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epist?m? (3)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제가 로안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고 지금은 확신이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장을 맡겼더라도 똑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도의에 어긋난 일이라면,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도 물어야만 합니다."
물론 일찍부터 진실을 알려주었더라면 죄책감은 덜었을 터였다. 소년 개인에 대한 책임은 그것으로 끝이었으리라. 하지만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은 인류 전체였다. 진상을 알게 된 로안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는 모를 일이므로. 양심을 위해, 한 사람을 위해 모두의 미래를 도박에 내던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질문에는 완벽한 답이 없을 겁니다. 일전에 대화를 나눴다시피 무결한 돌파구가 존재하는 문제는 아주 적고, 대부분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차악을 고르려는 시도만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 아닌 차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신이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그게 만약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었을지라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인간의 신 역시 요정의 신과 똑같다고 말한 다음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되, 최대한 그러지 않을 방법을, 선의 총량을 늘려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숙고하던 볼로디아는 신중한 태도로 운을 뗐다.
"나도 그 점에는 동의하오. 모두를 위해 당연히 하나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것은 게으른 악덕이지만 누구도 손해를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은 감상주의요. 그래서 소년에게 심장을 주는 데에 찬동했소. 사정을 숨기는 데에도 이견이 없소. 말루카의 체제가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다는 것 또한 인정하오."
"그렇습니까. 그러면요?"
"허나 이런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오. 우리가 결코 의심치 않은 가치가, 모든 도시의 체제 아래 깔린 미덕이, 예컨대 효율성과 합리성 따위가 사실은 이방인들이 가져온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볼로디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말루카의 역사를,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파울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도시의 형상에는 이방인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 그러므로 늑대인간들의 사고 역시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순혈은 흰둥이가 하찮은 대우를 받는 게 자연의 이치라고 믿소. 보통은 그럴 수밖에 없소. 말루카를 다스리는 것은 군부고, 오로지 강한 자만이 군부의 최상층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오… 허나 첫 번째 왕이 마법사였더라면 도시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었을 거요. 그렇지 않소?"
상상의 범주는 다양했다. 애당초 피투성이 심장이 없었더라면, 말루카가 고립을 택할 이유도 없고 괴수가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도 없었더라면 군부가 이토록 큰 힘을 얻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 모든 질문은 동생에게서 시작되었소. 그 아이의 평생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는 스카르파가 고통 속에 자랄 일도 없었을 테고 흰둥이의 처우도 완전히 달랐을 거요. 인간들이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한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사고관은 다만 만들어진 것인데―"
"만들어진 것인데?"
강현은 마지막 어구를 되풀이했다.
"그런데 순혈은, 심지어 흰둥이마저도, 대부분은 그걸 불변의 법칙으로 받아들인다오. 다른 삶을 감히 상상하지 못하지. 나는 말루카에 있는 동안 그걸 고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소만, 순혈은 물론이고 흰둥이마저도 내 계획을 낯설게 느끼오. 통치자의 뜻이니 받들지만 동감은 어렵다는 거요. 더 나아가서 나 역시, 계획을 짜는 동안에는 인간 도시의 형상을 많이 참고했소."
볼로디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저 공허 속에는 수많은 세계가 흩어져 있다고 들었소. 정말로 다양한 세계가 말이오. 그 각각에는 우리가 감히 이해하지 못하는 형태의 영광과 질서가 존재할 거요. 어쩌면 이 세계부터가 그랬는지도 모르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생각해 보시오―우리는 요정의 사랑을 알지 못하며 그게 만들어내는 법도를 이해할 수조차 없소. 도덕과 윤리를 모르는 족속이 어떻게 제국을 다스렸을까 묻는 게 고작이란 말이오. 하지만 제국은 오래도록 이 땅에 군림했소. 이방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여전했을 거요. 그러니까, 당신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충성이나 도덕이란 사실 혼이 조각나면서 생겨난 결함이고, 요정의 마음이야말로 이 세계의 원형(原形)이자 진정한 미덕일지도 모르오."
