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epist?m? (2)
란드와르 일행이 폐허를 누비는 동안 바깥에서는 세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늦겨울은 늦봄이 되었으며 세카두 외곽 수도원은 새파란 잎사귀로 뒤덮여 있었다.
나우파나의 별에 대한 것은 정보사 선에서 적당히 처리가 되었다. 공표식 일정까지 확실히 잡혀 있다고 했다. 란드와르는 파르타가 파울리스보다 더 일을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공교롭게도 첫 음절까지 울림이 같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재정렬 목걸이는 두 개가 완성된 상태였다. 수련생을 교육시키는 동안 벨레다가 짬짬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란드와르는 타일라프람에 전령을 보내 로안이 수정 심장을 얻었음을 알리고 벨레다에게도 돌아오라는 뜻을 전했다.
물른 로야페타의 상업 가문에게는 양해를 구했다. 기술 교류는 잠시 중단되겠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황무지의 학자들> 시나리오에서는 벨레다가 활약할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사안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뒤, 란드와르는 벤트레스를 수도원에 감금하는 방안을 고려하다가 이만 단념했다. 그랬다가는 사제들이 미친 요정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위험이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 * *
창문 격자 형태로 빚어진 햇볕은 정갈하게 포장된 수제 비누 같았다. 엷은 먼지가 빛 속을 둥둥 떠가는 게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란드와르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20세기의 마지막 시기에 유행하던 이야기들을, 종말론과 휴거와 전산적 파국을 곱씹었다.
멸망이 요란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런 상상이 역설적인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탓이라 생각한다. 부드러운 봄볕을 만끽할 수 있으니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진정한 종말은 뿔나팔 소리와 함께 올 것이며 모두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어떤 파멸에는 기척이 없다… 솔로틀과의 계약 조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늑대의 이름을 되찾은 후 꿈 조각을 반환하라는 것. 그 과정에서 협조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돕겠다는 것. 하지만 실패한다면, 혹은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면 달에 영혼을 실어 보내는 일이 더는 없으리라는 것.
이윽고 정온한 종말이 뿔나팔 소리를 밀어내며 뇌리를 가득 메웠다. 그날이 오면 아이는 잉태되지 않을 것이며 산 자들은 차례대로 무덤에 몸을 맡길 것이다. 그런 식으로, 끝을 끝이라 부를 사람조차 사라진 후에도 햇살은 여전히 따스할 것이다…….
<계속 궁전을 탐색하고 있소만… 진척이 없다오.>
그리고 헤이딘의 말에 란드와르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모두가 늙어 죽는 미래는 슈문을 만나고 이시 타브를 죽인 뒤에나 걱정할 부분이었다. 만약 요정 신들마저도 늑대의 진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운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하루밖에는 안 되었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다만 아무 말도 않으면 모두들 불안할 테니…….>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란드와르는 검지를 내려다보았다. 세카두에 돌아온 후로는 줄곧 재생의 반지 대신 헤이딘의 것을 끼고 있었다. 벨레다는 아직 타일라프람에 있는데다가 달리 맡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헤이딘 역시 궁전을 탐색하느라 바쁜 탓에 거슬릴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들어가 보겠소. 궁전에 들어가 있으면 시간을 곧잘 잊게 되니, 그 점은 미리 양해 부탁드리겠소.>
고개를 끄덕인 란드와르는 순간 잊고 있었던 물건을 떠올렸다. 메기도의 영혼을 받아 두고서는 줄곧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잠깐만요, 확인하실 게 하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직접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아서요."
<결정? 결정이라… 내가 감히 판단할 부분이 있단 말이오?>
"어르신의 일입니다. 달갑진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란드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의 서랍으로 향했고, 작은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초록색 불꽃이 그 안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청지기가 조카분의 혼을 선물했습니다. 슈문에게 가져다 주면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눌 자리가 생길 거라더군요. 만약 만남을 원치 않는다면 말씀하십시오."
<모두 잊었소. 나는 모두 잊어버렸어.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듣는다 쳐도…….>
헤이딘은 말을 멈췄지만 반지 속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오래도록 망설였다. 란드와르는 그저 기다렸다.
<그래도 일단은 가져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늙은 망령을 신경써 주어서 고맙소.>
헤이딘은 다시 궁전으로 떠났고 란드와르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장은 언제나 의식의 흐름보다 반 발짝 늦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번뇌의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단어가 소진되고 모든 것이 순전한 감각으로 변할 무렵 볼로디아가 문간에 발을 들였다.
"소년이 깨어났소.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군."
* * *
"모두 기억이 납니다. 기억이 난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면 그 순간이 머릿속에 나타나는 느낌이에요. 누군가가 그림과 소리로 이루어진 덩어리를 머릿속에 넣어주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기억이 나요. 동생은… 셀리멘 님은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어요. 사실대로 말하라고요. 정직하게……."
로안은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점점이 이어지다가 뚝 멎었다. 고개를 홱 돌린 소년의 눈에 란드와르가 담겼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먼저 말해. 그래야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
"잘은 모릅니다. 언약궤를 연 다음부터는 모두 깜깜해요. 하지만 이시 타브가 현계로 나오지 못하게끔 한 다음…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건 확실히 떠오릅니다. 천계로 돌아가냐고 여쭤 보았어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원래 떠나왔던 곳이 있다고, 땅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요……."
