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57화 (158/258)

157화 epist?m? (4)

둘은 파르타에게 해후의 시간을 남긴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란드와르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볼로디아는 거실에 남아 묵상에 잠겼다. 수십 갈래의 우울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 보던 그녀는 주위를 맴도는 하얀 덩어리를 발견했다. 펠로시였다.

"평소에도 괴수 형상으로 다니는군."

펠로시는 들켰다는 듯 짧은 캥 소리를 내뱉었다.

"익숙해서요! 사제님들도 이걸 더 좋아하고요."

"기웃거리지만 있지 말고 앉게나. 할 말이 있으면 뭐든 해도 좋고."

볼로디아는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얀 개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파로 올라가 그녀의 다리에 주둥이를 대고 누웠다. 개의 목덜미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부드럽고 두터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른한 햇살이 발끝을 쓸더니 모든 것이 잠시 생각할 길 없이 평화로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펠로시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시간이 재차 시작되었다.

"아까 전사님이랑 이야기하시는 걸 살짝 들었어요.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싸우는 분위기 같았는데, 서로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다투지는 않았다네. 애당초 의견이 갈렸던 것도 아니야. 그저……."

"그저?"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게나. 이 세계가 놀이 규칙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런데 그 거짓말은 너무나도 당연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불이 뜨거운 것과 같은 원리로 받아들인다고…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자네뿐이라고 말일세."

"비밀이 있나요? 그걸 밝힐지 말지가 고민이신 거구요?"

"밝힐 일은 영영 없을 걸세. 허나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네."

펠로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모르겠네요. 애초에 저는 그런 비밀을, 엄청난 비밀을 가져 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그만큼 중요한 문제는 말루카의 왕쯤은 되어야 알 수 있는 거지 평범한 각인사의 소관이 아니니까요."

그 지점에서 하얀 개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인간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펠로시는 소파에 무릎을 꿇듯이 앉은 자세로, 볼로디아와 시선이 맞닿도록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어린 채였다.

"지금은 왕이 되셨다지만 예전에는 북부 기지에 계셨잖아요. 그때부터 대장군님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면… 대장군님은 저보다 열 살이나 더 사셨고, 그만큼 경험도 많으시고, 당연히 생각도 많으시니까, 뭐, 사실 제가 도움을 드릴 부분은 없는 거죠! 잘 하시리라고 믿어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속에서 짙은 밤색 눈이 잘 닦인 개암열매처럼 반짝였다. 볼로디아는 펠로시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내 소임은 자네 같은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웃어 주게나."

펠로시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볼로디아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펠로시를 일으켜 세우고서는 맞닿은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 일이 끝나면 자네를 왕궁에 들일 생각일세."

"제가요? 대장군님이 저를요? 제가 왜요?"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스스로도 알겠지만, 자네가 어엿한 성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그 점을 감안해서, 내가 거두는 게 제일 낫지 않겠느냐는 결론을 내렸을 뿐일세. 자네 고향 사람들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해 두었어."

"하지만 왕실 하인이라도 되려면 새로 배워야 할 게 많을 텐데요… 워낙 오랫동안 막 살아서… 게다가 왕실에서 일하려면 털이 잿빛쯤은 되어야 할 텐데……."

"하인이 아닐세. 별채에 자네의 처소를 둘 거야.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는 셈이네만… 원한다면 부군 자리를 줄 수도 있네."

펠로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부군요? 후궁도 아니고요, 부군요? 제가요? 제가 어떻게요? 물론 저번에, 편지를 써 드리고 나서 이제 후궁이 된 거냐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저는 그냥 흰둥이인데요! 혼례 결투에 나서면 시작하자마자 죽을 거라구요!"

"나는 말루카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신일세. 누가 내 뜻을 거스르겠는가?"

"하지만 저는 대장군님 말씀대로 제대로 된 사람도 아닌데다가, 각인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부지런하지도 않게 됐구요, 네, 여러 가지로… 정말 여러 가지로 자격이 없다구요! 제가 얼마나 글러먹은 사람인지 모르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알고 있다네."

"그런데, 왜요?"

