔을, 부족한 삶을 부족함 없이 누리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 조용한 요정이 제 아버지의 가문으로 돌아가 피송곳니의 이름을 받든 것은 나트람이 가주 직분에 오른 후의 일이라고만 말해 두겠습니다.

*  *  *

호수는 거대한 반사경처럼 햇볕을 하늘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한여름이었다. 미미한 바람은 수면에 아마포 무늬를 만들었고 나무 잎사귀 틈새로는 사금파리 모양을 한 더위가 뚝뚝 떨어졌다. 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던 사르코는 종잇장 위에 그림자가 한 겹 더해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번째 가문의 도련님께서 평민의 딸을 만나러 오셨군요, 이렇게 좋은 날에 외딴 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누나도 참, 예를 갖춰야 할 사람은 저인데요. 이렇게 말해 볼까요? 어둠달의 벤트레스가 3교구의 추적자를 뵙습니다, 하고요. 아, 역시 안 되겠네요. 누나는 누나인 게 좋아요. 그러니까 제가 신관님께 잠시 건방지게 굴어도 괜찮겠죠?"

사르코는 밝은 웃음을 터뜨렸고, 일어나 소년을 마주보았다. 신관 서임식이 바로 열흘 전이었다. 두 해간은 일을 그르칠까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이제는 그게 모두 한여름의 더위보다도 사소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럼, 나도 신관 서약을 한 지 열흘밖에는 안 됐는걸. 아직도 얼떨떨해. 사이라크가 되고 나는 떨어질 줄 알았는데, 마지막 결투에서 걔랑 맞붙게 됐지 뭐니. 내가 이길 줄은 정말로 몰랐어. 아무튼, 오늘은 왜 왔어? 또 아버지한테 혼난 거야?"

벤트레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스리며 사르코를 마주보았다. 환한 웃음이 어깨까지 오는 금발만큼이나 눈부시도록 빛났다. 햇살을 빚어 만든 조각상도 그녀처럼 찬란하지는 못할 듯했다.

"제가 꼭 아버지랑 싸워야 여기 오는 사람인가요, 누나가 보고 싶어서 오는 거지. 제가 3교구 신관이 되면 그것도 다 누나 보려고 그런 줄로 아세요."

"그렇게 말하는 법은 어디서 배워가지구. 뒤에 꼬마는 누구니? 네 동생이야?"

사르코는 윗몸을 약간 숙여 시선을 벤트레스의 허리께에 맞췄다. 소년에게서 나이만을 스무 해쯤 덜어낸 것처럼 생긴 아이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저번에 말한 사촌동생이에요. 요새는 집에 있는 것보다도 바깥에 나도는 걸 더 좋아해서요, 한 번 데려와 봤어요. 형수님 되실 분이랑 얼굴 익혀 두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얘는 참, 동생이 다 듣겠다. 너도 일단 두 살은 더 먹어야지. 성년식도 안 치렀으면서 혼례를 어떻게 올리려구."

사르코는 핀잔을 주고서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이야기 들었어. 열 살도 안 됐는데 벌써 주문을 배운다면서?"

테네브로즈는 답하지 못하고 머뭇대다가 형의 다리 뒤로 숨었다. 벤트레스가 대신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낯을 많이 가려서요. 평소엔 말도 잘 해요."

"그래, 혹시 과자 주면 좋아할까? 아버지가 굽고 계시거든."

"단 거라면 좋아 죽을 나이죠. 들어가서 장인 어르신께 인사 올리면 될까요?"

"장인어른은 무슨. 내가 가져올 테니 기다리렴."

사르코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서는 목조 주택으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점차 작아져가다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벤트레스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가 났다.

"3교구 신관이 되겠다는 거 말예요, 진심이에요?"

"그러면 거짓말을 할까."

"삼촌이랑은 신관은 죽어도 안 될 거라면서 싸우셨잖아요."

"보석이 진흙탕에 있으니 손에 흙을 묻혀야지."

"세상에서 제일 예쁘시다더니 제 누님들이 두 배는 더 곱네요."

"내 눈에는 저이가 네 누님들보다 다섯 배는 더 예쁘다."

"어쨌든 형님이 이러는 건 처음 봐요. 삼촌 앞에서도 그렇게 웃으시면 서로 다툴 일도 없을 텐데요."