마지막 문장은 앞선 것들보다 조금 늦게 왔다… 솔로틀의 말이 그 뒤를 잇듯이 떠올랐다. 늑대는 인간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요정들 역시 아낀다고. 창조주가 이방인을 불러낸 것은 다만 깨어진 약속을 바로잡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아즈리온은 천사와 꿈 조각의 융합체라고 했다. 그 자아에는 늑대의 몫과 이방인의 몫이 섞여 있을 것이다. 요정을 도살한 쪽은 이방인일 테고 이시 타브를 처치하지 않고 돌아간 쪽은 늑대일 터였다.
그 지점에서 강현은 볼로디아의 서두를 상기했다.
― 허나 이런 생각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오. 우리가 결코 의심치 않은 가치가, 모든 도시의 체제 아래 깔린 미덕이, 예컨대 효율성과 합리성 따위가 사실은 이방인들이 가져온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의혹은 파울리스의 항변과 궤를 공유하고 있었다. 생쥐들의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이스트리아는 낭만적이고 비합리적인 세상으로 남았을 터였다. 도시를 이끄는 것은 관료와 서류 더미가 아니라 마법사 왕 하나의 변덕이었으리라. 그런 왕과 장군이 도처에 널린 세상에서는 합리성이라는 낱말에 별다른 무게가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정들의 마음이야말로 이 세계의 원형이자 진정한 미덕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인간과 늑대인간의 도덕은 오히려 결함일 거라고요. 그렇다면 대장군님의 입장은… 우리가 요정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까? 또한 지금의 체제는 이방인들이 다른 세계에서 수입해 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부해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아니오! 나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인간 도시의 형태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오. 그게 이 세계를 진보로 이끌었음을 인정하오―그래, 이방인들은 인류를 완성시키고 있소. 우리는 지금도, 패배자들을 과거에 남기면서 무한한 성공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고 있는 거요. 여기까진 좋아. 아무 문제도 없지."
볼로디아는 말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강현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은 기묘할 정도로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눈동자 너머에서 휘도는 낱말을 헤아리려 애쓰다가 이만 포기했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정리해 읊었다.
"패배자의 처우는 따져볼 일이지만,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대장군님도 생쥐들의 대의에 동의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 이 주제를 더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 거기에 바로 핵심이 있소! 나는 그걸 부정하지 않소! 다만 우리 모두가 망가진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바꿔 놓은 세계 속에서 평생을 살아 왔기 때문에, 그걸 의심할 수조차 없어진 게 아닌가를 묻게 된단 말이오! 이해하시겠소?"
각각의 문장이 몰아치듯 닥쳐왔다. 강현은 생쥐들이 수입한 미덕과 체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았고, 침묵했다. 그것은 지구의 질서였으며 이강현 역시 지구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오!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능성을 쫓으려 하오! 그리고 번번이 이 세계에서는 해답을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만약 찾아내더라도 나는 그걸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로디아와 자신은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윤리와 준칙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이 성립하는 배경을 논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기저를 지탱하는 것은 망각과 기억의 이분법으로는, 땅의 윤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파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세상이 그 자체로 세상과 불화한다면, 생쥐들을 몰아내야 한단 말인가? 이스트리아를 원래의 형태로 돌려놓기 위해서? 강현은 거기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다른 잣대를 상상하지 못하는 이상, 모두가 겪어온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물론 늑대는 이걸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제 이곳의 일부가 되었고, 인간이 살아가는 것 역시 그들이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은 고려하지 맙시다. 당연한 세계에 충실하자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문제는 우리가 믿는 만큼만 진실이오. 지금의 세계가 당연하다는 것 역시."
"하지만 그러면 대안이 있습니까? 대장군님은 이런 세상도, 변덕스러운 신과 마법사들이 다스리는 세상도 아닌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그 필요를 납득시킬 수 있습니까?"