"세상엔 이유 없이 운 좋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

볼로디아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고, 주군에게 서약하는 기사처럼 경건한 태도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펠로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그때 란드와르도 복도에서 늑대인간 왕의 추태를 관람하고 있었다. 훔쳐볼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벤트레스와 함께 병나발을 불다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려면 사모예드를 데리고 놀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래서 펠로시를 찾으러 나왔더니 경악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공놀이를 할 개도 잃어버린 데다가 볼로디아의 정신상태 역시 걱정이었다.

얼굴을 맞댄 기간을 다 합쳐 보았자 닷새도 안 될 상대에게 진심 어린 청혼을 하는 건 서른일곱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도 하지 않을 짓이다(참고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열세 살이었고, 다섯 날 만에 그 모든 일을 저질렀다). 말인즉슨 이건 연애감정이 아니라 왕실의 일원으로서 주입당한 강박과 스트레스가 뒤섞인 결과물에 불과했다.

불안과 긴장이 극심해지면 사람은 흥분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고들 한다. 스트레스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설렘 때문이라 착각하게 된다고. 이걸 심리학 용어로 뭐라고 하더라? 흔들다리 효과?

물론 타향에서, 동족에게 이끌리는 건 이해합니다. 시국도 시국이니만큼 마음의 피난처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꼭 펠로시일 필요가 있을까요? 대장군님, 부디 잘 고민해 보시길 권합니다. 분명히 말루카에서 편지를 쓸 때까지는 식객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펠로시나 저나 신용불량자이긴 피차일반이고, 만약 둘 중에서 골라야 한다면 도박 중독보다는 알코올 중독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씨발.

란드와르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주먹을 쥐고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자신도 제대로 맛이 간 게 분명했다. 애당초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광기였다.

볼로디아의 광기는 존중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개가 필요했다. 대형견의 심리적 치유 효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개가 한 마리 더 있었다.

그는 조용히 등을 돌려 테네브로즈의 방으로 향했고, 요정을 끌고 나왔다. 사연 있는 놈을 데리고 이러려니 미안하긴 했지만, 뭐, 무슨 사정인지도 모르는데다가 당사자가 특별 대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끝이지.

마당에 선 란드와르는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일단 변신부터 해 봐라. 너 개로 변할 수 있잖아."

심경이 싱숭생숭해진 것을 제외하면 솔로틀과의 대면은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일단 마력 폭풍에서 살아남은 데다가 계약서를 고쳐 쓸 기회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테네브로즈를 써먹을 일도 늘어난 것이다.

아즈리온이 천사와 꿈 조각의 융합체인 것처럼, 요정 놈도 꿈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각의 성능이 다를 뿐이다. 개로 변신할 수 있고, 죽어도 얼마든지 되살아나지만, 그걸 제외하면 평범한 요정과 같다고 했다.

그 밖의 소소한 능력으로는 지혜의 고리 사본을 만들어내는 게 있다. 주검에 지혜의 고리를 동봉하면(테네브로즈가 직접 동봉이라는 단어를 썼다) 정원사가 직접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지 않아도 솔로틀이 그 혼을 따로 챙긴다는 것이다. 일종의 분류표인 셈이다.

아무튼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솔로틀이 망자를 수집품으로 모으든 뭘 하든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니까. 울쿠스가 거기에 있다는 건 논외로 치고, 아무튼. 지금 당장은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시급했다.

"예?"

"개로 변신하라고."

"잘 못 들었습니다?"

짧게 되물은 테네브로즈는 자신의 미래를 직감하는 것처럼 공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빨리 하자."

"나으리는 그 늑대인간은 내버려두고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지금 볼로디아가 펠로시한테 청혼을 했다고."

"그래서요."

"너는 남의 형수님을 개 취급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저는 개 취급을 해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넌 결혼을 안 했잖아."

"제가 혼례를 올렸더라면 나으리만한 아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올렸어? 안 올렸지?"

테네브로즈가 입을 꾹 다물고는 란드와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펠로시는 착해서 말도 잘 들었는데 요정 새끼는 반항을 하고 있었다.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그러면 니가 유부남이야?