벤트레스는 불멸자들의 일을 묻지 않았다. 테네브로즈는 애당초 청지기의 수하다. 볼로디아와 헤이딘은 생쥐들의 부정을 알고 이해했다. 하지만 알세스트는 그걸 어떻게 여길까? 로안은? 이 소년이 천 년 전의 전생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대답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너는 다른 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냐."
"다른 신들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파울리스께서는 곧잘 제 머릿속에 말씀을 불어넣어 주셨어요. 정말로 많은 게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노르덴홀즈 장원을 이룬 것들이, 발명품과 대평원의 농장이 모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란드와르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입을 벌렸다가는 소리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웃음이든, 고함이든, 무엇이든 간에. 다행히도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볼로디아가 말을 받았다.
"…사고가 있었다는군. 만신전의 일원이 그 몸을 빌려 쓰는 중일세."
"그러면 하나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제가 누구였는지는…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기억을… 그리고 심장을……."
고통 어린 신음이 말을 끊더니 소년의 허리가 푹 꺾였다. 아직은 깨어날 상태가 아닌 듯했다. 란드와르는 짧게 혀를 찼다.
"일단 다시 자라. 멀쩡해지면 그때 이야기하자."
로안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혹은 기력이 다해 쓰러진 것뿐인지도 몰랐다. 볼로디아는 소년의 베개 위치를 바로잡아준 후 란드와르를 다른 방으로 이끌었다.
"따로 생각해둔 게 있는지 여쭈려 하오."
"그 점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사실과 거짓을 조금씩 섞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렇더라, 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진실이 어쨌든 간에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쪽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이 일의 중요성은 로안도 알고 있습니다. 옛 기억을 되찾았으니만큼 셀리멘을 심장에서 해방시켜야 했다는 것도 납득하겠죠. 그 적임자가 자신뿐이라는 것까지도요. 그러니까 일단은, 알세스트의 환생이라는 걸 알고야 있었지만… 더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함구했다고 설명할 겁니다. 차원 생쥐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 두는 게 좋을 테고요."
볼로디아는 란드와르를 직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더라도, 내가 걱정하는 바는… 셀리멘에게 주어졌던 계약서가 소년에게도 승계된다지 않았소? 일전에는 경황이 없어 챙기지 못했소만, 그 명세를 지금이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오."
예리한 지적에 란드와르는 숨을 멈췄다. 그래, 왜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것 때문에 머리가 가득 찬 채 옛 신전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저승의 틈에서, 볼로디아에게 상황을 설명한 것까지도. 그리고 솔로틀이 나타나면서 셀리멘의 계약서 따위는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검토하실 수 있도록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큰 결함은 없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끈으로 묶인 서류가 탁자 위에 나타났다… 란드와르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거나 불공정한 대목 몇 개를 발견했다. 개중 핵심이 되는 것은 별에 대한 통제력을 만신전에 일임한다는 부분이었다. 가능한 선에서(계약서는 수정 심장의 불안정성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명시하고 있었다) 힘을 누릴 수 있되 최종적인 결정권은 파울리스에게 있다고.
티아가 최악의 경우에도 수습이 가능하다며 자신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첫 번째로 만난 조각이 셀리멘이었더라면 입을 닦고 넘어갔을 테고, 그 밖의 경우엔 어떻게든 계약서를 쓰게 만들었겠지. 왜 그걸 자세히 따지지 않았을까?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기실 의지가 있었더라면 언약궤를 마주하기 전에 처리할 수도 있었던 사안이었다. 그는 차오르는 좌절감 속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쓱 문질렀다. 폐허에서 흘린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심장을 터뜨릴 때 이 조항이 사용되었을 겁니다. 폭탄을 제어할 용도였겠죠."
"소년에게는 목줄이 되겠군. 계약서를 고쳐야지 않겠소?"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시 타브를 처치한 다음에 털어놓을 겁니다. 지금은… 지금 이 사실을 밝히는 건 너무 위험이 큰 일입니다. 어차피 생쥐들이 우리를 방해하지도 않을 테니, 당분간은 유명무실한 조항이 되겠죠."
머릿속의 비평가가 지적했다. 너무 간편한 합리화 아닌가?
강현은 대답했다. 그래, 나도 어느 정도는 쓰레기인 거지. 생쥐들이 쓰레기인 것처럼. 그래서, 그래서 뭐가 문제야? 내가 흰둥이들을 죽였어? 남들은 안 이럴 것 같아?
합리화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대안을 택할 자신은 없었다. 애당초 대안이라는 게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로안뿐만 아니라 생쥐들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곳을 나가 인간들에게 진실을 알린다면 모두가 살아온 세계는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간편한 합리화일지도 모르겠지만 강현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씨발, 그래, 안 간편한 게 뭔데? 안 간편한 게 뭐야? 마요르가를 죽이고 스카르파의 결혼식을 취소하는 거? 아니면 울쿠스처럼 목숨을 바쳐서 연극을 끝내고 세상을 바꾸는 거? 그게 지금 가능한 일이야? 애당초 여기서 뭘 어떻게 바꾼다는 거야? 마법사와 이교도와 반신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는 생쥐들의 유일한 목표가 인류의 번영이라는 사실을 곱씹었다. 협잡질에 능한데다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지라도, 어쨌거나 그런 악행은 모두 평화의 기치를 매달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의 평화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 역시…….
길고 우울한 침묵이 지나간 뒤에, 볼로디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진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오. 이방인의 노력을, 그들이 일군 것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오. 당신들은 분명 뛰어난 통치자였고, 인류를 훌륭한 방향으로 이끌었소. 허나… 옳음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계속 나를 괴롭히오."