벤트레스는 공기가 희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더위가 불어나면서 숨 쉴 공간마저 메운 듯했다. 그는 밑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서 열매를 하나 떼어냈다. 가지가 휘청거리며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열매는 둥글고 파란 구슬 같았고 꼭지에는 깔쭉깔쭉하고 넓은 잎사귀가 붙어 있었다.

"한 입 먹어라."

"아무 맛도 안 납니다."

"잎사귀를 약간 떼어서 씹어 봐."

"쓰고 떫어요."

이번의 대답은 조금 늦게 왔다. 벤트레스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러면 열매를 다시 먹어 봐라."

"이제는 또 달아요."

"쓴잎나무라는 거다. 잎을 먹어야 열매 맛이 제대로 나."

"그럴 만큼 맛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반대로 생각해 봐라, 쓴 맛만 나고 끝나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열매라도 달콤한 게 다행이지."

벤트레스는 그늘 아래 드러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가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고 웅얼거리기만 했다.

"대전쟁이 나기 전에는 저 나무를 나우파나에서만 길렀다더라. 다행히도 그때 도망친 귀족들 중에서 열매 하나를 가져 나온 사람이 있어서… 야스와다에 있는 쓴잎나무는 모두 그 열매의 후손인 셈이야. 아버지가 같다는 거지, 아버지가……."

*  *  *

어렸을 적의 사촌형님은 말썽꾸러기라는 평가를 듣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망나니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가문에서 벤트레스를 달갑잖게 여긴 것은 그 아버지가 유일했습니다. 스티그미르 말입니다.

스티그미르는 줄곧 반려의 부정을 의심했습니다. 심증은 충분했어요. 아내는 예전부터 아자라스와 사이가 좋았고, 벤트레스는 아자라스를 닮은 데다가, 아자라스의 아들은 다시 벤트레스와 똑같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물론 반론의 여지도 있습니다. 우리 셋의 외모는 모두 조부에게서 온 것이며 벤트레스에게는 그 피가 한 계단을 뛰어넘어 전해졌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무슨 일에든 타당하고 명백한 이유를 찾아 붙이려는 습관은 마음의 본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한 우연보다는 불행한 필연을 찾게 되지요.

스티그미르의 마음은 점차 나쁜 쪽으로 기울어갔습니다―결국엔 아들을 나우파나 폐허에 내던질 정도로요. 당시의 벤트레스는 신관 서임을 막 마친 젊은이였고, 울쿠스나 메기도보다도 어렸습니다. 심지어는 혼담까지 오가고 있었죠.

자신이 조사단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벤트레스는 곧바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영감쟁이, 날 죽이고 싶었으면 진작 그랬어야지! 지금이라도 해 봐! 그러지 않으면 당신 목이 날아갈 테니까!"

저녁 식사 도중이었어요. 평소였더라면 단번에 호통이 날아들었을 텐데 스티그미르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관계에서 가장 공교로운 면은, 제가 큰삼촌에게 마법을 배웠다는 점에 있을 겁니다. 스티그미르는 기묘할 정도로 훌륭한 스승이었어요. 아들을 그토록 괴롭히면서도 아들을 빼어닮은 조카에게는 자애를 베풀었지요. 아버지께서는 그 모순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형님은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거야. 그건 자신이 아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감각만은 아니야. 형수님은 내 오랜 친우였고 원래는 나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어. 그러니까 문제의 근원은 누가 누굴 닮았다거나 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정해진 일을 억지로 바꿔 놓았다는 데에 있다.

형님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동생과 사이가 소원해진 것도, 반려가 슬픈 듯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믿어야만 했지. 따라서 벤트레스의 외모는 좋은 구실이 되었어. 벤트레스가 나를 닮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이자 변명이었던 셈이지.

나는 결백을 증명하려 애썼고 농장에서 칼린카의 영혼을 구해오기도 했는데 형님은 번번이 거부했다. 나를 주문에 가두면 언제든 진실을 들을 수 있는데도 말이야. 불신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거기에 틀어박힌 사람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나는 형님이 네게 잘 해준 이유도 알아. 벤트레스는 거대한 실수이자 부정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그 무엇이었지. 반면 너는 변명할 필요 없이 올바른 상태로서 피난처가 되었어. 요컨대 형님은 벤트레스를 오답으로, 너를 정답으로 여겼던 거야."

하지만 벤트레스가 나우파나로 떠날 때 저는 너무 어렸습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저는 그저 누님 두 분과 나들이를 나가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애완동물을 새로 들이게 됩니다. 열 살이 조금 넘은 인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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