"아마도 없겠지―지금으로서는."
볼로디아의 대답은 고통스러울 만큼 신중했다. 그녀는 이어 반문했다.
"허나 가능성을 체념에 가두는 것은 낭비가 아니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면 고민하지 않습니다.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깊이 생각하려 해요."
강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곱씹었다. 교통사고의 기억이 희미해진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혹은 반대로,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고를 마음에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인생이 왜 이렇게 고꾸라졌는지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변치 않는 상수로 두어야만, 모든 게 자신의 능력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어야만 세상을 견뎌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선 자리도, 맞서고 있는 문제들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매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 생쥐들을 향한 분노와 로안의 생을 어지럽혀 놓았다는 감각으로부터, 자괴감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기 위해서는 이 상황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믿어야만 했다.
그러니 볼로디아의 말이 옳은지도 몰랐다. 가능성을 체념에 가두는 것은 낭비고, 자신은 불능을 방패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 가능성이란 심장의 주인에게 있는 것이었지 언젠가 돌아갈 부외자의 몫은 아니었다… 강현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이윽고 늑대인간의 신은 수긍할 수 없는 전략을 받아든 장교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더 고민해 보겠소. 당신도 당신대로 심려가 깊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되어 미안하오."
"아닙니다. 대장군님은 이곳의 사람이고, 저는 잠시 왔다 갈 뿐이니까……."
그리고 긴 침묵이 있었다. 일어나 다른 관심사를 찾는 게 현명한 일이겠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적 그 자체가 미처 내보내지 못한 낱말들로 변해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볼로디아의 입이 열렸다.
"…잊고 있었던 게 하나 더 있소. 작금의 문제에 비해서는 사소하오만, 유언이니 지켜 주어야 할 것이오. 당신에게 덤벼든 요정이 목걸이를 남겼소. 서부 회당에 전해 달라고 했으니 정보사 사제들에게 대신 맡기려 하오."
"서부 회당 말입니까?"
"거기에 자신을 기다리는 인간이 있다는 말밖에는 듣지 못했소. 아마도 인간 세상에 미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오."
서부 회당이라는 말은 강현을 늦겨울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파르타와 로안이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를. 수십 해 전에, 파르타는 떠돌이 검사와 며칠간 함께 다녔다고 했다. 헤어지는 날 대련을 했고, 그러고서는 깨달음을 얻어 실력이 갑작스레 늘었다고.
공교로운 우연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서라도 위안을 얻고 싶었다. 생쥐와 늑대와 저승에 대한 상념을 미룰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지금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익숙한 세계의 익숙한 감정이었다. 한 사람의 눈물로 세계를 변명할 수는 없지만, 탄식에는 언제나 찬란한 면이 있다. 그들이 알고 믿어온 것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는 증거가…….
"함께 갑시다. 파르타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겁니다."
* * *
볼로디아와 란드와르는 목걸이를 챙겨 세카두 외곽 수도원으로 향했고, 파르타의 집무실을 찾았다. 파르타는 평소와 같은 정중함과 열의로 그들을 맞았다. 그 침착이 흔들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르타는 모티스가 남긴 말을 물었고, 볼로디아는 기억하는 바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녀가 인간 노예에게 검을 배웠다는 점. 인간 세상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자언했다는 점. 하지만 거짓임이 분명하다는 점. 투항을 제안한 것이 무언가의 기폭제가 되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유언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파르타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감싸 들었다. 그 손길에는 유골함을 안아드는 것과 같은 조심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세파에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지도 않고 그저 정지했다… 영원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는 동안 비애의 감각은 종교적인 숭고함이 되었고, 황홀감으로 변했다가, 마침내는 까마득한 암흑 속으로 추락해갔다.
"홀로 있고자 합니다… 부탁입니다.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문이 열리고는 다시 닫혔다. 그리고 늙은 남자만이 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