신경전이 길어지려던 찰나 쾌활한 웃음소리가 긴장을 깼다.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자 벤트레스가 앉아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는 몰라도 얼음잔까지 만들어서 위스키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너는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시고 있냐."

"개와 주인이 있는 이 정경이 안주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벤트레스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테네브로즈에게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이건 맹약에 안 걸리나? 일단 먼저 말을 걸진 않았고 물리적 접촉도 없는데다가 주위를 하릴없이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완벽하게 무죄였다.

하지만 테네브로즈는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간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일단 저걸 좀 치워 주셔야겠는데요. 공놀이는 그 다음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란드와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요정 놈이 저번처럼 울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는 벤트레스에게 외쳤다.

"야, 요정아! 동생이 들어가란다!"

"그럼요, 아우님께는 항상 사랑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형님이 너 사랑한단다."

테네브로즈는 몸을 홱 돌려 벤트레스에게 주문을 꽂아 넣는 것으로 응수했다. 놈이 일어서려다가 갑자기 휘청인 걸 보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인 듯했다. 벤트레스는 추가타가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도망쳤다.

녀석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테네브로즈는 다시 란드와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표정에는 체념과 한탄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됐다. 머리 아픈 거 다 풀렸어."

"남을 괴롭혀야 낫는 두통이 있다니 신기한데요."

지금까지는 자신이 괴로워하는 쪽이었는데 벤트레스를 들인 것만으로도 정반대가 되다니 기뻤다. 란드와르는 멀리로 공을 던져 놓고는 말했다.

"병은 다양한 거 모르냐. 좀 걷자."

"시킬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꼭 용건이 있어야 걸을 수 있는 거냐. 할 거 없어서 그런다."

"아까 그거 데리고 술이나 자십시오. 서로 잘 맞는 것 같던데요."

"어젯밤에도 먹여 봤는데 많이 마시면 뻗더라. 좀 있으면 드러누울 걸."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란드와르였다. 그때 둘은 정원 가장자리의 과수 밑을 지나고 있었다.

"너 사촌형님 말이야, 정 보기 싫으면 그냥 여기 두고 갈 수도 있어. 꼭 필요한 부분도 없고 믿음직스러운 놈도 아니니까. 죽여 달라는 부탁은 못 들어주는데, 대신 안 보이게는 해 줄 수 있다고."

테네브로즈가 멈춰 서서는 란드와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그늘이 얼굴의 반절을 덮고 있었다. 보랏빛 눈이 물에 잠긴 그림자마냥 정연하게 일렁였다.

"나으리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아무렴 상관없습니다. 거슬리기야 해도 못 참을 건 없으니까요."

"그거 장담할 수 있어?"

"이게 장담이 필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갑자기 죽여 달라면서 엎어지면 내가 곤란해서 그런다. 폐허에서도 그랬지 않냐."

"긴박한 상황에서 그럴 만큼 원한이 깊진 않습니다."

"깊어 보이던데. 울었잖아."

"눈물은 제 나머지 때문에 나는 겁니다. 가루를 들이마신 사람이 재채기를 내뱉는 거랑 같은 일이지요."

"그렇게 치면 벤트레스가 가루라는 거잖아."

이야기가 그 언저리를 계속 맴돌았다. 테네브로즈는 자신이 벤트레스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가장 혐오하는 사람을 대라면 그 이름을 읊을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하나만 해, 하나만. 그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예전에, 수십 년도 더 전에, 벤트레스를 죽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계속 나긴 합니다."

"누가 그랬는데. 나트람이?"

"사촌형님이 스스로 그랬지요."

그들은 나무그늘을 지나 다시 햇볕 아래로 나왔다. 흥건한 빛이 풀밭을 뭉개듯 했다. 눈을 감고 공기만을 느끼면 지금이 여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말루카에서 논의를 나눌 때,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했던 게 있었지요. 제 개인사에 대한 것들 말입니다. 나으리께서 괜찮으시다면 지금을 그 나중으로 삼으려 합니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요정 소년과, 그의 두 누님과, 사촌형제에 대한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